2022년 3월 15일 화요일 저녁 6시. 메일 수신확인란에 ‘읽음’ 표시가 하나둘 늘 때마다 뱃살이 1mm씩 줄어드는 듯한 기쁨과 고통을 동시에 느끼며 책방을 빠져나왔다. 5월 31일까지 계속될 연재 프로젝트 ‘주간 봐라물왕멀296’은 3개월간 구독료 3만 원을 내면 매주 화요일 저녁 6인의 창작물(그림·시·소설·희곡·노래·비보잉 영상)을 메일로 받아볼 수 있는 유료 구독 서비스다. 일찍이 이슬아 작가가 발명한 [일간 이슬아](2018~현재)의 구독형 메일링 연재 시스템을 그대로 옮겨왔다. 무엇보다 ‘창작물 직거래 메일링 구독 서비스(=선불)’로 정리되는 두렵고도 매력적인 거래 방식을 통해 새로운 동력을 얻고 싶었다. 2년 넘는 코로나 시국 속 창작자이자 자영업자로 살아온 우리가 지금 와서 못할 게 뭐 있을까. “오히려 좋아. 늦었지만 가보자고.”
그날부터 책방 운영자 6인은 매주 구독자에게 새 창작물을 보내는 두려움과 두근거림을 안고 책방 문을 열게 되었다. 3만 원이 요즘처럼 커 보인 적 있을까. 통장에 선명히 찍힌 입금자 이름이 건네는 선불의 힘은 셌다. 놀라움과 고마움을 안고 매호 마다 조금씩 변화 중인 우리의 연재 프로젝트는 생물처럼 계속 움직이고 있다. 전주 선미촌 60년대 옛 성매매업소를 고쳐 책방 문 연 지 4년 차. 답은 없어도 이야기는 있다. 오늘도 꾸준한 서사를 향해.
물결서사의 시작
책방 이름은 도로명 주소 ‘물왕멀’에서 따온 물 이미지와 서점을 뜻하는 ‘서적방사(書籍放肆)’의 줄임말을 결합해 만들었다. ‘물이 좋은 동네’라는 역사적 의미를 담은 아름다운 지명을 살릴 수 있는 ‘물결’이라는 말을 생각했다. 어떤 말을 붙여도 흐르게 만드는 긍정적인 힘, 잔잔하게 흐르면서 상승하는 힘이 있어 좋았다. ‘서사’는 오늘날의 서점(書店)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사실을 있는 그대로 서술한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창작자들은 자기만의 고유한 이야기라는 서사의 의미를 우리 책방 중심에 두고 싶어 중의적인 의미를 담아 ‘물결서사’라 지었다.
2018년 개점 당시 책방건물은 ‘4호점’이라 불렸다. 전주시가 선미촌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인 ‘서노송예술촌 프로젝트’를 통해 매입한 다섯 곳 중 네 번째 공간이어서다. 1960년대 지어진 이곳은 오랫동안 성매매업소로 쓰이다 창고로 비워져 곳곳이 말할 수 없이 낡고 때 묻었지만 그만큼 대체할 수 없는 시간을 움켜쥐고 있던 공간이었다. 행정에서는 이곳을 어떤 용도로 사용하면 좋을지 모색하던 중 “오랫동안 문화적으로 소외되어 있던 우리 동네에 누구나 책을 누릴 수 있는 공간이 하나 생겼으면 좋겠다”라는 주민들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그때 선미촌에 애정을 갖고 전시기획자로 활동하고 있던 장근범 사진가가 나서 동료를 모았다. 선미촌 전시에 직접 참여했거나 적극적인 관람자로 남다른 공감력을 갖고 있던 고형숙·서완호(화가)·김성혁(성악가)·민경박(영상크리에이터)·임주아(시인)·최은우(시각예술가) 등 전주에서 활동하는 3~40대 창작자들이었다. 그렇게 7인이 의기투합해 결성된 ‘물왕멀팀’은 전주시에 자발적으로 제안서를 넣고 외부에서 창업자금을 마련해 공간을 리모델링 했다. 사비를 털어 책을 채우고 요일마다 한 명씩 돌아가며 책방 문을 열었다. 오픈할 당시엔 겨울철이라 해가 금방 져서 늦은 저녁까지 문 여는 게 쉽지 않았다.
