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모든 시절이 제철이었다

‘할매발전소’가 옮기는 삶의 기억

“나 사는 이야기가 무슨 쓸모가 있어.” 할머니들을 만나며 자주 듣던 말이다. 처음에는 겸손이라 생각했다. 오래 듣다 보니 그 말은 체념에 가까웠다. ‘내 이야기는 중요하지 않다. 내 이름은 기록될 일이 없다. 내 삶은 누군가에게 보여줄 만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여겨온 시간이 그 말 속에 들어 있었다.
이야기는 늘 그다음에야 시작되었다. 밥을 먹으며 옥수수 이야기를 하다가, 어린 시절 못 간 학교 이야기가 나왔다. 밭에서 일하던 손 이야기를 하다가, 이름을 쓰지 못한 세월 이야기가 이어졌다. 꽃을 심던 기억에서, 오래 버틴 마음이 나왔다. 할머니들의 말은 한 번에 열리지 않았다. 함께 앉고, 먹고, 기다리고, 다시 찾아가야 했다. 그 시간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알게 되었다. 노년 문화예술교육은 무언가를 더 가르치는 일이 아닌, 이미 한 사람 안에 오래 쌓여 있던 생의 감각을 다시 꺼내는 일이라는 것을.
  • 움직임 워크숍 <할머니와 함께하는 춤 밭>(2022)
자기 손으로 붙잡은 이름
‘할매발전소’는 강원도 원주시 신림(神林)면에서 시작되었다. ‘신들의 숲’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원주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이다. 이곳에서 ‘로컬리티:’(김영채, 석양정, 심지혜)는 노인을 지역 소멸의 문제적 존재가 아니라 지역의 문화적 자산으로 바라보는 작업을 이어왔다. 최보연 교수는 「대명사 아닌 고유명사로, 의미를 만드는 다정한 관찰」(아르떼365, 2024.10.28.)에서 할매발전소를 존재 자체에 집중하며 각자의 삶을 오래 들여다보는 작업으로 읽었다. 그 문장은 우리가 해온 일을 잘 설명해 주었다. ‘할머니’라는 대명사 뒤에는 언제나 각자의 이름이 있었다.
2024년 전시 《내 이름에게: 나의 이름에게 보내는 헌사》를 준비하며, 우리는 할머니 이름의 여정을 따라갔다. 서월이 할머니는 평생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더도 말고 국민학교 2학년까지만 다녔더라면 내 인생이 어땠을까.” 자주 생각했다고 한다. 장사하며 사람을 만나고, 겨우 산수 하나씩 익히며 살아왔지만 정작 자기 이름 석 자는 배우지 못한 세월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할머니의 이름에게 보내는 헌사를 썼다.
“길도 글도 전기도, 내 이름 석 자도 어느 것 하나 쉬이 허락되지 않았던 깜깜하기만 했던 시절을 지나 여든 너머 이제야 나는 내 이름에게 도착했어요.”
한 사람이 자기 이름에게 도착하는 일, 그것은 존재가 자기 자신을 다시 만나는 순간이었다. 전시장에서 서월이 할머니는 자신의 이름 옆에 손 글씨를 더했다. 글씨는 반듯하지 않았지만, 분명한 도착이 있었다. 누군가 대신 써준 이름이 아니라, 자기 손으로 붙잡은 이름이었다. 할머니들은 예술을 배우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나는 이런 거 못 해” “손이 떨려서 가위질도 못 한다”라며 한사코 사양했다. “학교도 못 가본 사람이 뭘 하겠냐.”라고도 했다. 우리는 손의 떨림이 그대로 남을 수 있는 방식과 재료를 골랐다. 작업의 속도를 바꾸자, 분위기도 조금씩 달라졌다. 떨리는 선은 부족한 선이 아니었다. 그 사람의 시간이었다.
