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 마실은 관객이 공연의 주체가 되는 경험 중심의 참여극 작업을 지향한다. 단체의 명칭 또한 이웃집에 놀러 가듯 ‘마실’ 나가는 마음으로 참여자가 연극과 놀이를 만나기를 꿈꾸는 손혜정 대표의 고유한 철학을 담고 있다. 극단 마실의 작업은 삶의 경로 곳곳에서 마주치는 모든 경험과 사람과의 관계를 모티브로 삼아 마치 우연인 듯 필연 같은 순간들로 채워져 왔다. 뜨거웠던 7월의 어느 날, 전남 곡성에서 배우이자 연출가 손혜정을 만나 그 이야기를 들었다.
놀이터에서 시작한 ‘나의’ 연극
2005년 창단 이래 참여기반 아동청소년극 중심 작업을 하게 된 배경은 그 시작부터 독특하다. 전남 곡성에서 나고 자란 손혜정 대표는 애당초 초등교사를 직업으로 선택했었다. 하지만 교사 생활을 하면서도 연극이 너무 하고 싶었던 차에 대학원 진학을 통해 배우로서의 삶을 꿈꾸었다. 그러나 곧바로 이어진 결혼과 출산으로 잠시 숨 고르기를 하던 시기, 예술가로서 그녀만의 철학을 깨닫게 되는 순간을 마주하게 되었다.
“첫 출산을 하고 3개월 된 아이를 돌보면서도 연극이 너무 하고 싶었는데, 아무도 날 배우로 안 써주는 거예요. 그래서 아이를 데리고 무작정 놀이터에 가서 노는 아이들에게 ‘아줌마가 이야기 하나 해줄까?’ 그러면 대부분 도망가버렸어요. 그래도 매일 가서 ‘아줌마 이야기 조금만 들어줘’ 하니 들어주는 아이들이 생겼어요. 그러다 어떤 찰나에 아이들이 탁! 웃는 순간이 있는 거예요. 배우만 했었지 대본은 한 번도 안 써봤던 때였는데, 집에 가서 ‘아, 여기서 웃었지. 그럼 이렇게도 해볼까?’ 그 부분을 대본으로 쓰고, 다시 들려주고, 또 고치고, 그렇게 딱 1년을 했더니 A4 8장짜리 제 첫 대본이 나왔어요. 그 작품이 <달려라 달려 달달달>이에요.”
우연한 생의 한순간, 그녀가 놀이터에서 아이들과 함께했던 바로 그 경험이 ‘참여극’에 대한 소신을 싹틔운 것이다.
“제가 만든 연극의 첫 시작이 놀이터에서 만난 아이들과의 경험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참여극은 제 작업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것 같아요. 처음부터 커뮤니티 아트를 지향했다거나 참여극에 대한 철학이 확고했던 것은 아니었어요. 정말 몰라서 아이들에게 물어보고, 그에 대한 아이들의 화답으로 채워졌고, 그것이 저 혼자 한 것보다 훨씬 훌륭했어요. 살아있는 관객과 만나는 연극의 특성상, 그들을 그저 관람자로만 둘 수 없었죠. 관객의 호흡을 받아서 같이 완성할 때 엄청난 쾌감을 느끼게 돼요. 내가 준비한 호흡에 더해 그들의 호흡으로 완성되는 순간, 이게 연극만이 가진 엄청난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이후 극단 마실은 아동청소년극 작업을 꾸준히 이어갔다. <달려라 달려 달달달1·2>(2006, 2010), <수수께끼 항아리>(2010), 영유아극 <파롱 파롱 파롱아>(2011), <천하무뽕>(2015), 한국-호주 공동 창작극 <너는 꽃>(2016~2018), 한국-미국 간 공동작업 기반의 <셰익스피어-별>(2018-2020), <움직이는 동화_나무 이야기>(2021) 등은 극단 마실 프로필에서 빼놓을 수 없는 대표작들이다. 지난 17년간 한결같이 지내 온 과정에서 여러 상을 받으며 대외적으로 인정받았고, 일본, 호주, 미국 등 해외 단체와의 공동협업도 활발하게 진행했다.
