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대는 그야말로 문화기획의 시대이다. 공연, 전시, 축제와 같은 전통적인 문화기획의 영역부터 지역, 도시를 경유하는 새로운 영역까지, 문화기획자의 행보가 돋보인다. 지금 시대는 예술가에게 기획자로 거듭나기를 요구하며, 동시에 ‘예술적인’ 기획을 추구하고 있다. 무소속연구소는 2009년 독립 큐레이터를 중심으로 결성되어 현재는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장르와 주제를 전방위적으로 오고 가며 자신만의 기획적 색깔을 공고히 만들어나가고 있다. 무소속연구소의 임성연 대표를 만나 1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무소속연구소만의 고유한 기획적 색깔을 유지할 수 있었던 전략과 방향성에 관해 이야기 나누었다.
이력을 보니, 조각을 전공했다. 어떻게 문화기획 일을 시작하게 되었는가.
내가 본격적으로 활동하던 2000년대 후반을 생각해보면, 다들 시각예술을 전공하고 독립 큐레이터로 일하면서 대부분 학예사가 되기를 꿈꿨다. 학예사라는 딱 정해진 작고, 좁고, 높은 이 길을 향해 이 많은 사람이 경쟁하는 게 과연 맞을까 고민하게 되었다. 또 내가 조각 전공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비슷한 맥락에서 퍼블릭 아트(public art)에 관심이 많았다. 어떻게 하면 퍼블릭 아트를 직접 해볼 수 있을까, 그 길을 찾다 보니까 어느새 문화기획 업무를 하고, 주변에서 문화기획자라고 불리게 되었다.
<N개의 서울-서대문구> <반려 프로젝트> 같은 예술과 사회적 이슈를 함께 다루는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한 바 있다. 무소속연구소의 기획을 보고 있으면, ‘절묘한 균형 감각’과 ‘융통성’이란 단어가 떠오르는 것 같다. 풀어 설명하면 뭔가 기획에서 억지스러운 게 별로 없달까? 기획자의 정체성이 과도하게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예술적으로 접근한 사회적 이슈가 주변 상황과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점이 놀랍다. 그 비결이 궁금하다.
하나로 설명하긴 어렵다. 우리 스타일을 밀어붙이는 건 아니다. 그냥 다 같이 생각하고 기획할 때 ‘이거 좀 우리 스타일이 아니지 않아?’ 하고 한 번씩 점검하는데, 이를테면, 답이 너무 의도된 것처럼 보이거나 너무 쉽게 결론이 날 때 우리 스타일 같지 않다고 느끼는 것 같다. 그리고 일부러 힘을 빼고 하는 편이다. 너무 잘하려고, 너무 독특하게, 남들이 하지 않은 새로운 것을 하면 할수록 작위적인 것 같다. 한편, 어떤 일을 받고 나서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을 뽑는 게 아니라, 우리 멤버들에게 어울리는 일을 받는 편이다. 그게 좀 그런 느낌을 만들어내는 것 같기도 하다.
힘을 뺀다는 게 인상적이다. 대표님이 생각하는 문화기획자가 지녀야 할 자질과 역량을 ‘힘을 뺀다’는 점과 연결해서 좀 더 이야기해주면 좋겠다.
중요한 역량 몇 가지를 꼽자면, 힘을 빼는 것, 검색, 그리고 몰입, 이 세 가지인 것 같다. 우리가 절묘한 균형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힘을 빼는 거다. 제 멘토셨던 차재근 선생님(현 지역문화진흥원장)이 수업에서 “기획자가 보이지 않는 기획이 좋은 기획”이라고 하셨다. 그러려면 진짜 힘을 빼야 한다. 웬만하면 기획의 요소가 원래 거기 있었던 것처럼 힘을 빼는 포인트, 그 순간을 찾아내는 걸 중요하게 생각한다. ‘검색’의 맥락은, 이 세상에 새로운 건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뭐 하는지 검색 정도는 하라는 이야기다. 그리고 ‘몰입하라’는 얘기를 좋아한다. 모든 문화기획이 시작부터 끝까지 ‘이거는 된다’라는 신념을 가지고 연기를 해야 되는 것 같다. 그랬을 때 나 자신도 그렇고 내 주변 사람, 기관, 그리고 지역주민까지도 다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주변에 보면 많은 사람이 문화기획이라는 모호한 바닷 속에서 확신을 얻고 싶어 한다. 나도 마찬가지고. 그럴 때 몰입해서 그 연기를 끝까지 해내는 게 성공적인 기획을 만들어내는 열쇠인 것 같다.
