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세계문화예술교육 주간행사의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서울이 아닌 지역에서 개최되는 첫 행사라는 점이다. 올해 부산·경상권 개최를 시작으로 지역에서 주간행사를 개최함으로써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지역사회의 관심과 참여를 이끌고, 지역의 인적·물적 인프라와 역량을 활용하고 북돋으며, 행사가 끝난 후에도 그 관심과 활기가 이어질 수 있도록 하겠다는 계획이다. 이에 행사 개최 전 경상권 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와 함께 특별 기획 프로그램을 진행하여 시민들과 다양한 문화예술교육 체험 프로그램을 펼쳤다. 그 중 울산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가 주관한 ‘살고 그리며 꿈꾸다 : 삶 이야기 – 근로자와 아티스트, 눈을 마주하다’ 현장을 찾았다.
서로 만나고 눈을 마주하기
세계문화예술교육 주간행사 개막을 이틀 앞둔 5월 23일 울산의 구도심인 중구 문화의 거리는 울산 산업현장 근로자와 청년 아티스트들의 협업으로 마련된 다양한 문화예술교육 체험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가족, 친구, 연인들로 북적였다. 지난 11일 서울 염리동에서 출발한 ‘움직이는 마음 다락차’도 전국을 순회하고 행사 개최지인 부산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 정류장인 울산에서 전시와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 옆에는 2014년 제64회 베를린국제영화제 넷팩상(NETPAC)을 수상한 바 있는 박경근 감독의 다큐멘터리 <철의 꿈>을 상영하는 컨테이너가 있었다.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그림인 울산의 고래 암각화와 거대한 배의 이미지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울산을 대표하는 이미지 – 고래, 조선소, 중공업, 쇠, 노동의 아름다움과 숭고함을 담아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던 작품이다. 작년 11월 개봉했으나 관람하기 쉽지 않았던 이 작품을 여기서 만날 수 있었던 것 역시 행운이었다.
먼저 이번 프로그램에 참여한 근로자와 아티스트들의 손과 저마다의 이야기를 담은 전시 《삶의 지문들》은 작지만 큰 울림을 주었다. 일찍이 영국의 의학자이자 예술가인 찰스 벨은 손을 가리켜 “하나의 도구로서 모든 완벽함의 극치를 이룬 것”이라고 말했고,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눈에 보이는 뇌의 일부”라 칭했으며, 옛 소련 출신의 미국 시인 조지프 브로드스키는 “정신의 칼날”이라 칭송했다.(인체의 신비, 이성주, 살림, 2003) 이처럼 손은 생각을 실천하는 도구이자 그 자체로 사람과 삶을 드러낸다. 열심히 일하는 이들의 손, 그들이 함께 만들어낸 워크숍 작품들, 그것을 이용한 체험프로그램을 만날 생각을 하니 가볍게 가슴이 뛴다.
울산의 근로자와 청년 아티스트들이 함께한 워크숍 프로그램은 행사 연출과 디렉팅을 맡은 정근아 작가와 울산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가 함께 전체적인 틀을 잡고, 워크숍에 참여할 배효정(조형), 박소정(시각디자인 평면/설치), 한승준(조형), 박보배(시각디자인 설치) 작가를 섭외했다. 정근아 디렉터는 “작가를 선정할 때 시민들과 소통을 잘 할 수 있는 분들 위주로 했다. 작가들의 가족 역시 울산의 근로자들이다. 청년의 시각으로 이해하고 소통하고 담아내려고 했다.”며 기획의도를 소개했다. 울산 산업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근로자 그룹을 모집했는데, 이 과정부터 쉽지가 않았다. 박은정 울산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총괄팀장은 문화예술 동아리 활동하시는 분들을 위주로 접근했지만 선뜻 하겠다고 나서는 분들이 없어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한다. 한두 번 가볍게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프로그램에 대한 이해와 관계가 생기고 나서야 4차례 정도의 워크숍을 진행할 수 있었다.
