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육자의 삶을 ‘예술’로 켜다

급변하는 시대, ‘활활살롱’이 선택한 속도

“하루를 다 마치고 나면 엄청나게 많은 일이 분명히 일어났는데,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거예요. 말 한마디조차도요. 그래서 기록을 해야만 내가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 박초연 활활살롱 대표

제주 ‘활활살롱(VivaBookSalon)’은 글쓰기와 명상, 예술을 매개로 양육자의 삶을 다시 바라보는 공동체다. 빠르게 변화하는 기술과 사회 속에서, 이곳은 느리게 기록하고 천천히 연결하는 방식을 선택한다. 사라지기 쉬운 하루와 감정을 붙잡아 두는 일, 그 자체가 이 공동체가 수행하는 예술이다.
  • 마음오름-제주명상
1분 1초가 전쟁 같은 시간 속에서
2026년 1월 24일 토요일 오전, 제주시 아라동의 한 스튜디오에는 아이와 함께 온 사람들, 혼자 온 사람들이 뒤섞여 있었다. 명상과 움직임을 결합한 프로그램 ‘소울리셋’에 참여하기 위해 모인 이들이다. 이 자리의 공통점은 하나였다. 대부분이 한 명 혹은 여러 명의 아이를 키우는 양육자라는 점이었다. 프로그램은 특별한 기술을 요구하지 않았다. 숨을 고르고, 몸의 감각을 느끼고, 잠시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 그러나 그 단순한 행위가 이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루 대부분을 타인의 요구에 응답하며 보내는 이들에게, 자기 자신을 돌보는 시간은 늘 뒤로 밀려나 있기 때문이다.
프로그램 이후 만난 박초연 대표는 세 아이의 엄마이자 성우, 동화구연지도사, 책놀이지도사다. 그는 2024년, 제주에서 양육자들의 내면 성장을 돕기 위해 활활살롱을 시작했다. 창립 2년이 채 되지 않은 신생 공동체지만, 이미 멤버들이 함께 쓴 에세이 『그럼에도, 사랑이었다』(투래빗, 2025)를 출간했고, 세 번의 기획전시를 마쳤다.
개인의 필요에서 공동체로
활활살롱은 거창한 기획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시작은 박초연 개인의 절박함이었다. 그는 오랜 기간 우울을 겪었고, 그 시간을 통과하게 한 것은 글쓰기였다. 그러나 아내이자 엄마로의 삶 속에서 글쓰기는 늘 ‘나중’으로 밀려났다. 경제적 가치로 환산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혼자서는 지속할 수 없다고 느낀 그는 함께 쓰는 방식을 떠올렸다. 누군가와 약속을 맺으면 포기하지 않을 수 있으리라는 단순한 논리였다. 이전에 공동 육아 모임을 운영하며 자신을 소진했던 경험 역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아이들을 위한 환경을 만드는 데 집중한 나머지, 정작 자신은 텅 비어버렸다는 깨달음이었다.
그는 방향을 바꿨다. 아이 이전에, 환경 이전에, 양육자 자신이 먼저 돌봄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 이 전환이 활활살롱의 핵심 철학이 되었다. 2024년, 제주청년센터의 소규모 모임 지원 사업이 마감 며칠 전 눈에 띄었다. 1~2년을 고민만 하던 것들을 더 미루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마감 직전에 신청서를 냈다. SNS에 참여자 공개 모집을 알렸고,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연결됐다. 그때 맺어진 인연들이 지금도 활활살롱을 함께 이끌어가고 있다.
  • 아트포럼 예술연수-예술명상
  • 그림필담
양육이 예술이 되는 순간
활활살롱은 매년 새로운 멤버를 구성해 정기 모임을 이어간다. 글쓰기와 명상을 중심으로 시작했지만, 일러스트 작가의 합류를 계기로 그림으로 표현의 영역이 확장됐다. ‘마음필담’ ‘마인드풀북클럽’ ‘마음오름’과 같은 기획 프로그램은 양육자의 내면을 천천히 들여다보는 구조로 되어 있으며, 가족과 아이가 함께하는 프로그램도 병행한다. 박초연 대표가 말하는 ‘양육예술가’는 거창한 수식어가 아니다. 아이를 키우는 매일의 시간이 곧 창작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다.
“내 삶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보여도, 그것이 글이 되고 그림이 될 수 있다는 걸 인지하는 순간 삶의 주체성이 생겨요.”

