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매발전소’는 지금까지 이름 없이 살아왔던 노인들에게 주목하고, 이들이 자신의 이름과 존재의 의미를 되찾는 다정한 여정을 지난 수년간 담아내고 있는 곳이다. 할매발전소가 위치한 강원도 원주시 치악산 남쪽 끝자락 신림(神林)면은 시내에서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1시간여를 달려야 겨우 닿을 수 있는 곳이다. ‘신들의 숲’이라는 지명처럼 깊은 숲속에 숨겨져 있는 할매발전소에서 지난 9월 세 번째 전시 《내 이름에게: 나의 이름에게 보내는 헌사》를 열었다. 22명의 할머니가 지난봄부터 여름에 걸쳐 자기의 삶과 예술을 오가며 천천히 일궈 낸 이야기와 작업이 사진으로, 그림으로, 글씨로 오롯이 담겨 있었다.
‘초고령사회’ ‘지역소멸’이란 화두가 마치 지역 문제의 대명사인 듯 회자되면서 ‘노인’은 암묵적으로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과제’로 치부되곤 한다. 할매발전소 프로젝트를 주도한 ‘로컬리티:(LOCALITY:)’의 시선은 처음부터 달랐다. 이들은 지역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80~90대 여성 노인을 지역소멸 시대의 문제적 존재가 아닌 ‘지역의 문화적 자산’으로 존중하는 접근법을 택했다. ‘할머니’라는 대명사 뒤에 숨겨진 각자의 이름을 나직이 호명하고, 그들 스스로가 “예술 생산의 주체”로서 우리에게 전하는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담아내고자 했다.
관찰에서 경청으로, 경청에서 협업으로
시작은 지극히 개인적인 ‘관찰’에서 비롯되었다. 코로나19가 우리 삶의 모든 연결을 단절시키고 빗장을 닫게 했던 그때, 심지혜 학예사는 고향 신림면에서 혼자 살던 할머니가 멍하니 앉아 계시는 모습을 보고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2018년부터 지역 이야기를 수집하여 예술로 연결하는 작업에 관심을 가져왔던 동갑내기 김영채(아트디렉터), 심지혜(학예사), 석양정(작가) 3인방이 의기투합했고, 10~20여 명의 젊은 예술가가 그 여정에 흔쾌히 동참했다.
이들은 주기적으로 할머니들을 찾아뵙고, 제철 음식으로 함께 지은 밥을 먹으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할머니들에게 가장 친숙할 수밖에 없는 음식이야말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좋은 매개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팔십 평생을 신림면에서만 고립되어 살아온 할머니들이 놀라운 삶의 섭리를 꿰뚫고 있음을 깨달았다. 강원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 흔한 옥수수가 그냥 삶으면 간식이 되고, 곱게 갈면 옥수수 능구기(범벅)나 부침개가 되고, 씨눈에서는 식용유를 얻고, 수염은 우려 차로 먹을 수 있듯, “세상에 쓰잘데기(쓸데)없는 것은 없다”는 할머니들이 깊은 삶의 철학이 이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렇게 할머니들이 음식에 대해 간직해 온 고유한 기억과 이야기들을 씨줄과 날줄로 삼아 〈할머니의 잘 지은 밥상〉이라는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진 것이 2021년이었다. 구술의 힘을 믿는 3인방이 ‘로컬리티:’라는 공식 활동명을 갖게 된 것도 이때였다. “우리는 모두 로컬에서 태어났다”라는 명제 하에 로컬을 이루는, 작지만 제각기 고유하고 위대한 삶을 조명하고자 했다. 팀명에 붙은 “쌍점(:)”은 머무름표로 누구나 쉬어갈 수 있는 로컬로 안내한다는 의미다.
동경을 품었던 학교가 할머니들의 무대로
다큐멘터리 작업을 기점으로 할머니들과의 작업을 지속하고 싶었던 로컬리티:의 눈에 뜨인 것이 강원문화재단의 ‘문화예술공간 조성 및 활성화 지원사업’이었다.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담아낼 그릇이 필요하다는 생각과도 맞아떨어졌다. 평생 밭을 일구며 살아온 할머니들이 초등학교조차 제대로 다닐 수 없었음을 진즉 알고 있었기에 인근에 있던 폐교(황둔초등학교-창평분교)는 안성맞춤 공간이라 여겨졌다. 그렇게 시작된 할매발전소 개관전은 《Mother’s Mother 알아차림 田》(2022)이라는 제목으로 선보였다. 할머니들의 이야기와 10명 내외 예술가 작업이 함께 어우러져 설치, 음악, 미디어아트를 매개로 표현되었다. 팬데믹으로 ‘서로 닿을 수 없는 간격’ 속에서 공감과 위안이 필요한 서로의 마음을 알아차려 줄 수 있도록, 할머니의 밥상 같은 작은 위안을 담고자 했다(석양정 작가 기획의도 중). 동경과 아쉬움의 대상이었던 학교는 할머니들만의 무대로 재탄생되었고, 할머니들의 자유로운 몸짓과 이야기로 빼곡히 채워진 공간이 되었다.