지금은 성매매업소가 한 군데도 남아있지 않지만, 당시에는 스무 곳 넘는 업소가 불을 밝히고 있어 책방을 업소로 착각한 취객들이 거의 매일 찾아올 정도였다. 그에 반해 선미촌의 낮은 여느 구시가지와 다를 것 없이 골목마다 옛 자취가 남아있었고 분위기는 소리소문없이 평온했다. 우리는 책방을 연 이후 매일 밤과 낮의 확연한 시차를 느끼며 기묘한 공존을 2년 넘게 이어왔다. 특수한 장소성을 안고 있는 도시 속 격리지대지만, 이곳에도 엄연히 사람이 살고 삶을 꾸려가고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빠르게 바뀌는 동네 풍경과 소외되어 사라진 이웃 사람들은 누가 기억하고 이야기할까. 우리는 책방 안팎을 서성이며 목격하고 감지한 것들을 저마다의 작업물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SNS에 매일 한 명씩 돌아가며 발표한 창작 연재 프로젝트 ‘봐라물왕멀296’이 그것이었다. 물결서사 주소인 물왕멀2길 9-6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들을 함께 봐 달라는 뜻이었다.
  • 박준 시인 낭독회
  • 물왕멀팀 2기 멤버
실험으로 만드는 물결서사다움
물결서사는 단순히 책 파는 곳을 넘어 공연, 시낭독회, 워크숍, 세미나 등 다양한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진행해왔다. 그러면서 책방에서 고정으로 진행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뭔지 가늠했고, 물결서사다운 콘텐츠는 무엇인지 실험했다. 오밀조밀한 서가 앞에서 일반 책방에서는 쉽게 보지 못하는 예술 분야 책을 추천받거나 벽면 곳곳에서 미술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다양한 예술 도서를 선별하고 여성과 젠더 이슈를 다루는 신간도 눈여겨볼 수 있다. 지난해부터는 단골손님 보라뷰 씨와 분기별로 3권의 책을 고르고 추천 이유를 편지로 써서 동봉하는 ‘속수무책’ 큐레이션을 만들었고, 인스타그램에서 책 소개 라이브 방송을 진행하고 있다.
물결서사는 비빌 언덕 없는 젊은 예술가가 성장할 수 있는 인큐베이터가 되기도 한다. 서로 다른 장르의 예술가들이 교류하며 시너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 정주 공간이 있다는 건 큰 힘이다.  그 기운을 모아 2020년부터는 기존 멤버 서완호(화가), 임주아(시인)에 방우리(소설가)·송지희(극작가)·장영준(비보이)·조현상(성악가) 등 4명을 영입해 새로운 물결서사 시즌2를 시작했다. 창립 멤버들처럼 지역에서 하고 싶은 것들이 많지만 공간이 없거나 함께할 인적 네트워크가 부족해 고민하는 후배들과 에너지를 주고받고 싶었다. 더 많은 예술인과 이 공간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도 컸다.
  • 단골손님 보라뷰의 속수무책 큐레이션
  • 《김오순展-이모는 외출중》
잊지 못할 이웃을 기리며
그런데 새로운 멤버가 결합한 지 겨우 두 달 만에 코로나가 터졌다. 책방에서는 손님 얼굴 보기가 어려워졌고, 바깥에선 무대와 기회가 사라졌다. 어느 날 마스크를 쓰고 어색하게 책방으로 출근하던 길, 옆집 사는 오순 이모가 보이지 않았다. 낮에는 고물을 줍고 밤에는 신을 모시는 무당(만신)으로 우리와는 둘도 없는 친구였다. 그의 굴곡진 삶은 우리만 듣고 있기엔 너무 각별한 질감의 것이었다. 내친김에 <만신 김오순의 인생이야기>라는 강연 자리를 만들어 책방에 정식 초청하기도 했다. 그렇게 서로 마주하며 지낸 그가 어느 날 불의의 사고로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말할 수 없는 충격에 휩싸였다. 장례식장에 다녀온 뒤 정신을 차려보니 두 달이 지나 있었다.