2020 bac 아트페어 순천
무소속연구소 소개에 보면 ‘지역과 도시에 대한 관심으로 연대’한다는 문구가 있다. 요즘 지역문화 정책이 중요해지면서 지역 기반의 문화기획이 많아졌다. 무소속연구소는 어떻게 지역을 리서치하고 기획하는지 궁금하다.
어떤 연구 용역을 받아서 지역 리서치를 하는 게 아니라 ‘예술적’ 리서치를 하다보니 나름의 노하우가 생겼는데, 일단 차 한 대에 멤버들이 다 같이 타는 게 중요한 것 같다. 큰 차를 타고 계속 돌아다니면서 맛집도 찾고 노는 것 중심으로 많이 한다. 너무 뻔한 관광지는 잘 안 가는 편이다. 시내 다니면서 어떤 종류의 가게와 프랜차이즈가 많은지, 이런 것들 위주로 보면서 도시를 스캔한다. 그렇게 이틀 정도 놀면서 수집된 데이터를 서로 이야기하면서 그 지역 사람이나 연구자가 발견하지 못한 포인트를 꽤 발견하는데, 거기서부터 우리의 기획이 시작된다.
2020년 순천에서 ‘bac’(becoming a collector) 아트페어를 열었는데, 그때 우리가 발견한 건 구도심에 KTX역이 있다는 거였다. 대부분의 KTX역은 산속에 버려두거나 구도심과 먼 신도심에 만드는 편이다. 순천은 역 근처에 중요한 곳이 모여 있어서 걸어서 다 갈 수 있었다. 그걸 보니 딱 독일 카셀 지역, 카셀도큐멘타가 떠올랐다. 순천이 카셀이 될 수 있다는, 도시 곳곳에서 예술행사가 진행되고 사람들이 걸어 다닐 수 있는 그런 도시가 될 수 있다고 설정하는 것에서부터 우리만의 기획과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2021년에 부여에서 진행했을 때는 부여 시민이 ‘백제’라는 역사의 무게에 억눌려 있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백제를 벗어난 부여에는 뭐가 있을까 했을 때 두 가지를 발견했다. 첫 번째는 백마강 유속이 느리니 카약을 타보자는 거였고, 두 번째는 자연풍에 말린 국수가 맛있다는 거였다. 아트페어 기간에 실제 카약을 만들어서 타고, 은산대동국수를 공예 작품에 연결해서 전시하고 판매도 했다. 그때 카약을 만드느라 속초의 칠성조선소와 인연이 닿았고 2022년 속초 아트페어까지 연결될 수 있었다.
* bac 아트페어 : ‘내가 사는 동네에서 나만의 취향을 찾는 곳’이라는 주제로 매년 새로운 도시, 새로운 단체와 협업하여 지역 콘텐츠를 활용한 아트페어. 2017년 연희동 아트페어를 시작으로 순천(2020), 부여(2021) 에서 개최하였으며, 2022년에는 속초(10.1.~9.)에서 개최 예정.
일상과 주변의 소소한 것들을 관찰하고 기획의 요소로 많이 활용하는 것 같다. 한편 그렇기 때문에 익숙하지 않은 지역이라도 다 기획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맞다. 사람들이 아트페어는 서울 강남에서만 하는 특별한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인구 8만 명 밖에 안 되는 소도시(속초)에서 해도 된다. 그 경험치가 중요한 것 같다. 한 번 해보는 것, 우리 지역에서 아트페어 했다, 됐다, 딱 그 단어가 필요한 것 같다. 그랬을 때 다음 해에 모든 게 다 달라지는 걸 경험했다.
