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무엇으로 남을까? 이 질문에 누군가는 확고한 자기만의 답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와 관련해 최근 한 지인은 ‘행장’이라는 단어를 알려주었다. 행장이란 한 사람의 죽음 이후 평생의 행적을 기록한 글 또는 몸가짐이나 품행 자체를 일컫는다. 결국 그에 관한 기록이 그 사람을 말해주는 셈이다. 그렇다면 기록은 어떻게 남고, 어디에 남아, 다시 의미를 갖게 될까? “아카이브와 기억에 관심을 두고 이를 소중하게 여기는” 인물을 만났다. 작가이자 큐레이터이자 문화예술 연구자인 김진주 작가다.
몇몇 키워드로 한 사람을 정의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작가님도 여러 역할을 넘나든다. 이때 서로를 꿰는 주된 관심사를 아카이브, 아카이빙, 기록과 기억이라고 볼 수 있을까?
주된 관심사를 규정하는 게 꽤 어렵다. 며칠 전에도 작가로서의 나를 소개하는 글을 보내야 했다. 그래서 웹 메모장으로 쓰는 애플리케이션, 이메일, 컴퓨터 드라이브에 내 이름과 ‘소개글’을 함께 검색해 옛 자료를 찾아봤다. “미술작가이면서 큐레이터이고 시각 문화예술 연구자이다. (…) 양극성과 파편성, 수행적 발화, 기억과 아카이브를 소중히 여기며(…)” 어떤 것들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말을 계속 써왔더라. 소개글은 아카이브로 치면 너무 당연해 접어두는 인덱스 같은 것이다. 그럼에도 스스로 쓰는 소개글은 작가로서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단 한 줄의 문장일 수 있기 때문에 굉장히 고심을 많이 한 결과물이다. 분명 나는 그 당시에 저런 키워드가 굉장히 절실했고 확신이 들었기 때문에 그렇게 썼을 것이다. 물론 지금과는 달라진 생각도 있다. 만일 내가 어떤 하나의 기록 상태라면 이렇게 완료와 진행의 상태가 함께 있는 기록물 같은 게 아닐까.
방금 작가님의 예전 소개 글을 다시 들여다봤다. 그때의 내가 소중하게 여겼던 것과 지금의 차이를 다시 생각하듯이, 어떤 기록에 의미가 발생하는 시점은 그 기록을 다시 열어보았을 때만일까?
기록학자나 박물관에서 유물을 보존하는 분들께는 훼손되지 않은 기록이 중요할 것이다. 외부의 영향으로 인한 부식이나 접촉 없이 보존할 수 있는 상태가 기록물로서의 가치를 높게 지켜주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기억은 그 시점 그대로 소환되지 않는다. 다시 떠올릴 때마다 계속해서 현재와 섞여 오염되면서 다른 기억이나 감정이 달라붙으며 기억은 변화한다. 계속 자리를 바꾸는 걸 수도 있고, 얼굴을 바꾸는 걸 수도 있다. 심지어 존재 자체가 바뀔 수도 있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세마 코랄>이라는 온라인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 ‘산호(coral)’라는 이름을 닮은 교육, 연구를 위한 웹페이지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바닷속의 산호가 석화되는 것을 보고 광물인 줄 알았다고 한다. 식물로 분류되기도 했다. 산호를 관찰·측정하는 도구가 발달하고 연구가 발전하면서 산호는 식물도, 광물도 아닌 폴립(polyp)이라는 구조를 가진 동물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여러 개념이 함께 있지만 식물로서의, 광물로서의 산호의 특성이나 성질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기억에도, 기억을 소환하는 것에도 이와 비슷한 섞임과 교차가 일어나지 않을까.
흘러가는 시간의 단면을 자를 수는 없지만, 기록은 그 단면을 어떻게든 붙잡아둔다. 붙잡아두기로 한 결과인 기록은 그 자체로 선택의 덩어리다. 그렇다면 좋은 기록은 좋은 선택을 필요로 하는 것일까?
