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의뢰받고 주제를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여행으로 충전하는 법’. 가만, 내가 충전을 위한 여행을 떠난 게 언제였던가. 사업을 시작하고 일로, 출장으로 다닌 곳들은 있었지만, 오롯이 나를 위한 여행을 떠났던 게 전생의 일처럼 까마득했다. 코로나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전 인류의 발목을 부여잡기 전, 나는 방랑벽의 화신처럼 이곳저곳을 기웃댔다. 유독 추위를 싫어하는 탓에 겨울이면 계절을 거슬러 여름의 나라에 당도해서야 마음이 놓이곤 했다. 낯선 나라의 공기를 폐 속 깊이 들이마시며 얼마나 황홀했는지 잊고 지낸 것 같아 조금 착잡한 기분이 되었다.
여행을 위해 가방을 꾸리던 날들을 더듬더듬 떠올려 본다. 부지런히 집을 나선 이른 아침에도 내 발걸음은 춤을 추듯 가벼웠다. 여행자의 신분처럼 날 기분 좋고 가볍게, 또 부지런하지만 느긋하게 하는 건 없다. 출근길이라면 잠을 묻힌 채 멍하게 걸었을 거리도 여행자의 시각으론 감탄을 자아내는 것투성이다. 서울에서의 빠르기만 한 걸음을 생각해 본다. 무언가에 쫓기듯, 혹은 옆 사람들과 눈이 마주칠 새라 바삐 걷던 차가운 걸음들. 여행하며 어느샌가 내 몸에 붙은 속도는 주변을 둘러볼 만큼 느려졌다. 발에 경쾌하게 차이는 돌들, 세월이 묻은 표지판들, 어디선가 풍겨오는 맛있는 냄새들. 오래된 나무들이 바람에 몸을 떠는 것조차 감동적인 풍경이 된다.
나를 만나는 여정
24시간 잠들지 않는 도시를 사랑했던 날도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지쳤다 싶으면 자연을 찾는다. 힘든 삶에서 급속 충전을 하기에 자연만 한 곳이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는 자연의 넉넉한 품속에서 에너지가 조금씩 차오른다. 서핑에 빠져 바다를 무작정 찾았을 때 삶이 도시의 형광등 아래와는 전혀 다른 사이클로 작동하는 걸 발견했다. 바다에 떠 있다 지치면 낮잠을 자고, 일출이나 일몰을 바라보며 요가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해의 뜨고 짐, 간조와 만조, 자연의 리듬을 따라 생활하는 게 말 그대로, ‘자연스러운’ 느낌이었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했을 나무들 사이 깊게 숨 쉬고, 양수에서의 기억을 되살리듯 바다에 떠 있을 때 내 마음도 행복으로 출렁였다.
극한의 P 성향(MBTI 척도 중 하나) 덕분에 계획보다는 즉흥이 내 여행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그 도시의 흐름에 나를 내맡긴다고 구차하게 덧붙여 본다. 여행지를 결정하며 알게 된 도시의 볼거리나 특징만 아는 채로 낯선 땅에 도착하는 걸 좋아한다. 온 감각을 열어 그 도시를 탐험할 임무가 내게 주어진 기분이다. 골목을 헤매며 아침을 먹을 만한 카페나 북적이는 로컬 맛집을 내 구글 맵에 저장하고, 사람들의 표정, 도시의 바이브를 살핀다. 공원에서 여유롭게 날씨를 즐기다 현지인들 틈 사이 교통수단을 타고, 장 보는 사람들을 따라 눈치껏 몇 가지를 골라본다. 바르셀로나에서 지낼 때는 보께리아 시장 근처에 살았던 게 큰 행운이었다. 그날그날, 신선한 채소와 고기를 사서 올리브유에만 구워내도 지중해의 축복이 입안 가득 퍼졌다. 좋아하게 된 해변에서 책과 맥주를 끼고 태닝을 하다 거리 공연을 함께 흥얼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는 날이면 더 바랄 게 없었다.