예술로 체험하는 삶의 현장
배효정 작가는 현대자동차 기타동호회에 참여 중인 근로자분들과 <땀방울의 꽃>을 만들었다. 빨간 색 고무로 코팅된 목장갑, 안전모, 호스 등을 활용해서 길가에 커다란 꽃을 피웠다. 이 전시를 보던 한 시민은 “30년간 근로자로 일하며 면장갑을 끼고 살았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이렇게 멋진 작품으로 탄생한 걸 보니 눈물이 나고 감사하다.”며 몇 번이고 인사를 했다. 근로자들이 작업공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재료로 예쁜 꽃을 만들어 당신이 꽃보다 아름답고, 당신의 일을 존중한다는 의미를 담고 싶었다는 배효정 작가의 마음을 시민들도 이해한 것일까.
현대중공업 근로자, 자영업자, 주부 등이 참여하는 서각동호회 ‘아랫목단’과 박소정 작가가 참여한 <기억을 새긴 나무>는 현장의 기억을 새긴 나무 도장을 엽서에 찍어 간직하는 프로그램이다. 작가는 폐자재인 목재파레트를 이용하고 싶어 했지만 오랫동안 서각작업을 해온 아랫목단 분들이 파레트는 도장을 새기기에 너무 무르다며 그와 비슷한 재질의 다른 나무를 추천해 주었다. 취미에서 시작해서 지금은 작품 활동까지 하는 분들이다 보니 해 줄 수 있는 조언이었다. 아랫목단 대표는 “버려진 목재파레트를 사용하겠다는 발상에 놀랐다. 참신했다고나 할까? 우리도 작품도 만들고 전시도 하지만, 이렇게 아이들이나 시민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직접 보게 되니 색다른 느낌이고 감회가 남다르다. 자부심이 생긴다.”고 말했다. 박소정 작가 역시 “많이 배우는 시간이었다. 오랫동안 서각을 하셔서 기능적으로 고수급이고 무척 디테일하시다. 생업으로 바쁘신 데도 밤늦게까지 작업하고 작품을 만드시는 모습이 놀랍고, 작가로서 반성하게 되는 면이 있었다.”며 존경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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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방울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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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새긴 나무>
박보배 작가는 현대 중공업 근로자인 아버지와 함께 작업한 작품 <톱니, 원동력, 부양>을 선보였다. 공장을 상징하는 톱니를 돌리면서 생성되는 바람이 종이컵을 밀어 올리는 것을 체험해 보고, 그 느낌을 적어 전시하는 프로그램이다. 가족을 부양(扶養)하기 위해 애쓰는 가장의 모습을 컵을 부양(浮揚)시키기 위해 톱니를 돌리는 작업으로 치환해 보는 것이다. 실제로 톱니를 돌려 컵을 밀어내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체험에 참여한 아이들이 적은 쪽지를 걸어둔 곳에는 ‘아빠, 힘내세요! 사랑해요!’ 같은 말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오늘도 특근을 하느라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하셨다는 아버지와 딸의 공동작업은 다른 가족들에게도 마음에 울림을 주고 있었다.
공장, 굴뚝, 연기 같은 울산 산업현장의 모습과 바다, 근로자의 모습을 철판에 부조(浮彫)하여 만든 조형작품 <특별한 만남>은 한승준 작가와 용접 기술 근로자들이 함께 만들어냈다. 그 위에 시민들이 분필이나 마카로 자유롭게 색칠하고 그림을 그려 넣어 완성시키는 작품이다. 어느새 작품 속 바다는 알록달록 무지갯빛 파도가 일렁이게 되었다.
“처음에는 완강하게 참여하지 않겠다던 아버지를 가족들이 설득했다. 손재주가 좋고 섬세한 분인데 말수가 적어 딸과 대화가 많지 않았다. 이번 계기로 딸이랑 새벽 두세 시까지 함께 이런저런 궁리를 하고 재료 하나도 아껴서 소중히 쓰는 모습을 보면서 가족 간에 애틋함이 느껴져서 행복했다. 그리고 이렇게 재미있어 하는 사람들을 보니, 딸이 자랑스럽다.”
