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이란 세계와 예술로 맞닿는 방법

2024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국외출장자 기고③ 이탈리아 문화예술교육

2024년 당시, 나와 박보라 주임(현 어린이문화공간조성팀)은 ‘생애주기별 문화예술교육 지원사업’ 담당자였다. 우리는 그 안에서 우수 사례 발굴을 위한 방식을 기획하고 더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기 위한 콘텐츠 개발 업무를 수행하면서도 늘 ‘생애주기별’이라는 정책적 용어가 낯설게 느껴졌다. 그래서 정책적 용어가 아닌 보다 넓은 현장의 사례를 통해 생애주기를 이해해 보고자 이탈리아 볼로냐, 레지오 에밀리아, 밀라노에서 총 7개 기관을 방문했고, 관계자와의 인터뷰, 공연 및 프로그램 참관을 통해 인상적인 현장을 마주할 수 있었다.
어린이라는 하나의 세계
가장 먼저 볼로냐에 있는 ‘테스토니 라가찌 극장(Teatro Testoni Ragazzi)을 방문했다. 〈쿠오레〉(CUORE, 심장·마음)라는 아동극을 관람하고, 극장 운영을 맡은 극단 ‘라 바라카’(La Baracca) 관계자들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아동극을 본 경험이 없다 보니 그저 밝고 유쾌한 분위기이거나 조금 어둡더라도 동요 <아기 염소> 정도의, 잠시 흐리더라도 결국은 명랑한 분위기로 반전되는 정도를 상상했다. 하지만 감정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것의 중요성을 주제로 배우 한 명이 무대를 채우며 감정이라는 내면의 세계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하는 진중한 극이었다.
  • 연극 <쿠오레>(라 바라카 극단)
     
