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수업 이제 그만할까요?
2023년 10월, 전라남도 해남 북평면 남창시장은 영화 <곡성>으로 유명한 나홍진 감독의 신작 영화 촬영이 한창이었다. 아마 시골의 오래된 상가 건물이 1970, 80년대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어서 영화 촬영의 배경이 된 듯했다. ‘철부지ART’라는 이름으로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주제중심 학교 문화예술교육 지원사업 ‘예술로 탐구생활’ 프로젝트에 3년 연속 참여 중이었던 우리는 북평초등학교에서의 마지막 9회차 수업을 끝내고 남창시장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다들 표정이 어두웠고 말이 없었다. 각자의 생업으로 바쁜 한 해였기에 수업 준비는 매번 조금씩 부족했다. 준비한 자료를 챙기지 못할 때도 있었고, 순서를 미리 점검하지 않아 버벅거린 회차도 있었다. 마지막 수업은 전체 수업과의 연결성이 약해서 매년 아쉬웠는데, 3년 차에도 대안이 없으니 더 침울한 분위기였던 것 같다. 다음 해 프로젝트 참가에도 회의적이었다. 매년 아이디어를 더해 2023년이 가장 완성도가 높았지만 더 어떻게 바꾸고 개선해야 할지 막막했다. 세 사람 모두 마음속으로 올해가 마지막이 될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열정적으로 똘똘 뭉쳤던 우리 팀의 3년 차 마지막 날, 그날의 늦은 점심 식사는 프로그램과의 작별 인사와 다를 바가 없었다. 돌아오는 길은 그간 바쁘게 오가느라 제대로 둘러볼 새가 없었던 남창시장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SF영화라고 했었나 전쟁영화라고 했었나? 촬영 현장이 된 남창시장의 상가 건물들은 하나 같이 무언가에 두들겨 맞은 듯 깨지고 부서져 있었다. 푸닥닥 거리면서도 논바닥 흙을 헤집으며 달렸던 경운기가 생뚱맞게 어느 2층 건물 벽을 뚫고 박혀있었다.
예술가의 ‘절기’ 공부를 교과와 연결하여
2020년, 하늘을 올려다본 어느 날 밤이었다. (2020년이라고 콕 찍어서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그다음 해 ‘예술로 탐구생활’에 처음 참여했기 때문이다.) 무심히 밤하늘에 뜬 반달을 보다가 문득 저 달이 점점 차고 있는 상현달인지, 기우는 하현달인지 모른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깜짝 놀랐다. 이게 말이 되나? 평생을 지구에서 살면서 무시로 달을 올려다보았을 텐데? 교과서에도 나오고, 쉽게 검색할 수 있는 지식인데? 어쩐지 모든 인류가 가상현실 속에 살고 있다는 영화 <매트릭스>의 설정이 떠올랐다. 세상이 진짜가 아닌 것 같은 정서에 왜 우리는 쉽게 공감하나? 우리가 발을 디딘 이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돌면서 스스로 자전을 하고 달은 그런 지구 주위를 돌고 있어서, 한 해, 한 달, 하루라는 시간 개념이 생겨난 것인데 정작 우리는 스마트폰 속의 숫자로만 시간을 인식하며 살고 있으니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어쩐지 거짓말 같다는 느낌의 한 조각일까?
나는 영화 속의 주인공 ‘네오’가 된 기분으로 지구인으로서 모르면 미안해야 할 몇 가지 진실을 찾기 위해 지인 몇과 함께 절기 공부 모임을 만들었다. 모임에는 영상제작자이자 지역 문화예술 활동가인 민경 작가(영화), 고등학교 지구과학 교사였지만 자신의 공방을 짓고 예술 활동을 시작한 이의영 작가(미술), 그리고 우리 들풀과 들꽃으로 아름다운 작품을 만드는 윤용신 작가가 참여했다.
모임은 보름에 한 번 절기가 바뀌는 날에 모여 각각의 절기가 뜻하는 바는 무엇인지 현실과 비교해가며 공부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다들 살 만큼 산 어른들인데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절기의 신묘함에 철부지처럼 놀라고 감탄해 마지않았다는 것이다. 농사 달력 정도로만 알았던 절기가 내 삶을 조금 더 ‘리얼 월드’로 인도해 줄 지혜가 되리라는 기대가 생겨났다, 공교롭게도 딱 그 시기에 2021년 ‘예술로 탐구생활’에 참여하기로 했고, 주제는 자연스럽게 ‘절기’가 되었다. 이 세상이 빛의 속도로 가상현실 속으로 달려가고 있으니 우리는 시류를 거슬러서 반대 방향으로 가 보자고 생각했다.
이게 과학실험이지 무슨 예술이야?