  • 영유아극 <파롱 파롱 파롱아>(2011)
  • 영유아를 위한 공연창작개발과정
엄마 예술가의 삶, 우연 같은 필연
이들 작품이 탄생하게 된 맥락에는 세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그녀의 삶과 경험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처음 아동청소년극으로 시작한 작업이 영유아극으로 확장하게 된 이유 역시 마찬가지다.
“진짜로 우연히 시작했어요. 아이 셋 낳고 육아하면서 간간이 공연하면서 지내고 있는데, 어느 날 후 배가 ‘언니는 살만해? 우리는 죽을 것 같은데…’ 하는 거예요. 출산과 육아로 연극을 병행하기 어려워하는 후배들을 보니 제가 첫 아이 낳고 힘들었던 기억이 나서 덜컥 약속했고, 성북예술창작센터 입주단체로 선정된 차에 ‘우리가 애들 봐줄 테니 그저 편안하게 있어라’ 하는 마음으로 이들을 모았어요. 극단 배우였던 강사들이 기저귀도 갈아주고 애도 봐주고, 엄마들은 그림 그리고, 노래도 부르고 예술교육 프로그램인지 아닌지 모를 그런 걸 한 거죠. 그 과정에서 다른 이들에게 할 수 없던 이야기를 하면서 웃고, 울었죠. 참여자 절반은 엄마 예술가, 절반은 엄마 일반인이었는데, 사실은 이들 모두가 예술가였던 거예요.”
그 모든 과정을 곁에서 지켜본 극단 배우들이 엄마·아이들과 함께 나눴던 이야기들이 아깝다며 뭐라도 만들어 보자고 제안했고, 그 김에 하나씩 장면을 만들어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누군가가 덧붙일 음악을, 다른 누군가는 소품을, 또 다른 이는 무대를 고민해왔다. 그 결과 나오게 된 작품이 첫 영유아극 <파롱 파롱 파롱아> 다.
“참여극을 만들 때 원래 관객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더 끌어들이기 위해 애쓰게 되는데, 영유아들은 이 ‘참여’를 그냥 자연스럽게 하는 거예요. 아이들은 그냥 춤을 추고 달려들었어요. 이미 상대 배우로서 공존하고, 오히려 아이들이 완전히 주인공이 되었죠. 이 우연의 시간 속에서 저는 그저 무언가를 열심히 했을 뿐인데, 영유아들로 인해 완벽한 참여극을 경험하게 된 거죠.”
성인보다 훨씬 더 열려있는 ‘원형의 감각자’로서 존재하는 영유아에 이끌려 작업을 지속하게 되면서, 최근 작품인 <움직이는 동화_나무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영유아극은 극단 마실의 작업에서 가장 상징적인 영역이 되었다. 극단 마실이 만드는 영유아극의 차별성은 무엇일까?
“영유아극이 영유아만 보는 연극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영유아도 볼 수 있고 영유아와 함께하는 거죠. 다만, 배우들은 아이를 키워 본 사람, 엄마나 아빠인 사람으로서의 경험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영유아랑 같이 호흡해 본 이들이 가진 근육과 감각이 중요하니까요. 다른 하나는 영유아를 어떤 서비스 받아야 하는 존재로 생각하지 않는 거예요. 그들과 함께 호흡하고 소통하기 위해 공연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해요.”
이러한 그녀의 소신은 시흥에서 올해로 4년째 진행되는 ‘영유아를 위한 공연창작개발과정’ 프로젝트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2019년 1기 15명으로 시작되어 현재 4기에 이르기까지 평범한 엄마들이 배우훈련을 거쳐 창작에 직접 참여하여 영유아극을 만드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비밀레시피
갈라진 땅에 핀 꽃 같은
극단 마실의 작업이 곡성이라는 ‘지역’을 구심점으로 확장되기 시작한 것은 2018년 무렵부터다. 벌써 햇수로 5년째 지역 청소년들과 할머니들을 만나는 작업을 지속해 온 손혜정 대표에게 ‘곡성’은 어떤 의미일까? 당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을 겪고 예술가로서의 정체성 혼란, 사람과 관계에 대한 불신으로 몸과 마음 모두 고단했던 시기, 고향 곡성에 있던 후배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공연 한번 제대로 보기 어려운 아이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다는 말에 그녀는 며칠 전 겪은 한 장면이 떠올랐다고 한다.