– 박보배 작가 어머니
“취업한지 얼마 안 되었다. 일이 중요하긴 하지만, 어떨 때는 살기 위해 일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울산은 문화적으로 즐길 거리가 별로 없다. 문화예술이라는 게 청소년, 학생들에게만 해당되는 것 같기도 하다. 근로자들도 주말에 나와서 이렇게 보고 즐길 수 있는 게 많았으면 좋겠다. 여가를 잘 보내야 일도 잘 할 수 있으니까.”
– 《삶의 지문들》展 참여 근로자
토대를 만들고 지역을 움직이고
이렇게 울산이라는 지역의 특성과 사람, 삶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은 네 작품과 체험 프로그램은 울산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의 오랜 고민을 담고 있다. 초기부터 산업도시 울산의 특성을 반영한 프로그램을 기획하고자 했지만, 토대가 만들어지지 않은 상황에서는 쉽지 않았다. 이번에 세계문화예술교육 주간 행사 특별 기획 프로그램으로 지역사회에 근로자와 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울산지역에서 실현가능한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실천적 모색의 계기를 마련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근로자와 기업, 예술을 연결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심포지엄과 워크숍, 체험프로그램을 시도를 했다. 김교완 센터장은 “울산은 산업수도라고 일컬어진다. 이러한 지역적 특성을 깊이 고민하고 있다. 우리 센터가 생긴 지 이제 5년차이고 문화예술교육이 지역에 알려진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설립 초기부터 지속적으로 근로자・기업에 다가가는 계기를 만들고자 했다.”고 말한다. 문화예술교육의 대상을 지역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근로자까지 넓혀가려는 노력과 시도가 이제 조금씩 싹을 틔워가는 것이다. 박은정 총괄팀장은 “초기 3, 4년간은 기초를 쌓고 인지도를 넓히는 등 기본을 충실히 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이제는 선수(?)들이 생겨나는 것 같아 보람을 느낀다. 앞으로 연구사업도 하고, 내년에는 작은 규모로라도 자체사업을 해보려고 한다. 이렇게 토대를 만들고 확산해 가는 것이 지역 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며 프로그램의 또 다른 취지를 전했다.
이번 프로그램은 지역의 청년 작가들이 함께 참여함으로써 문화예술교육의 동반자를 만들고 넓혀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지역 청년작가들과 ‘풀밭 위의 미술관 모임 MOIM’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정근아 작가를 디렉터로 하고 함께 기획한 것도 이러한 이유다. 정근아 디렉터는 “작품을 하나 만든 다기 보다 과정을 중시했다. 근로자들을 만나며 느낀 점이 많았고, 그들의 이야기와 청년들의 이야기가 드러나는 작업이 되길 바란다.”며 이번 프로그램에 대한 소감을 밝혔다.
마지막으로 박은정 총괄팀장은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근로자들이 참여하고 작가들과 함께 작업해보는 이 비일상적이고 특별한 하루가 사람들의 일상을 바꾸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워크숍에 참여한 작가들과 근로자들 뿐 아니라 체험하며 작품을 완성해준 시민들 역시 이 특별한 경험을 계기로 가족과 일상을 조금은 다르게 보게 되지는 않을까 싶다. 산업과 경제, 주식과 부동산이 아니라 문화예술교육이 지역을 바꿀 수 있을까? 노동하고 생산하고 창조하는 이 거룩한 손들은 그럴 수 있을 것만 같다.
- 울산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는
- 울산광역시의 문화예술교육 활성화를 위하여 2011년 개관한 광역단위 지원기관이다. 중앙과 지역을 잇는 문화예술교육 정책의 전달자로서 센터, 울산광역시, 울산광역시 교육청, 울산지역 문화기반시설, 학교 문화예술교육 전문인력 등과의 원활한 네트워킹과 인적‧물적 인프라 발굴, 문화예술교육정보 기반 구축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울산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홈페이지 : www.usarte.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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