2023년 두 번째 전시 《사라지는 살아지는 展: 삶의 궤적 속에 돌아보면 언제나 있었던 ( )》은 “누군가에게는 부르고 싶은 이름일 수도, 머물고 싶은 순간일 수도, 기억 속에서 살아있는 공간일 수도 있는 것들”이 결국 우리로 하여금 살아지게 하는 이야기가 된다는 뜻에서 붙인 제목이다(석양정 작가 기획의도 중). 할머니들의 기억에서 이야기로, 이야기에서 손으로, 다시 기억으로 남겨질 작업이 하나둘 모아졌다. 할머니들이 떨리는 손으로 직접 그린 자화상, 할머니들의 시간 기억을 알알이 모아 구불구불 함께 완성한 신림면 마을지도, 엄마에서 엄마로 이어지는 ‘오래된 미래’의 이야기도 영상작업으로 고이 담아낼 수 있었다.
당초 3개년 사업계획 상 2024년에는 할머니들이 오롯이 예술 생산 주체로 활동하는 것을 담아내는 것이 목표였다. 그간 건강이 쇠약해진 분들도 있었던 터라 쉽지 않을 거라 예상했지만, 할머니들과의 긴 이야기 끝에 그들이 원하는 것을 담은 3개의 개별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었다. 할머니들이 남기고 싶은 것들을 사진으로 담아내는 〈여든 너머〉, 총 18회에 걸친 현대미술 수업을 통해 자신만의 색깔과 작업 방식을 담는 〈깊어지는 익어가는〉, 못다 한 한글 공부를 캘리그래피 작업과 연계한 〈내 이름 석자〉 프로젝트. 할머니들 저마다 이름에 얽힌 사연들이 술술 풀어져 나왔고, 평생토록 귀에 익숙했던 ‘소리’들을 글로 써보면서 기억 저편에 어딘가에 숨겨졌던 ‘나’를 찾고, 내 이름을 스스로 호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글씨나 그림, 사진은 그저 도구일 뿐, 그들은 이미 시인이었고, 화가였고, 작가였다.
“나는 꽃이 못 되지만 너는 꽃이니까 네가 커서 자라서 피면 너는 이쁘지” – 서월이 할머니
“배운 게 아니라 내가 해서 자연적으로 아는 거야.” – 안호녀 할머니
“나는 예쁜 꽃보다는 오래도록 피는 게 좋아. (중략) 들꽃이나 이런 거는 또다시 피고 지고 하잖아. 그래서 이런 천한 꽃이라도 계속 있는 꽃을 좋아해.” – 이숙자 할머니
“뭐든지 다 때가 있어. 지금 나가 다니면 풀이 자꾸 나와. 그래서 내가 너도 지금 나올 때니까 나온다.
이렇게 다 때가 있는 거구나 이러잖아” – 조계화 할머니
“배운 게 아니라 내가 해서 자연적으로 아는 거야.” – 안호녀 할머니
“나는 예쁜 꽃보다는 오래도록 피는 게 좋아. (중략) 들꽃이나 이런 거는 또다시 피고 지고 하잖아. 그래서 이런 천한 꽃이라도 계속 있는 꽃을 좋아해.” – 이숙자 할머니
“뭐든지 다 때가 있어. 지금 나가 다니면 풀이 자꾸 나와. 그래서 내가 너도 지금 나올 때니까 나온다.
이렇게 다 때가 있는 거구나 이러잖아” – 조계화 할머니
온 마을이 함께 일구어낸 다정한 변화
할머니들과 함께한 지난 수년간의 작업은 할머니들의 변화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함께 작업한 예술가들이 변화했고, 마을이 변화했다. 올해의 세 프로젝트 역시 할머니들의 입장, 상황에 맞춘다는 원칙에 따라 진행되었다. 〈여든 너머〉는 할머니들이 가장 편안하게 느끼실 댁에서, 〈깊어지며 익어가는〉은 용 용암1리 삼봉문화센터에서, 〈내 이름 석자〉는 할매발전소에서 진행되었다. 실제 프로젝트 참여한 할머니들은 22명이었지만, 이 모든 과정에서 온 마을이 함께 움직였기에 가능했다. 녹록지 않은 18번의 수업마다 부녀회 분들이 밥을 해주셨고, 이장님들은 필요한 것들을 그때마다 구해주시는 걸 마다치 않으셨다.