“가뭄으로 쩍쩍 갈라진 땅에 작은 휴지 조각 같은 것이 있어 자세히 보니 꽃이었어요. ‘얘네는 자기가 꽃인 줄도 모를 것 같아’ 그랬더니 아이들이 ‘우리가 꽃이라고 불러주자’ 하면서 ‘너는 꽃, 꽃!’ 춤을 추는 거예요. 함께 춤을 추면서 생각했죠. 나도 자기가 꽃인 줄 모르는 누군가에게 꽃이라 불러주는 일을 하고 싶다고.”
그렇게 꽃을 만나고픈 마음으로 용기 내어 곡성으로 달려왔다. 그녀의 이야기에 너무 신이 나고 행복해했던 아이들과 선생님들이 내일도, 다음 주도 한 번 더 와달라 부탁했고, 혹여 정형화된 공연만을 생각했다면 불가능했을 그 제안에 그녀는 흔쾌히 응했다. 마찬가지로 곡성에서 만난 할머니들과의 작업 역시 마당에서 밥을 함께 먹다 자연스럽게 시작되었다.
“여기 와서 만난 할머니들이 정말 다 시인인 거예요. 어느 날 한 할머니가 ‘나는 오늘 상추는 오늘 묵고, 내일 상추는 내일 묵어. 내일 상추를 오늘 안 묵어. 난 그렇게 살았어’ 하시는데, 그 말이 저한테는 보약 같았어요. 쩍쩍 갈라진 들판에 온몸으로 피어난 꽃들, 그런 사람들 같았어요.”
<할머니의 비밀레시피>는 이렇듯 할머니 집 마당에서 함께 밥 먹고 이야기하며 알게 된 사연들을 하나둘 모아 동네 청년들과 함께 연극 장면으로 만들어 보면서 시작되었다.
“보이지 않는데 사라지지 않는 선물이 있을까, 제가 아는 건 연극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할머니들의 이야기로 연극을 만들어 보여드리면 좋겠다. 할머니와 밥을 먹던 바로 그 마당에서, 대단한 무대도소품도 없이 한 연극이었지만, 우리가 가고 나더라도 할머니에게 곱씹을 추억이 생기는 공간을 선물해 드리고 싶었어요.”
예술로 이중언어 캠프
사진_박영균
보이지 않지만 사라지지 않는 선물
올해 7월 14일부터 3일간 곡성에서 지역 청소년과 다른 나라에 거주하는 한인 청소년이 만나 진행되는 ‘예술로 이중언어 워크숍’ 역시 아이들에게 세상을 다르게 보는 창을 열어주고 싶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여기서 ‘이중언어’란 한국어건 영어건 어떤 언어를 써도 좋다는 의미로, 아이들이 자기 생각을 연극작업, 예술로 자유롭게 표현하는 캠프를 지향한다.
이미 극단 마실은 2019년에 일본 청소년 단체와 곡성 청소년 간의 공동창작 작업을 진행했고, 2020년에는 미주 한인 아이들과 곡성 청소년들이 온라인 화상회의로 만나 다른 세상 끝에 있는 또래들과 소통하는 ‘숨은 공존 찾기’ 프로젝트를 진행한 바 있다. 온라인으로 만나지만 영상, 작곡, 움직임, 연기에 대한 각자의 생각이 함께 어우러지는 공동창작 과정을 통해, 아이들은 세상에 나를 표현하는 새로운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 경험을 토대로 올해 진행되는 ‘예술로 이중언어 캠프’는 아이들을 위해 준비한 ‘보이지 않지만 사라지지 않는 선물’이었던 셈이다.