좋은 기록에 관한 정의는 굉장히 어려운 문제다. 이전에 어떤 문화재단이 운영한 사업에 관한 기록을 어떻게 남겨야 할지 함께 작업한 적이 있다. 문서는 어떻게 기록으로 생성하고 정리해야 할지, 문서나 사물로 남지 않는 활동은 어찌해야 할지, 고민이 컸다. 기록이 되지 않은 기억을 찾기 위해 사업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화자로 모셔 무엇을 어떻게 기억하는지 대화를 끌어내고 글로 옮겼다. 그때 기록에 대해 제대로 알기 위해 전문가를 모셔 배우기도 했는데, 기록학을 전공하신 분이 준 힌트가 기억에 남는다. “기록은 원래 4%밖에 남지 않는다” 이때 남은 4%가 좋은 선택을 설명해줄지도 모른다. 대문자 ‘역사’나 행정 기록에만 해당하는 걸 수 있지만, 희귀하게 남을 수밖에 없는 것이 기록의 운명인 것도 같다. 그 4%가 되기 위해서, 그 4%를 잘 남기기 위해서 치열하게 고민할 수도 있다. 반대로 사라짐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좋은 기록을 위해 어떤 선택을 할지에 관한 명령이나 부담을 떨쳐보면 어떨까.
기록은 시대에 따라 그 수용의 맥락이 달라진다. 모종의 시대정신이 기록을 발굴하는 방법, 현재의 기록을 보존하는 방법을 결정하는 데에 영향을 준다. 기록을 선택할 권한이 있는 사람이 시대정신에 저항하는 것 혹은 시대정신을 반영해 보는 것 모두 나름의 가치가 있다. 주로 어떤 선택을 지향하는 편인가?
특히 문화예술교육에서 기록은 항상 시대성을 담보한다. 기억이 단 하나의 표피로 싸여 자리매김을 마쳤다거나, 하나의 굵직한 무게와 덩어리로 공간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기억이 ‘덩어리’일 수 있다면, 이 덩어리는 하나로 묶인 부피가 아니라 켜켜이 쌓인 여러 층이다. 시대정신은 때때로 너무 큰 덩어리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그에 압도될 수 있다. 오히려 이 덩어리를 만드는 것이 지층이나 화석처럼 쪼개지는 것, 선택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무조건적으로 시대정신을 쫓지 않아도 된다.
  • <공장 먼지 제스처(Factory Dust Gesture)> 영상 스틸(2017)
말과 글은 언어가 다가오는 촉감이 다르다. 말이나 글이 기록으로 남으면 그 질감도 달라진다. ‘듣기와 대
화를 주요한 예술적 태도와 도구로 삼는’ 편인데 이때 언어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
‘촉감’. 말과 글이 다가와서 닿는다는 생각이 좋다. 내가 관심을 두는 발화나 기억 또한 말과 글, 기록 같은 것이 다가서고 서로 작용할 때 생겨난다. 이렇게 언어가 움직일 순간을 ‘ps’(postscript, 추신)라는 이름으로 벌였던 콜렉티브 활동을 예로 들어볼 수 있겠다. 그때 팀 이름으로 편지의 추신을 뜻하는 ‘ps’를 택한 이유도 이야기가 전달되는 활동 자체 혹은 전달하는 태도를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추신은 편지의 본문과는 맥락이 다르지만 그 편지 안에 들어가는 내용이다. 함께 보내지만, 확신이 없는 채로 보낸다. 기록으로 따지면 기록되지 말아야 할 이야기일 수도 있고, 알려지지 말아야 할 속말 같은 것일 수도 있다. 본문은 항상 중요하고 긴급하거나 정해진 것, 확실한 것을 담는다면, 추신은 판단을 내리지 못한 것, 정제되지 않았지만 상대방에게 건네고 싶은 것의 자리이다. 확실함과 함께 그 불확실성이 같이 공존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기억과 기록을 작업으로 다시 번안할 때 ‘언어’라는 재료와 형식의 선택 기준을 이야기해볼 수 있을까?
