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령사회에 접어들면서, 우리는 단순히 ‘얼마나 오래 사는가’보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단계에 들어섰다. 대한민국 역시 65세 이상 인구 비중이 20%를 넘어서며 빠르게 구조적 변화를 겪고 있으며, 늘어난 삶의 시간을 보다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한 사회적 대응이 요구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2025년 10월, 미국 보스턴에서 열린 ‘2025 리딩에이지 연례 회의(2025 LeadingAge Annual Meeting)’ 콘퍼런스에 참여하고 현지 노인 복지 기관 등 다양한 현장을 방문했다.
보스턴은 매사추세츠공과대학교 에이지랩(MIT AgeLab)과 하버드 의과대학 연계 기관 등 세계적인 고령화 연구 인프라와 지역 공동체 기반의 문화예술 활동이 결합한 도시로, 초고령사회 대응을 위한 다양한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번 출장은 해외 사례 확인을 넘어, 문화예술·복지·기술이 결합한 실천 모델을 통해 한국 사회에 적용할 수 있는 시사점을 탐색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2025 리딩에이지 연례 회의: 초고령사회의 새로운 지도를 그리다
보스턴 출장을 마음먹게 만든 출발점은 전 세계 30여 개국, 5,000명 이상의 전문가가 참여하는 2025 리딩에이지 연례 회의였다. 이 행사는 문화예술·교육·복지 등 다양한 분야에서 고령사회 대응 전략과 사례를 공유하는 대표적인 국제 콘퍼런스로, 10년 주기로 ‘글로벌 에이징 네트워크(GAN)’와 공동 개최되며 글로벌 담론을 형성해 왔다. 행사에 참여하며 가장 인상적인 점은 고령화를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이었다. 기존에는 고령화를 사회적 부담이나 해결 과제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했다면, 이곳에서는 ‘장수 경제(Longevity Economy)’라는 개념을 통해 새로운 기회로 접근하고 있었다.
MIT 에이지랩의 조셉 코울린 소장은 “노화는 인류가 획득한 추가 수명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의 문제”라고 정의하며, 기술은 단순한 보조 수단이 아니라 삶의 방식을 확장하는 도구로 작동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즉, 돋보기가 시력을 보완하는 것에서 개인의 스타일과 정체성을 드러내는 안경으로 확장된 것처럼, 고령자를 위한 기술과 서비스 역시 자존감과 정체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설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기존 시니어 산업이 갖고 있던 한계를 되짚게 한다. 노인을 ‘늙고 보호받아야 할 사람’으로 규정하는 접근은 오히려 낙인(Stigma)을 강화할 수 있으며, 이는 문화예술교육에서도 동일하게 작동할 수 있다. 노인을 ‘보살핌이 필요한 수혜자’로 가두는 특화 프로그램보다는, 누구나 자연스럽게 참여할 수 있는 보편적 설계 속에서 접근할 때 비로소 사회적 소외감 없이 창작의 주체로 참여할 수 있으며 그것이 바로 보스턴에서 목격한 노인 대상 문화예술교육의 진정한 지향점이었다.
히브루 시니어라이프·고다드 하우스: 예술로 지키는 노년의 존엄
보스턴의 노인 통합 케어 현장에서 마주한 가장 큰 울림은 예술이 특별한 이벤트가 아니라, 그들의 일상을 지탱하는 필수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특히 ‘히브루 시니어라이프(Hebrew SeniorLife)’와 ‘고다드 하우스(Goddard House)’는 공통적으로 예술 활동의 핵심을 결과가 아닌 ‘창작 과정에서 느끼는 즐거움과 연결감’에 두고 있었다. 두 기관 모두 노인의 인지 수준에 맞춰 섬세하게 설계된 예술 경험이 고령자의 자존감과 자율성을 어떻게 회복시키는지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이는 노년의 존엄을 지키는 데 있어 예술 활동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시사했다.
비영리 노인 통합 케어·연구 기구인 히브루 시니어라이프는 예술을 핵심 치료 자원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이곳의 특징은 음악·미술·표현예술 치료사들이 의료진 및 연구진과 한 팀이 되어 인지 기능 저하를 늦추고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긴밀히 협업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현장에서 마주한 100세가 넘은 참여자가 노래 활동 이후 만족감과 자부심을 보이는 장면은 예술이 신체적 한계를 넘어서는 경험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인지 손상이 심한 ‘메모리 케어(Memory Care)’ 단계에서도 음악과 춤은 안전을 위해 제한될 수밖에 없는 일상 속에서, 빈자리를 채우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보스턴 최초의 노인 통합 주거 기관인 고다드 하우스에서는 수준별로 정교하게 맞춤 설계된 ‘예술로 마음 열기(Opening Minds Through Art, OMA)’ 프로그램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 프로그램은 참여자의 인지 수준을 고려해 도구와 재료, 색상 등 선택지를 제한하고, 실패 경험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설계되어 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점은 이렇게 탄생한 작품들이 지역사회에 판매되며, 그 수익금이 다시 프로그램 운영비와 재료비로 환류되는 순환구조를 갖추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노년의 창작활동이 취미를 넘어 새로운 정체성과 목적의식을 획득하는 과정임을 확인시켜 준 소중한 사례였다. 이러한 사례들은 노년 참여자의 인지 수준에 맞춘 섬세한 예술교육 설계의 중요성을 다시금 일깨워주었다.