비슷한 루틴, 마감, 압박 대신 여유, 새로움, 호기심, 탐험 같은 단어가 슬그머니 일상에 자리 잡는다. 효율, 성과를 외치는 곳에선 꾹꾹 눌러두었던 본래의 나를 만나게 되기도 한다. 여행지에서 소소한 일상이나 감상을 적어 내려가다 나의 면면을 발견하는 놀라운 일이 생긴다. 어쩌면 진짜 나를 만나기 위해 먼 길을 찾아간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몰랐던 나를 알아가려고, 내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려고. 여행에서 시도하는 서핑이나 요가, 명상 같은 웰니스 액티비티가 나를 만나는 여정을 조금 더 수월하게 한다. 파도를 기다리고, 요가 동작을 수련하며 내 안의 두려움을 보고, 그를 넘어서려는 시도 끝에 기쁨 혹은 좌절을 더 생생히 만난다. 경이로운 자연 앞에서 한없이 작은 나를 바라본다. 감탄과 무력, 설렘과 불안 사이를 오가며 내 감정들을 알아차린다. 명상으로 예민해진 감각은 여행을 더 풍성하게 한다.
돌보며 채워지는 자양분
좋아하는 것을 지구 반대편에서도 누릴 수 있다는 생경한 느낌도 참 좋다. 낯선 곳이 순식간에 친숙해지고, 다른 국적의 사람들과도 스스럼없어진다. 여행하는데 심지어 좋아하는 활동을 할 수 있다니, 가슴이 두 배로 부푼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하루를 채우고, 건강한 음식으로 나를 잘 먹인다. 바쁘다 보면 가장 뒷전이 되는 나를, 비로소 돌본다.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꼬깃꼬깃 접혔던 마음을 따뜻한 볕에 보송하게 펴 말린다. 진작 내가 해야 했던 일임을, 나밖에 할 수 없는 일임을 깨달으며.
한가로이 나와 시간을 보내면서 해변에서만 뒹굴뒹굴하여도, 갤러리나 책방을 서성여도 좋다. 여행에서 읽었던 책, 우연히 들린 전시의 그림, 길을 걸으며 자주 들었던 음악은 야금야금 꺼내먹는 케이크처럼 인생의 달콤한 자양분이 된다. 어떤 노래나 향에 노출되면 그 여행지의 장소와 분위기 속으로 순간 이동되는 게 너무 좋아서 도시마다 새로운 향수를 쓰고, 신중히 음악을 고른다. 여행에서 잔뜩 채워오는 영감 덕분에 일상에 여러 색이 입혀지고, 때론 삶의 방향이 바뀌기도 한다. 나는 바르셀로나 거리 곳곳의 예술적인 에너지에 매료되어 첫 창업을 했고, 발리와 하와이에서 만난 자연 속 평온을 나누고 싶어 두 번째 창업을 했다. 어찌 보면 여행을 길게 다녀올 때마다 인생의 경로가 바뀐 셈이다.
2019년 창업 후 주욱 만들어 온 리트릿 ‘오롯이, 나’는 새로운 형태의 여행이라고도 할 수 있다. 리트릿(Retreat)은 지친 일상에서 한 걸음 물러서서 갖는 재충전의 시간을 뜻한다. 강릉의 한적한 바다와 솔숲에서 요가, 서핑, 명상을 나누며 자연에서 깊이 숨 쉬며 나를 만난다. 하지만 그러한 리트릿을, 쉼의 공간들을 만들어 가느라 정작 내가 쉬지 못했다는 걸 고백한다. 사실 의뢰받은 글의 제목을 듣는 순간, 떠날 결심을 마쳤다. 여행을 떠나라는 계시로 이보다 충분한 것도 없었다. 발목에 감기는 따뜻한 바다와 열대 우림 속 에너지를 가득 채워올 예정이다. 코코넛을 긁어먹으며 한량처럼 지내다 보면 무언가 벌이고 싶어 안달한 내가 튀어나올 것 같다. 그 힘으로 다시 삶을 껴안아야지. 여행으로 충전한 내가 만들어 갈 2024년을 기대하며, 이 글을 읽는 이들에게도 한 해 좋은 쉼과 평안이 있기를!
한귀리
한귀리
오롯한 쉼의 경험을 디자인한다. ‘Weekenders’라는 웰니스 브랜드로 강릉의 요가&서핑 리트릿 ‘오롯이, 나’, 노마드를 위한 호스텔, 서울의 프라이빗 스파인 ‘위크엔더스 바쓰’를 운영한다. 이 글을 쓰며 긴 여행에서 받은 영감으로 두 번의 창업을 했다는 걸 발견했다. 바다에 푹 빠져 강릉과 서울을 오가며 산다.
인스타그램 @official.weekenders
사진제공_한귀리 위크엔더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