  • 《내 이름에게: 나의 이름에게 보내는 헌사》(2024)
    할매발전소가 2022년부터 2024년까지 사용한 폐교 공간에서 열린 마지막 전시로, 평생 동경과 여한의 대상이었던 학교가 할머니들이 주인공이 되어 서로를 초대하는 장소가 되었다.
오래된 기억을 다시 놓는 일
안호녀 할머니는 말했다. “배운 게 아니라 내가 해서 자연적으로 아는 거야.” 할머니들은 자연을 안다. 밭을 안다. 계절을 안다. 언제 씨를 뿌려야 하는지, 언제 기다려야 하는지, 무엇을 버리지 않고 다시 살려야 하는지를 몸으로 알고 있다. 우리는 모르기 때문에 자꾸 물었다. 어떻게 말려야 하는지. 언제 거두어야 하는지. 왜 어떤 풀은 그냥 두어야 하는지. 우리는 할머니의 삶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함께 발견하려 했다. 옥수수 하나로도 이야기는 길어졌다. 오래 삶아 밥을 대신하고, 갈면 범벅이 되고, 수염은 차로 마시고. 할머니들은 말했다. “세상에 쓰잘데기 없는 것은 없어.” 그 말은 식재료에 대한 지식이기 전에, 삶에 대한 철학이었다. 쉬이 버려지는 것들, 늦었다고 여겨진 시간마저 다시 쓰일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할매발전소의 작업은 자연스럽게 콜라주에 가까워졌다. 흩어진 기억을 모으고, 조각난 말을 놓는다. 오래된 사진, 밭의 색, 손의 감각, 생활의 물건을 한 화면 위에 다시 배치한다. 중요한 것은 매끄러운 완성이 아니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곁에 둘 것인가. 어떤 기억을 앞으로 가져오고, 어떤 말에 다시 자리를 줄 것인가. 그 과정에서 할머니는 자기 삶의 편집자가 된다. 올해 준비하고 있는 〈내 모든 시절이 제철이었다〉(2026 생애주기별 문화예술교육) 역시 이 질문에서 출발한다. 이 프로그램은 참여자의 삶의 기억을 구술로 발굴하고, 콜라주 작업으로 시각화하며, 기록으로 남기는 문화예술교육이다. 구술과 예술, 기록은 계절처럼 순환한다. 개인의 기억은 서로의 이야기로 이어지고, 마을의 기억으로 남는다.
우리는 이 과정 안에서 자기 삶을 다시 배열해 보는 감각을 함께 발견하고자 한다. 오래 침묵했던 시간을 자기 언어로 다시 놓아보는 일이기도 하다. 특히 할매발전소와 함께하는 원주시 신림면의 80~90대 여성은 문자 기록 이전의 마지막 구술 세대다. 이들의 삶은 문서보다 입말에, 연표보다 몸의 기억에, 사건보다 계절의 감각 안에 더 많이 남아 있다. 기록하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없던 삶으로 여겨질 수 있다.
  • 《할머니의 여름방학》(2025, 울산)
    할머니들과 함께한 예술교육 과정과 작품이 다른 도시의
    관람객과 만난 전시다. 할머니의 집에 초대된 아이들은
    여름방학처럼 웃고 뛰놀며, 오래된 기억과 새로운
    시간을 함께 만들어갔다.
  • 《한(恨) 참 재밌는 나이: 오는 날이 장날》(2024)
    할머니의 집과 밭, 마을 골목골목을 전시장으로 확장한
    프로젝트다. 관람객은 신림 폐역에서 트랙터를 타고
    할머니의 집으로 향했고, 할머니들은 자신의 작품 앞에
    선 도슨트가 되었다.