최근 많은 문화기획자가 예술교육의 시선이나 태도로부터 기획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관련하여 대표님의 기획에서 예술교육은 어떤 지점을 차지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내가 굉장히 어렸을 때부터 예술교육을 받고 전공해서 지금까지 왔다. 그래서 좋았던 거는 예술을 즐길 줄 아는 사람, 그리고 내 취향이 있고 내 취향을 과감하게 선택하고 거기에 따라 내 삶을 기획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행복한지 됐다는 점이다. 만약 이런 취향의 가치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주는 걸 예술교육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하는 모든 프로젝트에 예술교육이 있다. 예를 들어 아트페어도 마찬가지인 게, 우리가 돈이 많아야지 그림을 사는 게 아니다. 내 취향을 알고 내 취향이 괜찮다는 자신감이 있을 때 그림을 살 수 있다. 2017년 처음 연희동에서 연희동 아트페어를 시작했을 때 ‘작품에 점 찍기’라는 걸 했다. 프로젝트 카페로 운영했던 보스토크에 항상 커피를 사러 오던 단골들이 아트페어 기간인데도 전시장은 둘러보지 않고 커피만 사가는 거다. 매일 하는 반복적인 행동에 하나의 작은 변화를 주려고, 아트페어 기간에 전시된 500점의 작품 중에 맘에 드는 한 작품에 스티커를 붙이면 음료 가격의 10%를 작가에게 기부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나는 첫해에 점을 찍은 사람이 다음 해에는 굿즈를 사고, 그다음 해에는 작품을 산다는 가설을 세웠던 거다. 그게 바로 1년 동안 장기적으로 진행되는 큰 형태의 예술교육이라고 생각한다.
기획하다 보면 막다른 길에 봉착한 것처럼 풀리지 않는 순간이 많이 있을 텐데, 그럴 때 해결(?)하는 노하우 같은 것이 있을까?
의도적으로 문화기획의 ‘천사’라는 상징을 설정한다. 이런 천사는 여럿인데, 예를 들면 도나 해러웨이의 ‘반려종 선언’도 그런 천사 같은 역할을 했다. 반려종 선언을 읽고 진행했던 <반려 프로젝트>는 인간과 동물을 동등한 위치에서 바라보는 감각의 확장을 가능하게 했다. 이런 인사이트가 그대로 정답을 주는 게 아니라,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오솔길에 살짝 빛을 비춰주는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천사로 삼고 있는 또 다른 상징은 대지미술가 크리스토와 잔느 클로드이다. 정말 어려움에 봉착하고 현실적으로 뭐가 안 된다고 하고 담당자가 이거 하지 말라고 하고 기획이 누더기가 되어 갈 때 다시 초심으로 돌아오는 어떤 틀이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천사들 몇몇을 소환해 적용한다.
그간의 경험을 통해 문화기획을 정의해본다면?
몇 년 전에 느꼈는데, 내가 기획을 하는 게 아니라 작업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순간에 내가 기획하는 습관이 짜인 포맷 그대로의 기획서를 쓴다기보다 전체적인 느낌으로 기획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기획서에는 논리적인 과정으로 기획 의도와 프로그램들이 적혀 있지만, 나는 마치 예술가가 작업하듯이 약간의 논리적인 비약이 있을 수도 있고, 결국 마지막에 어떤 그림이나 상황을 상상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렇게 상상한 상황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기획의 논리가 연결되는 걸 보면서, 결국 내가 작업하는 작가들과 비슷하게 접근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 서대문 예술교육 활성화를 위한 지역 자원 조사 및 연구 ‘다음을 위한 닿음’ <의자 프로젝트>
    [출처] 무소속연구소
임성연

임성연

독립큐레이터 교육과정에서 만난 사람들과 함께 퇴근 후 ‘무소속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자’며 2009년 무소속연구소를 결성했다. 대학 강의, 아키비스트로 일하며 무소속연구소 활동을 이어오던 중 2011년 무소속연구소 대표가 되었다. ‘무소속’인 상태를 견지하며 ‘지역과 예술’ ‘도시와 예술’의 바람직한 공존방법을 탐구하고 있다. 서대문구 연희동에 카페 보스토크 & 프로젝트 스페이스 공공연희(2013~2019)를 운영했으며, 연희동, 순천, 부여에서 아트페어 등 지역의 문화콘텐츠를 기반으로 한 다양한 프로젝트를 기획·운영하고 있다. 이밖에도 서대문구 문화기획자 양성과정 기획·운영, 서대문구 지역문화예술교육 활성화 사업 <다음을 위한 닿음>을 진행했으며, 다수의 도시재생 및 문화도시 전문가 양성 프로그램 퍼실리테이터로 참여했다.
무소속연구소 musosoklab.com / ** bac 아트페어 http://bac.sale
성연주
성연주
‘지역문화 거버넌스’에 대한 연구로 서울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역문화, 생활문화, 청년예술 등 문화예술의 사회적 저변을 넓히기 위한 정책 개념에 관심이 많다. 주요 논문으로는 「Rappers as hip-hopers」「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블랙리스트 실행」 등이 있다.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문화교양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다.
euniceseong@gmail.com
사진_이재범 POV스튜디오 andy45a@naver.com
프로그램 사진_무소속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