강원문화재단에서 받은 문화예술공간 지원사업은 올해가 3년째로 마지막이다. 지금까지의 학교 공간은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지만, ‘할매발전소’는 마을과 함께 앞으로의 여정을 지속할 거라고 한다. 해를 거듭하며 겹겹이 쌓인 이들의 진심 어린 활동 방식이 마을에 스며들었고, 이미 14개 마을이 모인 이장협의체에도 ‘할매발전소’ 안건이 공식적으로 올라갔단다.
“‘얘네들을 떠나게 하면 안 된다, 오라고 해도 안 올 애들인데, 여기 있겠다는 애들을 공간이 없어진다고 해서 떠나게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하셨죠. 면장님이 학교에 교실이 남으니 그곳을 활용하면 어떨지 말씀하시더라고요. 물론 교육청과 풀어야겠지만. 이장님들도 노인회장님도 마을을 같이 오래 유지하기 위해서는 저희 예술가들이 필요하다는 걸 너무 잘 알고 계세요.” – 심지혜 학예사
다음 행보를 묻는 질문에 그동안 차곡차곡 모은 할머니들의 구술자원을 가지고 ‘할매박물관’을 만드는 것이 목표란다. 그러나 특정 공간이나 장소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힘주어 말했다. 당초 창평분교의 공간을 활용했던 것은 ‘학교’라는 상징성을 염두에 둔 것이기는 했다. 하지만 이들에게 더 중요한 것은 “할머니들 있는 곳으로 가서, 자산들을 모아 잘 보여주는 것, 그게 할매발전소고 할매박물관”이라는 것이다.
전형성을 벗어나 ‘존재’에 집중하는
많은 이들이 노년 대상 사업, 공간조성 사업에 관심을 두고 다양한 시도를 한다. 하지만 로컬리티:의 작업이 주목되는 것은 이들이 기존 일부 사업에서 전형적으로 보이는 경로를 밟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상을 정하고 그들에게 ‘무엇이 필요한가?’라는 관점에서 기획한 것이 아니었다. 구술의 힘을 믿는 로컬리티: 3인방에겐 “듣고 보고 관찰하기”가 가장 중요했고, 우연히 포착된 할머니에 대한 다정한 관찰이 먼저였다. 할머니들의 존재 자체에 집중했고, 이들이 각각 품고 있는 개별적인 서사에 품을 들여 주목했다. 그렇게 ‘그들이 원하는 것’에 하나씩 다가갔다. 버려진 공간을 발견하고, 이 공간을 포장하고 무언가를 채워 넣기 위해 사업을 설계한 것도 아니었다. 할머니들이 시선이 머문 곳을 함께 바라봤고, 그 공허함을 덜어내는 장소로써 학교에 주목했다.
문화예술교육에서의 ‘매개’란 결국 관계맺기를 통해 의미로움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의미를 만들어 내는 일은 함께하고자 하는 이들을 세심히 관찰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이들과 예술 활동 간의 관계 맺기가 궁극적으로 그들에게 어떠한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를 끊임없이 탐색할 때야 가능할 수 있다. 로컬리티:는 할매발전소 작업에 관해 인터뷰하는 내내 단 한 번도 문화예술교육의 전형적 언어로 설명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할매발전소는 문화예술교육적 가치가 어떻게 존재에 대한 관점과 태도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는지를 너무나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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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처음, 그린 스케치북(2022)
[출처] 할매발전소 유튜브
- 최보연
- 정동극장, 아트선재센터, 세종솔로이스츠 등에서 공연기획과 마케팅 업무를 경험했고, 미국 뉴욕대학교 공연예술행정학 석사를 마치고 영국 워릭대학교에서 창의성 담론에 관한 연구로 문화정책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연구재단 지원의 박사후연구원을 거쳐 한국문화관광연구원 부연구위원으로 일했으며, 현재 상지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philoarts@gmail.com - 사진 제공_로컬리티: 홈페이지 http://bylocality.kr/, 인스타그램 @byloc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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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명사 아닌 고유명사로, 의미를 만드는 다정한 관찰
사라지는-살아지는, 그 ‘사이’에 주목하는 할매발전소
정말 잘 보고 갑니다
대명사 아닌 고유명사로, 의미를 만드는 다정한 관찰
사라지는-살아지는, 그 ‘사이’에 주목하는 할매발전소
기대만점으로 다가 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