언어는 기억을 옮기고, 기록을 만들 때 가장 보편적으로 선택하는 도구로 늘 그 역할을 잘 수행해 준다. 미술을 배웠고 미술 작업을 하지만 언어를 많이 쓴다. 이 과정에서 기억이나 이야기를 작업으로 옮길 때 화자를 많이 생각하게 된다. 말하고 들려준 누군가가 전해주는 감각에 따라서 매체를 선택하는 편이다. 이때 선택된 매체가 언어라고 할 때 그 안에서 음성을 녹음할 수도 있고, 이메일을 옮길 수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소설을 쓸 수도 있다. 『선유리는 매일매일』이라는 제목으로 만든 책이 있다. 파주시 문산읍 선유리에서 진행한 마을 리서치 프로젝트로 만들어진 책인데, 그곳에 있는 분식점을 중심으로 펼치는 픽션이다. 그 동네에서 나고 자라진 않았지만, 흔히 ‘기지촌’을 연유로 살게 된 여성들, 마을을 떠나지 못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분식집에서 귀동냥했다. 일상적인 말, 쉽게 터져 나오는 말을 모으면서 픽션을 선택했다. 기지촌 여성들의 이야기는 당사자성에 관한 고민과 함께 윤리적 차원의 질문을 불러왔다. 이야기하는 이가 자신의 이름을 못내 숨기고 싶어 한다면, 듣는 이 또한 이들의 이야기를 실존하는 어떤 한 명으로 귀결짓기 망설여진다면, 그럼에도 침묵하기보다는 들려주고 싶다면, 그것을 말하기 위해 어떤 언어, 어떤 도구를 찾아야 할까? 화자가 여러 명이면서 여럿이 하나의 이야기를 만드는 방식이면 어떨까. ‘사실’만을 전달하는 정식화된 기록의 형태가 아니더라도 그 사실성이나 진실성을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최근에 만난 한 사진작가가 “사진만큼 어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매체가 또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언뜻 당연한 것처럼 들리기도 하는데 ‘있는 그대로’라는 표현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누군가의 스쳐 지나가는 말, 주제에 정확하게 들어맞지 않는 이상한 말, 주변부의 말로 픽션을 구성하는 것이 오히려 ‘있는 그대로’일 수도 있다. 기록에 있어 ‘있는 그대로’는 뭘까?
그 사진작가님이 말씀하신 ‘있는 그대로’가 사실성을 곧이곧대로 담보하고 ‘증거’해야 하는 의미는 아니었을 것 같다. 어떤 면에서 보면 요즘 우리는 포렌식(forensic, 과학적 증거 조사 과정)에 익숙해져 있는 것 같다. 사건의 진위를 따져야 하는 일을 많이 요구받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 또한 교육과 관련한 문제일 수 있다고 본다. 자꾸 증거를 찾으려고 하는 게 일종의 포르노나 강박일 수도 있다. 대중문화에서 범죄를 재현하는 콘텐츠가 많아지고, 수사물이 쏟아진다. 사람들이 이런 콘텐츠를 그저 탐닉하는 것만이 아니라, 이를 통해 묵혀 있던 개인의 정동(情動, affect)을 해소하기도 하는 데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우리가 지금 접하고 있는 거의 모든 정보는 과거다. 그 일부를 살아가면서 매일 만나고 있는 셈이다. 언젠가 ‘기록이 전체적으로 지향하는 방향은 미래’라는 말씀을 하셨다. 작가님께서 기억과 기록을 대하는 시간관, 이를 보살피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시간관이 궁금하다.
워낙에 벤야민의 역사관이나 시간관을 좋아한다. 벤야민이 역사와 시간을 설명하기 위해서 등장시키는 게 파울 클레의 <새로운 천사(Angelus Novus)> 그림이다. 이 천사는 몸이 나아가는 방향과 반대 방향을 응시하고 있다. 그 두 가지가 공존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기록이나 기억이 과거를 바라보고 있지만, 한편의 미래를 불러내고 있다는 그 말이다. 과거가 도구화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과거의 것이라고 여겼던 기록이 사실 미래를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점이 선형성 자체를 흔드는 이야기다. 이 시간관에서 보면 미래의 시점이란 과거에 이미 있었을 수 있다는 뜻도 된다. 그리고 현재 나의 위치가 계속 움직인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360도의 천체 속에서의 움직임일 수도 있다. 블랙홀처럼, 빅뱅처럼, 개벽이 일어나는 것처럼 완전히 단절되고 새로 태어나거나 파괴되는 종류의 시간일 수도 있다.
기록이 상기시키는 것은 인간 개별 존재의 유한함, 인간과 세계를 둘러싸고 전승되는 가치의 무한함이다. 기록을 통해 감동을 받을 때는 언제인가?
기억과 기록을 통해서 감동을 받는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기록이 그런 감동을 줄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생긴다. 또 어떻게 보면 감동을 주는 건 사실 어떤 한 사람의 기억밖에 없다는 생각도 있다. 오늘도 발달장애인 부모에 관한 특집 기사를 보고 울컥했다. 그런데 또 다른 면에서는 기억과 기록을 다룰 때 멀리하고 싶어 하는 것 중 하나가 감동이다. 너무 정념에 휘둘리지 않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다.