– 박초연 대표

삶이 소재가 되는 순간, 양육의 시간은 사라지는 노동이 아니라 기록되는 시간이 된다. 2025년 출간된 『그럼에도, 사랑이었다』 역시 그런 기록의 결과물이다. 전문 예술가의 작업이라 부르기에는 서툴 수 있다. 박초연 대표 역시 그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되묻는다. 배운 적이 없다는 이유로, 그 과정 밖에 있다는 이유로 이것이 예술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는 이 질문을 사회로 확장하기 위해 출간과 동시에 전시를 기획했고, 지역 도서관과 카페, 문화공간과 연계해 작품을 공개했다. 예술은 혼자만의 성취가 아니라, 사회와 만날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당당하고 은밀하게
활활살롱을 운영하며 박초연 대표는 한 가지 현실을 실감했다. 양육자를 실질적으로 고려한 문화 프로그램이 매우 적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프로그램은 주중 저녁 또는 주말에 열리고, 그 시간은 양육자에게 가장 바쁜 시간대다.
“2024년만 봐도 하나도 없었어요. 모든 게 양육자는 고려되지 않은 시간대로만 열려있었어요. 그래서 갈 곳이 없다고 느꼈어요.”

– 박초연 대표

활활살롱은 의도적으로 평일 오전, 아이들을 보육 기관이나 학교에 보낸 시간을 선택했다. 제주라는 지역적 특성도 고려했다. 좁은 지역 사회에서 개인적인 이야기는 쉽게 노출되고, 때로는 약점이 된다. 그래서 활활살롱에는 이 공간에서 나온 이야기를 외부로 옮기지 않겠다는 약속이 있다. 그 약속 아래에서 참여자들은 점차 자신의 상태를 인식하기 시작한다. 활동을 거듭하며 처음으로 자신의 우울과 피로를 언어화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 공동체는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먼저 알아차리게 하는 장소에 가깝다.
활활, 불이 번지는 방식으로
활활살롱이라는 이름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겹쳐 있다. 하나는 ‘활자’로 활기를 찾는다는 비교적 직관적인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박초연 대표가 오랫동안 수련 속에서 붙잡아 온 한자 ‘살 활(活)’에서 비롯된 뜻이다. 살다, 그리고 살리다. 그는 이 글자를 구활창생(救活蒼生), 즉 ‘하늘 아래 모든 생명을 살린다’라는 말에서 가져왔다고 했다. 활활살롱은 누군가를 ‘돕기 위한’ 공동체라기보다, 먼저 살아남기 위해 만들어진 공동체에 가깝다. 도움이라는 말에는 종종 위계가 숨어들지만, 이곳의 출발점은 동등한 생존의 필요였다. 각자의 삶에서 불씨 하나씩을 품고 온 사람들이, 혼자서는 쉽게 꺼져버릴 그 불을 함께 지키기 위해 모인 장소. 활활살롱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거창한 뜻이라기보다는, 그냥 나부터 살고 싶어서였어요. 정말로. 그렇게 해서 살고 싶어서 오는 사람들을, 같이 한 번 살아보자, 그 정도였죠. (그런데) 저 혼자 계속 불을 붙이는 사람으로 남으면, 그건 오래 못 가요. 누군가는 장작이 되어줘야 하고, 누군가는 바람이 되어줘야 하고, 때로는 눈이 와서 잠깐 불을 식혀주기도 해야 해요.”