서로의 곁을 살피는 시간
2025년 전기노인 대상 문화예술교육 우수 모델 개발 자문(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주관)에 참여하며 또 다른 장면을 보았다. 성남에서 진행된 한 프로그램에서 전기노인 참여자가 지역 경로당을 찾아 중기·후기 노인들의 장수 사진을 찍어주는 활동이었다. 사진을 찍기 전, 머리를 다듬어주고 옷매무새를 고쳐주던 그 손길은 봉사라기보다 같은 계절을 지나온 사람들이 서로 건네는 지지와 격려의 마음에 가까웠다. 조금 먼저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조금 더 어려운 사람 곁으로 간 것뿐이었다. 노년은 돌봄을 끝낸 시간이 아니라, 여전히 서로의 곁을 살피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할매발전소의 작업 역시 그런 마음들이 머물 수 있는 ‘자리’를 만드는 일이다.
할매발전소의 작업도 자리를 조금씩 넓히고 있다. 처음에는 폐교가 무대가 되었다. 평생 동경과 여한의 대상이었던 학교가 할머니들의 주무대가 되었다. 이후 마을회관, 문화센터, 할머니의 집과 밭, 골목골목이 차례로 작업의 장소가 되었다. 지난여름 울산 중구문화의전당에서 열린 전시 《할머니의 여름방학》은 할머니들과 함께한 예술교육 과정과 작품이 다른 도시의 관람객과 만난 자리였다. 가을, 원주의 옛 신림역에서 열린 《한(恨) 참 재밌는 나이: 오는 날이 장날》은 할머니가 살아온 마을과 마당을 전시장으로 확장했다. 예술은 더 이상 어디에 가서 하는 일이 아니었다. 삶의 자리에 놓일 때, 사람들은 작품만 보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살아온 방식을 함께 바라보았다.
“뭐든지 다 때가 있어. 지금 나가 다니면 풀이 자꾸 나와. 그래서 내가 ‘너도 지금 나올 때니까 나온다. 이렇게 다 때가 있는 거구나’ 이러잖아.”

– 조계화 할머니

어쩌면 모든 시절은 각자의 방식으로 제철을 가진다. 어린 시절의 제철이 있고, 일하던 시절의 제철이 있고, 돌보던 시절의 제철이 있다. 그리고 여든 너머에야 도착하는 이름의 제철도 있다. 노년은 늦은 시간이 아니다. 다른 방식으로 익어가는 시간이다. 할매발전소는 그 시간을 서두르지 않으려 한다. 묻고, 듣고, 기다리고, 함께 놓아보려 한다. 한 사람의 삶이 작품이 되는 순간은 거창하게 오지 않는다. 누군가 자기 이름을 다시 쓸 때. 떨리는 선을 지우지 않을 때. “나 할 말이 아직 더 있어”라고 말할 때. 그때 예술은 먼저 도착한다. 문장은 늘 그 뒤에 온다. 그리고 우리는 그 문장을 따라 다시 현장으로 간다.
  • 《여든 너머》(2024)
    할머니가 가장 남기고 싶은 자신의 얼굴을 찾아가는 작업이다. 할머니의 밭과 마당, 매일 바라보는 풍경 안에서 촬영이 이루어졌으며, 김상곤 작가의 사진은 [엘르] 잡지에도 소개되었다.
생의 에너지를 전하는 할매발전소
로컬리티:가 2021년부터 강원도 원주시 신림면을 기반으로 이어오고 있는 구술 아카이빙·전시·문화예술교육 작업이다. 마지막 구술 세대인 여성 노년의 입말과 몸의 기억, 계절의 감각 안에 남아 있는 삶의 시간을 따라가며, 이름 없이 지나온 시간을 다시 예술의 언어로 번역하고자 한다.
석양정
석양정
‘할머니’라는 존재를 통해 삶의 서사를 탐구하며, 여성 노년의 구술과 기억, 생의 감각을 예술의 언어로 옮기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그림책 『할머니 나무』의 작가이자 할매발전소 대표로 활동하며, 로컬리티:와 함께 삶의 기억을 기록하며 서로의 시간을 연결하고 있다.
인스타그램 @bylocality
유튜브 채널 할매발전소
사진제공_로컬리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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