2021년 첫해, 프로젝트에 참여한 세 사람은 만남 자체가 너무 즐거웠다. 프로그램 개발 회의 시간이 너무 기다려졌고 표정에는 활기가 돌았다. 학창 시절 미술실에서 그림 그리는 일 외에는 아무 관심도 없었다는 민경 작가는 예술교육이야말로 참된 인재를 키우는 길이라며 쾌활하게 웃었고, 어린 시절 용돈을 모으고 모아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사서 밤새 읽었다는 이의영 작가는 이제야말로 자신이 꿈꾸던 수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며 좋아했다. 무협지로 문해력을 갈고닦아 대학진학에 성공한 나는 학생들이 학교 공부를 못하는 이유는 머리가 나쁜 탓이 아니라 흥미를 일깨우려 하지 않기 때문이라며 과학 수업의 재미를 알려 주겠다고 의욕을 불태웠다.
그렇게 수업안을 완성한 우리는 서로에게 칭찬을 한 바가지씩 퍼주고, 평소 존경하던 예술가의 공방을 방문했다. 그래서 듣게 된 선생님의 평가가 이랬다.
“이게 과학실험이지 무슨 예술이야?”
“다루는 주제가 너무 많아서 산만해!”
“뭔가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어야지 요즘 누가 이렇게 수업을 하나?”
한바탕 칭찬 샤워를 받고 프로그램 개발에 들어가려던 나는 기대와 너무 다른 선생님의 반응에 당황했고 심지어 화가 났다.
‘선생님 우리 수업의 취지를 보셔야죠! 선생님 소설도 재미있지는 않던데요? 예술이면 답니까?’
“이게 과학실험이지 무슨 예술이야?”
“다루는 주제가 너무 많아서 산만해!”
“뭔가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어야지 요즘 누가 이렇게 수업을 하나?”
한바탕 칭찬 샤워를 받고 프로그램 개발에 들어가려던 나는 기대와 너무 다른 선생님의 반응에 당황했고 심지어 화가 났다.
‘선생님 우리 수업의 취지를 보셔야죠! 선생님 소설도 재미있지는 않던데요? 예술이면 답니까?’
우리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주제를 해와 달로 줄이고, 미래에 다른 행성에서 살게 된 인류가 지구로 다시 돌아오기 위해 낯선 방문객의 시선으로 지구를 탐사한다는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직관적으로 한 번에 귀에 쏙 들어오는 스토리는 아니었지만, 전체 수업에 배경 이야기를 입히고 나니 아이디어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거기에 더해 전체 수업에 일관성이 생기고 하나로 묶이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해톡달톡>이 탄생했다.
달력의 발명,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능력 밖의 훌륭한 일을 해낸 사람처럼 스스로 대견했고 첫해 프로젝트가 마무리된 시점에도 여전히 의욕적이었다. 달력에 관련된 책을 정해 새롭게 스터디를 시작했고, 교육 전문가를 만나 프로그램에 대한 의견도 들었다. 프로그램에 대한 평가는 좋았지만, 예술 수업인지 과학 수업인지 헷갈린다는 평이 여전히 있었다. 6회차로 늘린 2년 차 프로젝트에서는 예술 활동의 비중을 높이고자 ‘달력의 발명’ 수업이 탄생했다.
‘예술로 탐구생활’ 프로젝트의 어려운 점은 참여한 예술가가 잘하는 활동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주제에 맞게 새로운 예술 활동을 개발해야 한다는 점이다. 예술 활동의 비중을 높이면서도 주제인 ‘달의 위상 변화’라는 학업 성취도 또한 만족시켜야 했다. 달력을 만들기로 했지만 어떤 형태의 활동이 되어야 할지 마지막까지 고민이 많았다.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은 채로 수업이 점차 다가오던 어느 날, 나는 나름의 아이디어로 달력을 만들고 사진을 찍어서 작가님들에게 보여드렸다. ‘이런 활동이면 다른 선생님들도 만족하지 않을까.’ 나의 기대와 달리 우스꽝스러운 만듦새에 놀란 두 분은 한달음에 달려와 부랴부랴 달력을 만들었다. 과학 교사 출신답게 이의영 작가가 달력을 그리기 위한 가이드를 만들고 학창 시절 그림만 그렸다는 민경 작가의 손을 거쳐 꽤 예쁜(?) 달력이 만들어지고 나서야 둘은 안심했다. 어쨌든 이후로 ‘달력의 발명’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수업이 되었다. 이 달력이 참 신통방통한 것이, 하늘에 뜬 반달이 상현달인지 하현달인지 모르던 나조차도 달의 모양을 통해서 음력 날짜는 물론 달의 관측 가능 시간과 방향까지 읽어 낼 수 있다는 점이다.