– 박초연 대표

박초연 대표는 이 공동체를 설명할 때 자주 ‘불’의 이미지를 사용한다. 불은 혼자서는 오래 타지 못한다. 장작이 필요하고, 불씨가 필요하며, 바람이 필요하다. 그가 경계하는 것은 한 사람이 모든 에너지를 소진하는 방식이다. 활활살롱은 그 실패의 기억 위에서 설계된 공동체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누가 더 많이 하느냐’보다 ‘어떻게 함께 지속하느냐’가 중요하다. 역할은 고정되지 않고,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바뀐다. 쉬는 것도 역할로 인정된다. 타지 않기 위해, 그리고 꺼지지 않기 위해서다. 올해 활활살롱은 속도를 조금 줄이고 더 단단히 다지는 시간으로 삼고 있다고 했다. 브레이크를 밟는 게 아니라, 더 오래 달리기 위한 정비다.
지역 사회와의 연결도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방송 출연, 지역 카페와의 협업, 도서 축제 참여 등 이 모임이 사회에 왜 필요한지를 끊임없이 말하고 보여줘야 한다고 그는 생각한다. 전시장에서 우연히 작품을 만난 중년 남성이 “나도 내가 젊었을 때 아이를 키우면서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을 몰랐는데 이렇게 활동을 하시는 분들을 보니까 응원하고 싶다”라고 말하고 갔다는 일화도 그래서 소중하다.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사람이 지나치지 않고 머물렀다는 것, 그것이 바로 연결이고 소통이다.
  • 2025 활활살롱 아트포럼 예술연수
변하지 않을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
AI가 그림을 그리고 소설을 쓰는 시대, 모든 것이 빠르게 소비되고 잊히는 시대에 활활살롱이 붙잡는 것은 느린 가치들이다. 누군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일, 하루를 글로 기록하는 일, 타인의 고통에 ‘나도 그랬다’고 응답하는 일. 빠른 소비와 빠른 망각의 시대에, 느리게 기록하고 천천히 연결하는 것, 그것이 이 공동체가 선택한 예술의 방식이다. 그 안에서도 새로운 창작은 멈추지 않는다. 박초연 대표는 요즘 직접 가사를 쓰고 곡을 만들고 있다. 멤버 중에 음악적 재능을 가진 이가 합류하면서, 활활살롱의 표현방식이 또 한 번 확장됐다. 이 공동체는 특정한 형식에 머무르지 않는다. 필요한 만큼, 가능한 만큼, 삶이 흘러가는 방향으로 조금씩 변한다.
박초연 대표는 이렇게 말한다. “양육은 소진되는 시간이 아니라, 내가 나를 보며 살아가는 시간이에요.” 아이를 키우는 매일이, 그리고 그 매일을 예술로 건져 올리는 공동체가, 사회가 흘려보내는 이야기들을 붙잡는다. 존엄이란 어쩌면 이렇게 사소한 데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 하루가 기록될 자격이 있다는 것, 내 고통이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나 혼자가 아니라는 것. 활활살롱은 오늘도 제주에서 조용히, 그러나 활활 타오르고 있다. 장작들이 모이고, 불씨들이 살아나고, 바람이 번지고 있다. 그리고 그 불빛이 닿는 곳에서, 한 사람의 양육자가 오늘을 기록하고, 오늘을 살아낸다.
  • 《그럼에도, 사랑이었다 Love, Nevertheless》 2025.11.29.~2026.1.31. 스테이위드커피
강나경
강나경
문화예술 지원 공공기관에서의 실무 경험을 바탕으로 보다 주체적인 삶을 찾아 현장으로 돌아왔다. 현재 서울과 제주를 오가며 전시공간 ‘새탕라움’과 지역문화콘텐츠 연구소 ‘문화발전소 제비’를 운영하며, 기획과 연구를 통해 동시대적 담론을 확장해 나가고 있다. 주요 참여 전시로는 ‘서울디자인 2024’ 주제전시 《LIGHT ARCHITECTURE》와 2023 제주도립미술관 국제특별전 프로젝트 제주 《이주하는 인간–호모미그라티오》 등이 있다.
museum1013@gmail.com
사진제공_활활살롱 홈페이지 vivabooksalon.com 인스타그램 @book_jeju
3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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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양남 2026년 02월 26일 at 11:16 AM

    양육자의 삶을 ‘예술’로 켜다
    급변하는 시대, ‘활활살롱’이 선택한 속도
    공감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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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기현 2026년 02월 26일 at 12:07 PM

    양육자의 삶을 ‘예술’로 켜다
    급변하는 시대, ‘활활살롱’이 선택한 속도
    기대만점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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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경 2026년 02월 27일 at 11:19 AM

    양육자를 포기하게 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아주 소중한 활동입니다. 모두모두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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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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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양남 2026년 02월 26일 at 11:16 AM

    양육자의 삶을 ‘예술’로 켜다
    급변하는 시대, ‘활활살롱’이 선택한 속도
    공감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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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기현 2026년 02월 26일 at 12:07 PM

    양육자의 삶을 ‘예술’로 켜다
    급변하는 시대, ‘활활살롱’이 선택한 속도
    기대만점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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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경 2026년 02월 27일 at 11:19 AM

    양육자를 포기하게 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아주 소중한 활동입니다. 모두모두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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