“곡성에서 기차는 탈출구예요. 다른 세상과 연결되는 어떤 곳이거든요. 여기 아이들에게 탈출구가 될 수 있는, 다른 세상의 창을 열어줄 수 있는 작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곁을 주고, 품어주고, 편들어 준 곡성
곡성과의 인연으로 만들어온 일련의 경험들이 손혜정 대표의 향후 행보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게 될까? 최근 지역과 예술가 간의 적극적 결합을 강조하는 정책적 논의에서는 예술가가 지역에서의 이슈와 문제를 살펴보고 모종의 ‘대안’을 제시해 줄 것을 당위적으로 강조하기도 한다. 그러나 극단 마실과 손혜정 대표가 곡성에서 일궈 온 그간의 작업 과정을 반추하면, 지역에서 활동하는 예술가에 관한 완전히 다른 결의 무늬가 돋보인다. 우연한 기회로 곡성이 먼저 예술가 손혜정에게 곁을 내어 주더니, 말없이 품어주고, 편들어주는 친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뭔가 체계나 규격에 저를 끼워 넣는 게 아니라 제 마음껏 할 수 있었어요. 그냥 학교 문을 열어주고, 자유롭게 어떤 시도를 해볼 수 있도록 텃밭을 주신 것, 그게 저한테는 큰 원동력이에요. 예술가에게 충분히 너른 마당을 주고 넘어져도 일어나서 뛸 수 있고 마음껏 펼칠 수 있게 해주는 공동체가 필요하고 중요한 것 같아요. 지역이라고 하면 뭔가 중심에서 이탈한, 소외된, 자연 말고는 특별한 볼거리도 없는 곳으로 퉁 쳐서 생각하기 쉽잖아요. 아직 제가 지역에 뿌리내리고 사는 예술가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예술가가 지역을 새롭게 바라보는 시각은 매우 소중하다고 생각해요. 별 볼 일 없는 곳이라 치부되는 곳에서 예술가가 다른 노래를 부를 수 있어야죠. 제가 그걸 잘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제가 부를 수 있는 노래를 계속 부르려고 해요.”
이렇게 말하는 손혜정 대표의 환한 웃음은 곡성의 햇빛을 닮았다. 무엇인가 거창한 목적을 두고 성큼성큼 가기보다는, 삶의 굽이 굽이에서 만나게 되는 모든 인연과 경험의 순간에 귀를 기울이고 나의 호흡과 그들의 호흡을 조심스레 마주쳐가며 빚어왔던 그녀만의 작업방식. 이것이 예술가 손혜정이 부르게 될 또 다른 노래가 기대되는 이유다.
손혜정
손혜정

극단 마실 대표, 연출가, 배우이자 엄마다.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지만 어릴 적부터 품었던 꿈을 이루고자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에서 아동청소년연극을 전공했고, 2005년에 놀이터에서 만난 아이들을 관객 삼아 쓴 첫 작품 <달려라 달려 달달달>과 함께 극단 마실을 창단했다. 공연자 중심의 활동에서 벗어나 관객이 주체가 되는 참여형 연극을 실현하기 위해 영유아부터 어르신까지 다양한 세대와 만나 예술교육과 연극의 경계를 넘나들며 작업하고 있다. 제17회 서울어린이연극상 연기상, 제20회 서울어린이연극상 우수작품상 등을 수상했으며, 해외예술단체와 공동창작 작업도 활발히 이어가고 있다.
극단 마실 페이스북 @masiltheater
최보연
최보연
정동극장, 아트선재센터, 세종솔로이스츠 등에서 공연기획과 마케팅 업무를 경험했고, 미국 뉴욕대학교 공연예술행정학 석사를 마치고 영국 워릭대학교에서 창의성 담론에 관한 연구로 문화정책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연구재단 지원의 박사후연구원을 거쳐 한국문화관광연구원 부연구위원으로 일했으며, 현재 상지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philoarts@gmail.com
영상·인터뷰 사진_박영균 미술작가 infebruary14@naver.com
프로그램 사진 제공_손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