4년차, 재구성이 만든 새로운 도전
2023년, 3년 차 프로젝트의 성과공유회에서 전체 멘토링을 맡으신 교수님께서 ‘달력의 발명’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첫해에 교과통합의 취지에 부합해 극찬을 받았던 프로그램이죠!” 한 번 높이 띄우신 후에, “모든 학생이 똑같은 형식의 작품을 만드는 것이 예술일까요? 예술적 창의성이란 무엇인가요?” 바닥에 아프게 꽂으셨다. 가뜩이나 의욕도 없어서 다음 해 프로젝트 참가에 회의적인 우리였는데 또 하나의 숙제가 생겨버렸다. 마무리가 되지 않아서 항상 아쉬움이 남던 마지막 회차도 생각났다. 이제 아이디어도 안 떠오르는데 또 도전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결국 미완의 프로그램을 완성하자는 의견에 모두가 공감했고 4년 차에 도전했다.
2024년에는 프로그램에 크고 작은 변화와 재구성을 시도했다.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지구환경을 낯선 시각으로 보기 위해 지구환경과 전혀 다른 프록시마b 행성의 환경을 이용한 활동을 2회차에 걸쳐 진행했다. 외계인이 되어 자신의 얼굴을 가면으로 만들고 증명사진을 찍고, 탐사대 지원서를 써서 프로그램에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기존의 ‘달의 모양 변화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만들기’ 수업은 과감하게 폐지했다. 학생들이 가장 활발하게 참여하던 프로그램이었고 애초 목적이 과학적 지식을 애니메이션 제작과 결합하는 수업이었기에 결정이 쉽지 않았다. 달의 모양 변화 원리를 이해하면서도 더욱 창의적 예술 활동이 될 수 있는 방향으로 새로운 프로그램을 고안해야만 했다.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 제작 기술을 심화하는 회차도 삭제하면서 우리 프로그램은 지구과학과 애니메이션 제작기법을 결합한 수업이 아니게 되었다. 대신에 항상 아쉬움이 남던 ‘탐사보고서 완성하기’를 2회차로 늘렸다. 그동안의 활동 경험을 녹여 지구가 이주하기 적합한 행성인가 여부를 판단하여 미술작품으로 표현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각각의 작품이 어떤 생각을 담고 있는지 읽어보는 활동으로 변화시켰다. 활동의 난이도(?)가 높아져 걱정됐지만, 그동안의 활동을 토대로 한 창작활동이기에 충분히 기대해 볼 만하다는 믿음이 있었다. 학생들이 자유롭게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다양하고 충분한 재료를 마련해 주는 것이 우리의 숙제였다.
마지막 수업을 마무리하고 우리는 예전처럼 다시 웃었다. 학생들의 작품이 여느 예술가들의 작품 못지않게 훌륭했다. 활동을 지켜본 도암초등학교 교사들은 전시회를 열고 싶을 정도라고 했다. 다시 의욕이 솟아올랐다.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쟁여둔 포부들을 다시 하나씩 꺼내 들기 시작했다. <해톡달톡>의 ‘에피소드2’뿐만 아니라 ‘에피소드0’에 대한 아이디어도 떠올랐다. 달력 만들기를 심화해 성인 대상 버전으로 만들 계획을 세워서 올해가 가기 전에 시행해보자고도 했다. 5년 차에는 새로운 프로그램으로 도전해 보기로 했다. 어떤 과정을 개발하게 될까? 이미 과학 교과서뿐만 아니라 전 과목의 교과서를 모아놓았다. 올해의 프로젝트가 아직 끝나지 않았고 5년 차 프로젝트가 또다시 선정된다는 보장도 없지만, 우리는 이미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 최성호
- 실업계 고교에서 꼴찌에 가까운 성적을 기록하고 공장노동자로 지내다가 28살에 피나는 노력도 없이 대입에 성공하며 교육제도의 빈틈을 목격했다. 대학에서 만화를 전공하고 온라인 교육용 콘텐츠 개발자로 일하며 코딩을 독학했다. 코딩 독학 당시 수학, 물리학이 재미있다는 사실을 처음 발견하고 학교에 배신감을 느끼며 교육에 대한 문제의식을 더욱 키웠다. 전남 해남으로 귀촌하여 문화예술커뮤니티 카페를 운영하면서 ‘예술로 탐구생활’ 프로젝트에 4년째 참여하고 있다. 예술 프로그램 개발이 직업이 되는 방법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hbtrain7@gmail.com - 사진제공_철부지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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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모양을 바꾸듯, 새로운 마음으로
‘철부지ART’가 마주한 도전을 재구성한 방식
잘 보고 갑니다
달이 모양을 바꾸듯, 새로운 마음으로
‘철부지ART’가 마주한 도전을 재구성한 방식
기대만점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