  • 테스토니 라가찌 극장 24/25 시즌 프로그램북
    [출처] 테스토니 라가찌 극장 홈페이지
공연 후 인터뷰를 통해 우리가 받은 인상에 관해 이야기하니, 그들은 어린이를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하고 탄생과 죽음, 기쁨과 슬픔 등 삶의 모든 부분을 연극이라는 장르를 통해 보여주려 한다고 답했다. 또한 공연의 기획부터 운영까지 학부모, 학교, 시청 등 지역의 다양한 주체와 함께하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우리가 본 공연 역시 교사 그룹의 제안에서 출발한 작품이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로리스 말라구찌 인터내셔널 센터(Centro Internazionale Loris Malaguzzi)에서도 어린이라는 존재에 대한 존중을 토대로 한 ‘레지오 에밀리아 접근법’에 대한 교육 프로그램을 듣고 그들의 작업 결과도 볼 수 있었다. 센터에서 보내는 시간 동안 어린이라는 하나의 세계, 창조적 능력을 갖춘 존재라는 것에 대한 믿음과 존중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또한 교사를 포함한 교육환경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센터에 설치된 《빛의 아틀리에》(Atelier Raggio di Luce)를 관람하며 교육 프로그램에서 강조된 어린이의 자발성, 창의성의 결실을 직접 볼 수 있었다. 결국 ‘자발성’은 교사를 포함한 교육환경의 철저한(보기에는 단순한) 준비에 따라 폭발적인 창의성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로리스 말라구찌 인터내셔널 센터
  • 전시 《빛의 아틀리에》
교육환경의 중요성은 ‘밀라노어린이박물관(Museo dei Bambini Milano, MUBA)에서도 이어졌다. 박물관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놀이형 전시 《콜로레》(COLORE, 색)는 ‘빛의 아틀리에’를 연상하게 했다. 《콜로레》는 단순히 보기만 하는 전시가 아닌 빛과 색을 몸으로 느끼며 놀 수 있도록 구성한 공간이었고, 어른인 우리조차도 함께 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여러 원통 안에 들어가 보기도 했는데, 빛에 따라 달라지는 분위기와 손과 발에 비치는 색의 차이 등 이 모든 것이 어린이의 시선에서는 어떻게 보일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놀이형 전시 《콜로레》
박물관에서는 레지오 에밀리아에서 시작된 프로젝트인 〈레미다 밀라노〉(REMIDA MILANO) 프로그램도 진행됐다. 밀라노어린이박물관이 2010년 시작한 이 프로젝트는 가족과 어린이들이 기업 폐자재로 다양한 활동을 하는 ‘창의적 재활용 센터’로 12개월~5세와 6세~11세 대상의 두 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프로그램은 심리학, 교육학, 연극, 미술, 과학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가 교육 강사로 참여해 놀이 과정을 기획하고 진행한다.
우리는 영유아 대상 프로그램을 시작 전부터 참관하며 교육 강사들이 참여 대상의 연령적 특성 등을 고려하여 다양한 폐자재를 최대한 흥미롭게 배치하려는 노력을 엿볼 수 있었다. 또한 프로그램에 부모와 아이가 함께 참여하여 시각·촉각적 자극에 다양한 모습으로 반응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때 교육 강사들은 초반에 안내를 제외하면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고 참여자의 활동을 발견하고 지지했다. 그러다 보니 가족 단위의 참여자들은 따로 또 같이 소통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놀이하며 프로그램을 즐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레미다 밀라노 프로그램 시작 전 준비 모습
모든 것은 결국 마음이 하는 일
출장을 준비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출장 목적에 부합하는 기관을 섭외하고 인터뷰 일정을 조율하는 일이었다. 열심히 메일을 작성해서 보내도 무응답이 많아 당황하던 중에, 마치 우리의 마음을 알아준 듯 따뜻하게 응답해 준 곳 중 하나가 바로 ‘카피레’(Capire)였다.
볼로냐 시청 홈페이지를 살펴보다 알게 된 카피레는 거의 매일 문화예술 프로그램이 열리는 공간이다. 과거에 공간 기반 사업 담당자로 2년여를 보냈던 터라, 매일 프로그램이 운영되는 공간을 만들고 지역 주민에게 그 공간을 인식시키는 것이 얼마나 품이 많이 드는 일인지 알고 있다. 그렇기에, 안에서 어떤 재밌는 일이 일어나는지 슬며시 볼 수 있는, 그러다 슬쩍 들어와 볼 수도 있을 것 같은 투명한 통창, 입구에 놓인 프로그램 소개 전단 같은 것들이 무척 인상 깊었다.
우리가 방문한 날에는 ‘동네 친목 모임’이 진행됐는데, 카피레는 이런 프로그램을 통해 지역에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 그들의 관심사는 무엇인지와 같은 프로젝트 아이디어를 얻기도 한다고 했다. 실제로 인터뷰 중에도 동네 주민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고, 누군가는 피아노를 치고, 누군가는 책을 읽으며, 그러다 함께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보며 정말 문턱이 낮은 문화공간이란 이런 것이고, 동네에 마음 놓고 놀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건 꽤 즐거운 일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운영방식에 관해 묻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공간, 거점과 같은 단어가 사업에서 등장하면 필연적으로 짝꿍처럼 등장하는 것이 자립 아니겠는가. 특히나 당시 담당 사업에서의 주요 지원 주체가 민간단체였기에 이 공간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가 더욱 궁금했는데, 회원제 운영, 공적 지원금과 기부금 지원, 공간 내 식음료 판매 수익, 개별 부업을 통해 마련한 수입 등으로 유지된다고 했다. 결국 공간을 운영하는 이유가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서가 아닌 예술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는 공간을 만들기 위함”이란 말을 듣고 우리말로 ‘이해하다’라는 공간명 ‘카피레’를 다시 한번 읊조리게 됐다.
  • 카피레. 동네 친목 모임 참여자로 보이는 한 남성은 반갑게 인사를 나눈 뒤 피아노 연주를 시작했다. 인스타그램 @faredelcapire
다시 돌아와 생각하는 생애주기
‘생애’가 아닌 ‘생애주기’를 말할 때 중요한 건, 세대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필연적으로 마주하는 시간의 흐름을 이해하는 것이 아닐까. 이탈리아 곳곳에서 마주한 현장은 때때로 아장아장 걷는 아이가 자신에게 펼쳐진 색채를 바라보며 반짝이는 눈을 보는 것이기도, 다소 느린 걸음으로 문을 열고 들어온 어르신이 공간에 있는 모두에게 건네는 다정한 인사를 듣는 것이기도 했다. 우리나라 문화예술교육 정책사업에서 어느 순간부터 ‘생애’나 ‘거점’ 같은 용어들이 너무 당연한 것처럼 자리 잡았고, 당연해진 이유도 있지만, 그럼에도 이번 출장을 통해 다시금 생각하게 된 것은 우리가 누구와 어떻게 연결될 것인가 하는 질문이었다.
문화예술교육은, 정책기관에서는 더 많은 국민의 삶에 예술이 함께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고, 예술가에겐 내 주변의 누군가와 예술로 닿아 종국엔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작업 과정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때때로 서로에게 함께하는 대상이 되어주고, 예술을 통해 나와 내 주변의 사람과 소통하는 참여자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생애주기와 생활권 단위의 거점을 지원한다 해도, 결국 우리가 바라 마지않는 것은 모두의 주변에 하나쯤은 있길 바라는 편안한 공간, 그 안에 모인 다정하고 반짝이는 사람들 같은 소소하지만 큰 행복의 장면이 아닐까 한다.
최조은 학교교육팀 주임
음악을 전공했지만 악보 앞이 아닌 모니터 앞, 행정의 길을 선택해 예술의 언저리에라도 머무르고자 오늘도 조용히 애쓰는 중이다. 공간 조성 지원사업을 담당하다 2024년에는 생애주기별 문화예술교육 지원사업을 통해 다양한 생애의 사람과 그들의 이야기를 조금 더 가까이서 마주했다.
joe@arte.or.kr
4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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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훈 2025년 05월 14일 at 9:20 AM

    어린이를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하고, 창의성과 자발성을 이끌어내는 교육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한 부분이 특히 공감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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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양남 2025년 05월 19일 at 2:39 PM

    한 사람이란 세계와 예술로 맞닿는 방법
    2024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국외출장자 기고③ 이탈리아 문화예술교육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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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기현 2025년 05월 19일 at 4:02 PM

    한 사람이란 세계와 예술로 맞닿는 방법
    2024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국외출장자 기고③ 이탈리아 문화예술교육
    기대만점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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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kkim 2025년 05월 26일 at 7:21 PM

    글 매우 인상 깊습니다. 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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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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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훈 2025년 05월 14일 at 9:20 AM

    어린이를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하고, 창의성과 자발성을 이끌어내는 교육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한 부분이 특히 공감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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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양남 2025년 05월 19일 at 2:39 PM

    한 사람이란 세계와 예술로 맞닿는 방법
    2024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국외출장자 기고③ 이탈리아 문화예술교육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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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기현 2025년 05월 19일 at 4:02 PM

    한 사람이란 세계와 예술로 맞닿는 방법
    2024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국외출장자 기고③ 이탈리아 문화예술교육
    기대만점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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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kkim 2025년 05월 26일 at 7:21 PM

    글 매우 인상 깊습니다. 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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