핸드폰 메모를 자주 하고, 사진도 자주 찍는 것 같다. 데이터 관리가 쉽지 않을 텐데 어떻게 정리하나?
예전에는 연도별, 프로젝트별로 구분하거나 데이터 저장소의 위치로 분류해 폴더링을 했다. 이메일함도 연도별, 주제별, 사업별로 구분해서 라벨링을 할 정도였다. 그런데 한 4년 전부터 이런 구분을 안 했다. 우리는 기술을 수동적으로 쓸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다. 내가 그 기술을 만드는 건 아니니까. 클라우드 시스템에 의존하면서는 검색이 폴더링을 대체했다. 폴더링을 하다 보면 어느 항목에도 들어가지 않거나 한 가지 이상의 폴더에 속하는 데이터도 있는데, 그것 때문에도 폴더링이 의미 없어 졌다.
그렇다면 검색어를 잘 기억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 정보의 위치를 조합하고, 정착시키는 게 아니라 그저 데이터를 뿌려놓고 검색어를 통해서만 꺼내오는 것이다. 뭔가 무책임한 기분도 든다. 클라우드 어딘가에 그 자료가 항상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짐작, 기대, 안도감과 언제 이 모든 자료가 날아갈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함께 갖게 된다. 그래서 폴더링을 다시 시작했다. 요즘 더 숨 쉴 틈 없는 삶을 살아서 폴더링을 다시 시작한 것 같기도 하다.
기록 행위가 보편화된 것을 넘어, 기록이 실존을 앞서고 있는 시대다. 지금 개인의 기록 행위는 어떤 맥락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지금 시대는 모든 것을 기록할 수 있고 기록이 아닌 상태로 행위 할 수도, 살아갈 수도 없다. 계속 무언가를 전송하고 행위 하기 위해, 사회인으로서 나의 존재를 영위하고 살아가기 위해 하는 모든 일이 기록 매체와 결부되어 있다. 이런 난처함에 관해서라면 예술가라고 해서 딱히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작업을 통해 내가 더 주체적으로 전환될 수 있는 부분들은 있다. 멈춤 없는 세계로부터 살짝 떨어져 나와서 볼 수 있으니까.
교육에도 그 기록 자체가 교육의 수단이자 방법이기도 하고 교육 그 자체가 기록의 행위인 것 같다.
교직 이수를 할 때 배운 교육이란 기록과는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수업 하나를 진행할 때도 교육 목표, 방법, 주제, 내용, 참여자가 기술되는 문서가 나온다. 수업의 과정과 그 이후에 교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고, 교육 목표가 어떻게 성취되었는지 되짚어보기 위해 또 기록한다. 그런 차원에서 기록은 항상 교육의 앞뒤에 가깝게 붙어있다. 교육에서 기록이나 기억을 고민하는 이유는 수치나 성과로만 평가지표로만 남지 않는, 생동했던 상태를 다시 찾고자 함이기 때문일 것이다. 정적인 기록에서 쉽게 발견되지 않은 걸 찾아내기 위해서 교육 활동가분들이 고민하고 계실 거라고 생각한다. 기록과 그것을 되짚는 일은 체력이 필요한 일이다. 한편으로는 카메라를 드는 사람의 성향이나 감각에 따라 기록의 결과물이 달라진다는 것처럼 하나의 상황이 서로 다른 감각으로 기록될 수 있다는 점이 여전히 흥미롭다.
교육에 있어서 정말 다양한 매체를 사용한다. 이미지나 경험, 체험 같은 감각 언어보다 문자 언어가 더 정확하다고 생각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앞서 언어가 보편적이고 좋은 도구라고 했지만, 언어만으로는 불완전한 부분이 있다. 어느 하나의 방법만을 택할 수는 없다. 지금 우리가 해결해야 할 난제이자 가장 최적화된 도구이기도 한 웹, 온라인 역시 마찬가지다. 도나 헤러웨이는 ‘트러블과 함께하기(Staying with the Trouble)’라고 했다. 우리가 문제에서 탈출할 방법은 없다. 탈출만이 유토피아적인 결말이나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탈출은 곧 죽음일 수도 있으니까. 문제를 껴안기 위해서는 대화밖에 방법이 없다는 생각도 든다. 다른 방식은 홀로 분투해야 하기 때문에 괴롭다. 기억과 기록이라는 걸 떠올리면 대체로 혼자 있는 순간들과 많이 연결되곤 하는데, 그렇지만은 않았으면 좋겠다. 연결되지 않는 사진들을 몽타주 하듯 기억과 기록을 접붙여보면 좋겠다. 이런 식의 대화적 관계를 더 많이 만드는 것이 덜 외로운 방법이 아닐까.
