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한 길 위에서 함께 걷는 법

‘움직이는 세상’이 가만히 들여다본 세상

세상은 도통 알 수가 없다. 사람의 욕심은 어째서 끝이 없는지, 마음은 왜 이토록 허무하게 변하는지, 무슨 기준으로 누구는 살고 누구는 죽는 것인지.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한데 우리는 여지없이 어리석고 허약하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쉽게 답을 내리기 힘든 질문 앞에서 영화 <벌새>(김보라, 2018)의 대사를 떠올린다.
“힘들고 우울할 때 손가락을 봐. 그리고 한 손가락 한 손가락 움직여. 그럼 참 신비롭게 느껴진다.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은데 손가락은 움직일 수 있어.”
‘움직이는 세상’의 시선은 천천히 움직이는 손가락 사이에 머문다. 세상을 신비롭고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어쩌면 아주 작은 움직임과 그것을 고요히 지켜보는 순간들인지도 모른다.
<Noise: 불확실한 산책길> 쪽지
서로 다른 타인으로 만나 자세히 들여다보기
움직이는 세상은 각기 다른 예술 장르에서 활동해 온 세 명의 창작자로 이루어진 예술창작 및 예술교육 단체다. 대표 윤신혜는 애니메이션 기반의 영상 작업을 하는 시각예술가로 타인의 서사를 수집하고 재구성하는 작업을 하며 예술교육에 관심을 가졌다. 연극을 공부하고 배우로 활동하는 임나리는 극장 안에서만 머무는 수동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일상에서 함께 호흡하는 예술을 하고자 예술교육을 시작했다. 작곡가로 활동하고 있는 박다현은 2020년부터 객원 멤버로 참여하다 최근 움직이는 세상에 정식으로 합류했다. 박다현의 관심은 음악이라기보다는 소리에 있다. 음악의 규율에서 조금 비껴있는 소리를 통해 의외의 것들을 느끼고 발견하는 과정에 흥미를 느끼기 때문이다.
세 명 다 서울문화재단에서 운영했던 TA(Teaching Artist)를 하며 만났어요. 다양한 장르의 예술을 하는 창작자들이다 보니 장르가 중심이 되는 수업이 아니라 우리가 전하고 싶은 주제 중심으로 수업을 연구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세 사람 모두 서로 다른 예술 언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주제에 접근하는 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었는데요. 우리는 그 ‘다름’에 흥미를 느꼈어요. – 윤신혜 움직이는 세상 대표
서로 다른 예술 언어를 가진 창작자들이 모여있는 만큼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어떤 접점을 찾는 일이 중요할 터였다. 이를 위해 각기 다른 언어들을 하나로 통일하거나 가시적인 목표를 뚜렷하게 설정해 추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움직이는 세상은 개개인이 가진 특수성에 더욱 집중했다. 개별적인 경험과 감각 속에서 서로를 자연스럽게 연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움직이는 세상이 도달한 결론은 세상을 대하는 ‘예술적 태도’였다. 그들은 천천히 걷고 자세히 들여다보고 귀를 기울이기로 했다. 효율적이고 편리한 방법 대신 불편하고 불확실한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모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보고 들리지 않았던 것들을 듣기 위해서였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움직이는 세상의 프로젝트들은 생략된 것들을 드러내는 거 같아요. 편의성이나 효율성 때문에 생략되었던 것들, 어쩌면 사소하고 하찮게 여겨지는 것들을 발견해서 마주하게 하는 거죠. 누군가는 좀 낯설어하고 불편해할 수도 있어요. 그럼에도 자꾸 생략된 것들을 끄집어내는 이유는 그것들이 우리 삶을 더 생동감 있게 해줄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에요. – 윤신혜 움직이는 세상 대표
<걷다보니 들리는, 보이는 이야기 지도>
느슨한 그물망으로 엮어내는 개인들의 미시사
2015년에 단체를 시작한 이래로 움직이는 세상은 여러 지역에서 폭넓은 주제의 예술교육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운영해 왔다. 2017년에 진행한 <당신의 파랑을 들려주세요>에서는 다수의 시민을 대상으로 개별 인터뷰를 진행해 각자가 생각하는 청년의 이미지를 맵핑했으며, 2019년 <움직이는 흔적들>에서는 참여자들이 가져온 일상적인 물건을 통해 개인적 경험과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2020년 팬데믹 상황에서 기획한 <Noise: 불확실한 산책길>과 2022년 도봉구에서 진행한 <걷다 보니 들리는, 보이는 이야기 지도>에서는 산책하는 행위를 통해 크게는 도시, 작게는 동네에 대한 개인의 감각을 수집하고 기록했다.
2021년부터 윤신혜, 임나리는 다른 객원 멤버들과 함께 생태 감수성을 주제로 한 프로그램도 꾸준히 기획하고 있다. <다-먹었습니다>와 <감자 장례식>에서는 식탁을 차리고 식사를 하는 것과 같이 지극히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일을 통해 지구가 직면한 위기 상황을 다시금 생각해 보고자 했다. 2024년 <로얄커피하우스 : 모두를 위한 커피 타임>에서는 커피 한잔을 다양한 감각으로 탐구하며 ‘커피 아래’에 감춰진 노동과 환경, 생태와 공존의 층위들에 대한 고민을 나눴다. 지극히 사적인 경험에서부터 전 인류적 문제까지, 주제의 범주가 이토록 광범위할 수 있는 이유는 움직이는 세상이 주제 자체보다 그 주제에 다다르는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청년, 도시, 기후 위기같이 모두가 알 만한 거시적인 주제나 키워드도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농도와 깊이가 다르잖아요. 그 이유가 모두 각자의 미시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모두에게 똑같은 주제를 주입하거나 의도된 방향으로 유도하기보다는 각자의 미시사를 펼칠 수 있도록 장을 만들어주는 게 우리의 역할인 거 같아요. 개인의 미시사 속에서 서로가 얼마나 특수하고 다른 지도 확인할 수 있지만 타인을 있는 그대로 만나고 이해할 수도 있어요. – 임나리 움직이는 세상
