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진진한 가능성 – 철물
어린 시절 살던 집에는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벽면에 붙박이장이 있었다. 성인 한 명이 웅크리고 들어갈 크기의 작은 창고였는데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면 못, 나사, 철사와 끈은 물론 나무를 자르고 다듬는데 필요한 톱, 망치, 끌과 같은 수동 공구와 전동드릴, 직쏘(전동톱의 일종)와 같은 전동 공구가 들어있었다. 그 외에도 용도를 알 수 없는 이상한 부속품이 많았다. 어린 나는 집에 아무도 없을 때면 가끔 붙박이장을 열어 보고는 했다. 이것저것 꺼내다 못과 톱날에 찔리고 긁히기도 했지만 그곳은 그 어떤 장난감보다 흥미진진한 물건이 가득한 놀이방이자 무엇이든 만들 수 있는 요술 상자였다. 그 집을 떠날 적에는 소중함을 몰라 지금은 사진 한 장 없지만, 그곳에 배어 있던 기름 냄새, 녹슨 철 냄새, 먼지 냄새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목공 관련 학과에 입학하게 된 것도 붙박이장의 영향이 컸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무언가를 연결하고 새로운 용도가 있는 사물을 만드는 철물에 관심이 많다. 을지로를 지날 때면 여전히 공구점과 철물점을 앞을 그냥 지나치기가 아쉽고, 해외에 나가면 대형 철물점에 꼭 들르곤 한다. 웬만한 공구는 한국에도 다 있지만 철물은 그렇지 않다. 여러 용도에 맞춰 만들어졌을 나사와 못, 경첩을 보는 것이 내게는 그 어떤 전시, 공연, 여행지를 가는 것 이상으로 흥미롭다. 각기 다른 쓸모를 위해 만들어졌을 철물들을 보며 새로운 용도와 가능성을 상상해보곤 한다.
움직이는 숲에서 – 탐조
언제부터 새를 좋아했는지는 모르겠다. 어릴 적 살던 집 마당에 날마다 참새가 날아왔다. 흙 위에서 몸을 비벼 흙목욕 하는 모습, 봄이 되면 육추(새끼새를 기르는 것) 하는 것을 보며 자연스레 참새의 습성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씨앗 외에 과일, 우지(소기름)를 마당 여기저기에 걸어놓고 다른 종의 새를 기다리기도 했다. 쉽게 만날 수 있는 이웃사촌인 줄만 알았던 새가 기후변화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건 비교적 최근 일이다. 지구 평균 온도 상승으로 새의 생활 터전인 나무가 서식지를 이동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놓여있다. 특히 침엽수의 피해가 심각하다.
여러 과학적 사실을 바탕으로 상상을 가미해〈움직이는 숲 : 보드게임〉을 만들었다. 참여자는 연구자, 기업인, 운동가, 정치인이 되어 기후변화로 위험에 처한 숲을 안전 구역으로 피신시키고자 노력해야 한다. 나무가 나아가야 하는 곳에는 개발이 진행되고 있고 언제든 재앙이 발생할 수도 있다. 작품을 준비하며 여러 나무에 대해 리서치하다 보니 나무와 공생하며 살아가는 새에 대한 관심이 점점 더 커졌고 아이러니하게도 새들이 죽어가는 마당에 탐조하는 취미가 생겼다. 나에게 있어 탐조란 새를 보러 다니는 것, 관련 책을 보는 것, 관련 게임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운 세상을 열어준 – 쌍안경
직접 새를 보러 다니게 된 것은 우연히 쌍안경을 빌려 새를 보게 되면서부터였다. 10배로 확대해서 새를 본다는 것은 그들의 형태와 움직임을 세밀하게 관찰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듯한 놀라운 경험이었다. 그냥 어디론가 이동하는 줄만 알았는데 쌍안경으로 보니 애벌레를 부리에 가득 물고 서둘러 둥지로 돌아가는 중이었고, 화려하게 공중제비를 돌며 나는 이유는 작은 곤충을 잡기 위해서라는 게 보이기 시작했다. 보통 쌍안경과 카메라를 들고 다니지만, 습지에서 탐조할 경우 삼각대에 필드스코프를 장착해 새를 관찰하기도 한다. 필드스코프는 60배까지도 확대해서 볼 수 있어 쉬고 있는 철새를 원거리에서 관찰할 때 유용하다.
전문가를 따라 탐조를 나서면 쉽게 새를 만날 수 있고 새의 생태에 대해서도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어 유익하다. 하지만 나만의 속도로 새와 시간을 보내고 싶어 혼자 하는 탐조를 즐기는 편이다. 물론 초보 탐조인에게 새는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럼에도 새가 다니는 길목에 가만히 서서 기다리다 보면 가끔은 이런 내가 궁금해 다가오는 새를 만나기도 한다. 서로를 관찰하는 가운데 그저 귀엽고 사랑스러운 존재인 줄만 알았던 새들이 내가 사는 환경과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함께 더불어 살아갈 방법은 없을지 조금씩 찾아가고 있다.
- 김보람
- 게임의 다양한 특성을 활용하여 관객이 스토리를 다양한 방법으로 경험하고 사유하는 데 초점을 두고 관객참여형 작업을 만들고 있다. 게임이 세상을 반영하는 마이크로 시스템으로서 가지고 있는 가능성과, 시대의 변화에 따라 진화하듯 바뀌는 능동적인 특성에 주목하고 있다. 크리에이티브 그룹 ‘무제의 길’의 연출가이며, <플러그인 시티>(2017), <닐스의 모험을 위한 인덱스>(2018), <3D 사운드 기술을 통한 극장 실험>(2019), <움직이는 숲 : 불타는 집>(2021), <움직이는 숲 : 씨어터게임 1.0>(2022) 등을 제작했다. 2020년 ‘예술텃밭 예술가 레지던시–기후변화’에 참여하면서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체감하게 되었다. 현재는 인간-비인간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기후변화 문제에 관심을 두고 예술이 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가고 있다.
3dpuppy@gmail.com
사진 제공_필자
기사가 좋았다면 눌러주세요!
코너별 기사보기
비밀번호 확인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