매일 슬픈 얼굴로 골목을 걸어들어오는 건 오순 이모도 원하지 않을 터였다. 마음을 추스르고 책방 분위기도 일으켜 세울 겸 다 같이 모여 소소한 행사를 기획하기로 했다. ‘만원물결상점’의 줄임말인 ‘만물상’ 바자회였다. 집에서 잠자고 있는 물건을 만 원 이하로 내놓는 것이었다. 며칠 사이 70명 넘는 기증자가 책방에 다녀갔다. 쌀부터 의류, 장식품까지 다양했다. 아껴 입던 옷을 100벌 가까이 기증한 대구 손님도 있었다. 이틀간 정신없이 바자회를 마치고 나니 우리 손에 100만 원쯤 남았다. 책방에 모여 기증자 한 분 한 분에게 손편지를 썼다. “당신이 물결입니다”라고 쓴 모바일 감사카드도 보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2021년 3월, 물결 1기 멤버들이 모여 책방 앞 ‘뜻밖의 미술관’에서 추모 전시를 열었다. 제목은 《김오순展-이모는 외출중》이었다. 그림, 시, 영상 등 멤버 각자의 방식으로 작품에 그를 담았다. 많은 이의 따뜻한 후기와 귀한 감상평이 SNS에 올라왔다. 하나하나 캡처해 이모의 아들과 며느리에게 보내드렸다. 두 분도 전시를 보러 왔다. 눈시울을 붉히며 고맙다고 손을 꽉 잡아주었다. “추모 전시는 남겨진 사람들을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화가 고형숙 멤버의 글이 무겁게 와닿았다.
꾸준한 서사를 향한 멋진 발걸음
또다시 1년이 지났다. 우리는 지금 구독 서비스를 통해 책방 소식을 알리고 창작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종합선물세트를 선물 받은 것 같다”라는 구독자 반응에 기쁘면서도, 잘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커질까 두렵기도 하다. 우리 모습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최선을 다하는 태도로 나아가고 싶다. 지난해 은희경 작가가 물결서사에 왔을 때, 우리가 수줍게 내민 책에 이렇게 적어주었다. “물결서사로 향하는 멋진 발걸음!” 그날부터 버텨낼 힘이 새로 났다. 그동안 아무도 다가가지 않은 곳에서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의미를 찾는 시간이었다. 답은 없지만 흐르는 이야기는 있다는 마음으로, 꾸준한 서사를 향해 멋진 발걸음을 이어가고 싶다.
물결서사의 추천: 김홍모 『홀』
지난 4월 9일 제주북페어에 갔다. 제주항을 바라보며 『홀: 어느 세월호 생존자 이야기』을 떠올렸다. 전주로 돌아와 이 책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한 줄도 쓰지 못한 채 4월 16일이 왔다. 책방 구석에 앉아 다시 펼쳐 보는 수밖에 없었다. 읽는 내내 마음이 시리고 아팠다. 책으로 나오게 돼 정말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세월호 참사 당시 20여 명의 목숨을 구했지만 더 많은 사람을 구조하지 못했다는 트라우마로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 사람, 이 책은 ‘세월호 파란 바지의 의인’이라 불리는 김동수씨 이야기를 추적해 가감 없이 기록하고 있다. 김홍모 작가가 2년 동안의 준비과정을 거쳐 1년 동안 독립웹툰플랫폼에 원고료 없이 연재했던 작품으로 지난해 출간한 그래픽노블(만화형 소설)이다. 작가는 지금까지 용산 참사, 제주 강정마을 투쟁, 제주 4·3 등 한국사회의 굵직한 사건들을 외면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며 섬세하게 그려왔다. 동시대를 살아가며 함께하는 창작자로서 깊은 존경과 연대를 보낸다.
임주아
임주아
새로운 사람들과 교류하며 뜻밖의 일을 만들고 가꾸는 것을 좋아한다. 2015년 [광주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성매매 집결지였던 전주 선미촌 물왕멀길에서 창작자 동료들과 책방 물결서사를 운영하며 시를 쓰고 있다.
zooalim@naver.com
인스타그램 @mull2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