움직이는 세상은 개인을 하나의 독자적인 세계로 보고, 개인이 외부의 세계와 만나고 부딪치는 모든 순간의 합을 그의 미시사로 규정한다. 다시 말해 내러티브로 기술될 수 있는 개인의 기억과 경험은 물론이고 외부 세계에 대한 그의 신체적, 정서적 감각까지도 개인의 미시사로 보는 것이다. 개인 하나의 독자적인 세계라면 나에게 타인은 낯선 세계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이방인일 수밖에 없다면 타인을 진정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움직이는 세상의 프로젝트들은 이토록 낯선 타인들의 세계와 어떻게 연결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가장 중시하는 부분이 무엇인지를 물으니 ‘경청’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잘 듣고 궁금해하기. 단순한 진심이 느껴지는 태도다.
프로젝트를 하면서 공동체에 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됐어요. 끈끈한 연대감까지는 아니더라도 서로의 안부를 물어주는 느슨한 관계는 만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매년 프로젝트를 할 때마다 그런 관계들을 더 만들어가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 윤신혜 움직이는 세상 대표
<Noise: 불확실한 산책길>
우정을 나누는 산책길
세 명의 구성원 모두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순간에 대해 물었다. 모두 도시 산책을 매개로 기획한 <Noise: 불확실한 산책길>, <걷다 보니 들리는, 보이는 이야기 지도> 두 프로젝트를 진행했을 때의 일을 떠올렸다. 그만큼 도시 산책 프로젝트는 세 사람 모두에게 각별했다.
운영 방법에는 차이가 있지만 두 프로젝트 모두 개인의 ‘감각’으로 일상적 공간을 재해석하고 이를 타인과 공유하는 방식을 취한다. 산책은 대체로 동네의 작은 공원이나 골목길처럼 일상적인 공간에서 이루어지며 참여자들에게는 스마트폰 지도 앱 대신 메모지와 나침반, 손지도 같은 최소한의 불편한 도구가 주어졌다. 참여자들은 산책을 하며 그곳에 대한 기억과 감각을 찾아나갔다. 새삼 발견한 것들은 글이나 그림으로 짧게 메모하고 인상 깊은 소리는 녹음했다. 참여자 개인의 기억과 감각에 의해 재발견된 길의 기록은 타인에게 전달됐다. 그러면 참여자들은 타인의 기록에 의지해 타인의 산책길을 걸었다. 타인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타인의 감각을 따라 경험하고 타인의 흔적을 쫓았다.
다른 사람이 수집한 주관적인 정보에 의존해서 산책을 나서면 헤매게 될 때가 많아요. 특히 소리를 따라 걸을 때 그런 일이 많이 일어나거든요. 우리는 그 불확실성을 나누고 싶었어요. 확실한 것이 하나도 없는 세상에서 확실성을 쫓으며 살면 불행해질 수밖에 없잖아요. 불확실성을 함께 즐기며 조금 더 자유로워지기를 바랐어요. ‘같이’ 행복해지면 좋잖아요.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바라니까요. – 박다현 움직이는 세상
지극히 주관적인 타인의 감각 기록을 따라 걸으며 참여자들은 타인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찻길에서 귀뚜라미 소리를 들어보라고 권한 이의 서정성과 수많은 간판 속에서 유독 하나의 간판만을 찾도록 만든 이의 익살스러움에 대해 생각했다. 누군가가 녹음한 개구리 소리를 다 같이 숨죽여 들으며 그것이 어떤 종일지, 언제 어디에서 우는지를 궁금해하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재미있는 발견을 소개하고 의미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수다쟁이가 되고 마는 친절한 이들도 있었다.
다른 사람의 산책길을 걷다 보면 누구는 짝사랑을 많이 했을 것 같다, 누구는 섬세한 사람일 것 같다는 둥, 그 산책길을 만든 사람에 대해 생각하게 돼요. 그 과정에서 좋은 이웃, 좋은 친구가 생긴 것 같다고, 같이 대화할 수 있어서 위로가 된다고 이야기하는 참여자도 있었어요. 어찌 보면 짧은 인연이잖아요. 그런데도 이런 연대감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신선했어요. 정말로 함께 길을 걷는 동료가 되는 느낌이랄까. 산책을 통해 어떤 관계를 맺게 되는 거 같아요. 저 역시 산책을 함께 한 모든 분의 안부가 여전히 궁금해요. – 임나리 움직이는 세상
움직이는 세상은 도시 산책 프로그램을 장기적으로 발전시키고자 한다. 때문에 지원 사업 외에도 자립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다양한 루트를 탐색 중이다. 새로운 프로그램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있다. 현재로서는 도파민에 물든 일상의 템포를 지연시키는 일이나, 촉각적인 경험을 매개할 방법에 대해 관심이 많다. 물론 어떤 프로젝트를 기획하든 느리게 움직이며 자세히 들여다보고 세세히 느끼는 과정이 함께 할 것이다. 그것이 타인을 보고 듣고 이해하며 우정을 쌓아나가는 움직이는 세상만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움직이는 세상은 프로젝트를 할 때마다 작은 기록집을 제작한다. 고맙게도 몇 권 선물해 주어서 재미있게 읽었다. 읽는 내내 그 안의 몇몇 사람과 같은 길을 잠시 걸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내 이야기도 들어줄지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문득 걷고 싶어져서 길을 나섰다. 나뭇가지를 입에 문 까치가 분주히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멀리서 한 무리의 아이들이 재잘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람은 뾰족했지만 햇살의 기운은 어딘지 조금 둥글어져 있다. 봄이 온다.
<걷다보니 들리는, 보이는 이야기 지도>
신이명
신이명
작은 서사에 주목하는 창작자. 읽고 쓰고 그리고 만드는 일을 한다. 2023년 개인전 《모든 슬픈 것들은 길 위에 있다》 외 다수의 전시에 참여했으며 글과 영상으로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내는 다큐멘터리 작업을 병행하고 있다. 현재는 책과 이야기가 머무는 작은 도서관 ‘효창서담’을 운영 중이다.
corrocorrorider@gmail.com
사진제공_움직이는 세상
4 Comments
  • author avatar
    김양남 2025년 03월 03일 at 1:21 PM