시간이 지날수록 대화를 더 믿게 되는 것 같다. 확실한 성과가 있어서라기보다는 그것밖에 없는 것 같기도 하다. 타인의 기억과 기록을 대화적 관계로 만날 때 이는 다시 나의 기억과 기록이 된다. 평생에 걸쳐 남기고 싶은 기록이 있다면 무엇일까?
목소리를 생각했다. 원래 작업에 목소리를 많이 쓰기도 했다. 목소리는 상황에 따라, 신체의 상태에 따라 달라지는 매체다. 또 태어나서 처음 그렸던 그림을 떠올렸다. 내가 내 손을 그린 그림인데 기억에만 잔상처럼 남아있다. 한편으로는 남기는 것 없이 그저 사라지고 싶기도 하다.
  • 《푸른 시간을 기억하는 다섯 가지 방법》, 경기상상캠퍼스(2016)
남기고 싶은 두 가지가 다 작가님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점에서 사라지는 것과 똑같은 말이 된다. 그렇다면 기록이 물리적으로 만져질 수 있는 것은 그럴 수 없는 것과 어떤 차이를 갖는다고 생각하나?
이와 관련해 ‘활성 기억’과 ‘비활성 기억’에 관해 이야기해 볼 수 있겠다. 옛 서울대 농대 캠퍼스의 기억을 전시로 옮겨오는 작업을 했다. 전시명이 《푸른 시간을 기억하는 다섯 가지 방법》(경기상상캠퍼스, 2016)이었는데, 작업하며 활성 기억과 비활성 기억의 순환을 나름대로 다섯 가지 과정으로 구성해 보았다. 수집하기-기록하기-재생하기-회복하기-보존하기. 재생하기는 레코드를 리플레이 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다시 살아나게끔 소생시킨다, 재활성시킨다는 뜻도 있다. 앞선 수집-기록-재생 세 단계를 통해서 기억을 다시 찾는다면, 회복하기는 그만큼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다. 보존하기는 어떤 면에서는 더는 접촉할 수 없는, 비활성의 상태이니까, 그전에 회복해서 넣어놓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기억하기, 기록하기는 마치 영원함을 지향하는 듯하지만 언제나 소멸 가능성을 예비한다. 그래서 더 소중한 게 아닐까? 김진주 작가가 고심해 만든 기억의 순환 방법은 개인의 미시사부터, 공공의 잠재기억까지를 포괄해 적용해볼 만하다. 그리고 생동하는 기억과 기록을 위한 대화는 결코 멈추는 법이 없다.
김진주

김진주

미술작가, 전시기획자, 연구자 등 시각예술 분야에서 다양한 역할을 맡으며 활동하고 있다. 다양한 매체와 형식을 활용하며, 듣기와 말하기(대화)를 방법론으로 삼아 언어의 부서지고 남겨진 이미지, 언어의 수행성과 양극성의 공존을 탐구하는 개념적이고 사회적인 작업을 한다. 개인전으로는 《지진계들》(2020)을 선보였고, 단체전으로 《Home Works Forum 7》(2015), 《5회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2016), 《고향》(2019), 《가야 할 미래, 김근태》(2021), 《합류지점》(2022)에 참여하였다. 팟캐스트 <말하는 미술>의 제작자·진행자, ‘아그라파 소사이어티(Ágrafa Society)’의 일원으로 『제노페미니즘: 소외를 위한 정치학』을 공역했으며, 웹저널 [SEMINAR](2019-2021)를 공동으로 발행했다. 세마 코랄(SeMA Coral)의 외부 기획자로 창간 편집을 공동으로 맡았으며, 현재 서울시립미술관에서 학예연구사(2021.10.~2023.3.)로 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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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지
박수지
독립 큐레이터. 큐레토리얼 에이전시 뤄뤼(AGENCY RARY)를 운영하고, 기획자 공동 플랫폼 웨스(WESS)를 공동 운영한다.
suzysomapark@gmail.com
사진_박영균 미술작가 infebruary14@naver.com
작품사진 제공_김진주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