보스턴공립도서관·전문가 인터뷰: 주체로서의 노년을 향해
보스턴이 일상 안에서 노인 예술교육을 성공적으로 뿌리내릴 수 있었던 배경에는 지역 커뮤니티를 잇는 탄탄한 허브들이 있었다. 그 중심에는 보스턴공립도서관(Boston Public Library, 이하 BPL)이 자리한다. BPL은 도서관의 고유한 기능 외에도 지점별로 고령층의 구체적인 요구를 반영한 맞춤형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사회적 교류의 장을 마련한다. 특히 보스턴 내에서도 고령층 비율이 높은 지역의 경우, 전담 사서를 배치하고, 퀼팅이나 오페라 워크숍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고령층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예술 거점으로 기능하고 있었다.
이러한 공공의 노력은 주민 주도의 민간 네트워크인 ‘빌리지(Villages)’ 모델과 결합하며 더 확장된 효과를 만들어낸다. 빌리지는 정부 예산에만 의존하지 않고 지역 내 다양한 주체 간 협력을 통해 자원과 서비스를 유연하게 연계하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이는 고령층의 일상과 밀접한 공간에서 돌봄과 문화·교육이 통합적으로 제공되기 위해서는 개별 기관을 넘어선 연결 체계가 필요함을 보여준다. 공간과 조직 간 연계가 구축된 이후에는, 그 안에서 노인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고 어떠한 방식으로 참여를 설계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이 질문에 대해 현지에서 만난 전문가들은 참여를 위해서는 노인을 돌봄의 수혜자가 아닌 능동적인 주체로 설계할 필요성을 공통으로 강조했다.
보스턴대학교의 레베카 부르고 교수는 이러한 능동적 주체로의 전환은 참여 기회의 확대를 넘어, 노인을 ‘공동 창작자’로 바라보는 인식의 변화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는 참여율뿐만 아니라 예술교육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데 중요한 전제가 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유럽 고령화 네트워크(EAN)의 이리 호레츠키 회장은 이러한 관점이 실제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참여를 가능하게 하는 환경적 기반이 함께 마련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특히 고령층의 사회적 고립을 완화하고 참여를 확장하기 위해, 시설과 가정을 연결하는 디지털 기반 예술 프로그램과 같은 구조적 설계가 필요하며, 이 과정에서 노인의 능동적 참여와 주체적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과 인터뷰를 하며, 결국 프로그램을 얼마나 열어두느냐보다 노인을 어떤 주체로 바라보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혜자에서 창작자로, ‘전기노인’이 만들어갈 가능성
이번 보스턴 방문을 통해 확인한 핵심은 노인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였다. 히브루 시니어라이프의 예술치료부터 고다드 하우스의 실패 없는 창작 모델, 그리고 BPL과 빌리지가 보여준 촘촘한 지역 거버넌스까지. 이 모든 현장을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는 노인을 보호의 대상이 아닌, 자기 삶의 서사를 직접 써 내려가는 주체로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특히 65세에서 74세의 이른바 ‘전기노인’ 세대는 높은 활동성과 학습 의지를 바탕으로, 문화예술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이들의 경험과 역량을 사회적 자산으로 전환하고, 세대 간 연결을 끌어내는 것은 향후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사실 출장을 떠나기 전에는 ‘미국의 사례가 우리 현장에 바로 적용될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의구심도 있었다. 하지만 현장에서 확인한 다양한 장면은 그 의구심을 거두게 했다. 예술교육은 문화적 차이를 넘어 누구에게나 작동하는 보편적 경험이며, 이를 어떻게 구조화하느냐에 따라 사회적 효과 역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짧지만 빡빡한 일정 속에서 보스턴의 가을바람을 맞으며 팀원들과 나누었던 고민, 그리고 현장 전문가들의 반짝이는 눈빛을 통해 우리가 하는 업무가 프로그램 지원을 넘어 누군가의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음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의 정책과 현장에 어떻게 연결해 나갈지에 대한 고민은 여전히 진행 중이지만, 초고령사회는 위기가 아닌 우리가 얻은 소중한 시간의 확장임을 믿으며 이번 여정을 마친다.
- [관련링크]
- · 리딩에이지 연례회의
- · 글로벌 에이징 네트워크
- · MIT 에이지랩
- · 히브루 시니어라이프
- · 고다드 하우스

- 국외 출장자
- 권인혜 문화국제협력팀 주임
문정원 문예교육사운영팀 주임
이시연 정책확산팀 주임
주혜령 총무회계팀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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