    불확실한 길 위에서 함께 걷는 법
    ‘움직이는 세상’이 가만히 들여다본 세상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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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기현 2025년 03월 03일 at 2:49 PM

    불확실한 길 위에서 함께 걷는 법
    ‘움직이는 세상’이 가만히 들여다본 세상
    기대만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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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희 2025년 03월 04일 at 9:19 PM

    불확실성시대, 혼돈의시대에 서 있는 우리들에게 조금의 위로와 용기를 주는 기사였어요. 연대해서 함께 걸어가다보면 작은 움직임이 세상을 움직일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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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브 2025년 03월 20일 at 12:32 PM

    사소한 것들이 모여서 특별함을 만든다고 생각해요. 그 사소함을 끄집어내는 것이 멋지고 어쩌면 본질적인 부분인 것 같아요.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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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양남 2025년 03월 03일 at 1:21 PM

    불확실한 길 위에서 함께 걷는 법
    ‘움직이는 세상’이 가만히 들여다본 세상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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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기현 2025년 03월 03일 at 2:49 PM

    불확실한 길 위에서 함께 걷는 법
    ‘움직이는 세상’이 가만히 들여다본 세상
    기대만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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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희 2025년 03월 04일 at 9:19 PM

    불확실성시대, 혼돈의시대에 서 있는 우리들에게 조금의 위로와 용기를 주는 기사였어요. 연대해서 함께 걸어가다보면 작은 움직임이 세상을 움직일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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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브 2025년 03월 20일 at 12:32 PM

    사소한 것들이 모여서 특별함을 만든다고 생각해요. 그 사소함을 끄집어내는 것이 멋지고 어쩌면 본질적인 부분인 것 같아요.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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