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속 모든 모과나무를 떠올리며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모과차를 마셨다. 일주일 넘게 딱딱한 모과를 채 썰어 모과청을 만들고 있다. 덕분에 평소 먹지 않던 모과차를 요즘 매일 마시게 되었다. 혼자서 다 먹을 수 없을 만큼 많은 모과가 집에 쌓여 있는 이유는 곧 모과를 그릴 예정이기 때문이다. 최대한 많은 열매를 관찰하려면 줍거나 얻은 모과로는 부족해 농장에서 상자 가득 샀다. 길이와 폭을 재거나 색을 비교하는 등 외형을 관찰하는 일은 끝났고 열매 안에 씨앗이 어떻게 배열되어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 모과를 매일 잘라보고 있다. 절단면에 보이는 세포와 씨앗이 자리 잡은 모양새, 씨앗의 개수와 형태를 살피고 나중에 추가로 관찰이 필요해 보이는 조직은 예리하게 잘라 표본을 만든다. 이렇게 매일 모과 열매를 잘라 관찰하고 나서 모과청을 만드는 것이다. 모과청 병은 일곱 개가 넘었는데 여전히 집에는 모과가 많다. 부엌 조리대 위를 가득 차지한 모과를 보면서 비슷했던 예전 상황을 떠올려보았다. 미나리를 그릴 때는 냉장고에 미나리가 가득했고 온갖 미나리 요리를 시도했었다. 토란을 그릴 때는 토란국에 질렸고, 두릅을 그릴 때는 비싼 두릅을 원 없이 먹었다.
모과나무는 장미과에 속하는 식물이다. 장미과에는 모과꽃과 비슷하고 우리에게 친근한 봄꽃이 여럿 있다. 살구나무, 매실나무, 복사나무, 사과나무, 벚나무, 배나무 등인데 열매 모양은 달라도 꽃들만 비교해 보면 모과꽃과 형태가 비슷하다. 다섯 장의 꽃잎과 다섯 장의 꽃받침, 많은 수술을 가지고 있다. 모과꽃은 이들에 비해 꽃이 모여 피지 않아 소담하지 않고 연둣빛 새잎 사이에서 하나씩 외롭게 핀다. 그래서 꽃이 펴도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다른 장미과 꽃들보다 단정하고 고고한 모양새를 가진 모과꽃이 예쁘다고 생각한다. 귤색이 도는 연둣빛 새잎과 어우러진 차분한 분홍색 꽃잎도 우아하다. 모과는 울퉁불퉁한 모양 때문에 못생긴 열매로 유명하지만 실제로 모과를 보고 못생겼다고 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노랗게 익은 열매는 탐스럽고 향기도 좋아서 어릴 때 아버지 차에 천연 방향제로 놓여있던 귀한 열매였다. 내 기억 속 처음 만난 모과나무는 초등학교 동물 동상 옆에서 자라고 있었다. 모과나무 줄기는 얼룩무늬가 있고 윤기가 나 아름답지만 동물 동상에 올라가려고 발을 디디기엔 미끄러웠다. 모과나무는 원산지가 중국이라서 우리나라 야생에선 볼 수 없고, 조경수로 흔히 심는다. 내 기억 속에는 많은 모과나무가 있다. 꽃이 필 때나 열매가 익을 때 외에도 단풍이나 한겨울 낙엽 진 모습처럼 관찰한 시기도 다양하고 관련된 추억도 많은 식물이다.
과학적 기록 너머에
나는 논문이나 도감에 들어가는 학술적인 식물 도해를 그린다. 섬세하고 과학적으로 그려진 그림이라서 그림이 완성되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지, 어떤 과정으로 그리는지 질문을 자주 받는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항상 비슷한 대답을 했다. 그림의 섬세함 때문에 그림만 열심히 그려도 한 달이 걸리지만 실제로는 1년 이상 걸린다. 그 이유는 꽃, 열매, 새싹, 단풍 등 식물의 사계절을 모두 관찰해야 하기 때문이다. 실물을 두고 해부하며 관찰해야 하는데 시기를 놓쳐 채집을 못하면 다음 해로 넘어가 몇 년이 걸리기도 한다. 그리기 전에 그 식물에 대한 논문이나 문헌 조사를 충분히 하려면 더 많은 시간이 걸린다. 식물 연구나 식물 도해에 관한 답변에 있어 나는 식물학자로서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답변하려고 한다. 그래서 항상 답변은 거기까지 하지만 그 뒤에 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하는 답변이 있다. ‘사실 그림을 잘 그리려면 다른 많은 시간이 필요해요. 정확히 설명하긴 힘들지만……. 일주일째 딱딱한 모과를 썰고 모과청을 만드는 그런 시간 말이에요.’
객관적인 관찰과 실험, 학술적 정보를 담는 논문은 주로 글과 도표로 이루어진다. 식물 도해는 그림이지만 논문을 쓰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좋은 식물 도해는 논문처럼 객관성과 정확도가 중요하다. 그 식물의 주요한 특징을 정확하고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며 한 장의 그림에 꼭 필요한 정보만 가려 담는다. 구성도 논문의 구조처럼 서술적으로 배치하기 때문에 작가의 주관적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그런데 그렇게 완벽하게 과학적으로 잘 그려진 식물 그림 중에 간혹 그 식물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그림이 있다. 크기와 형태도 정확하고 정보도 빠짐없이 담았지만 차갑고 그 식물인지 알아볼 수 없는 그림 말이다. 그런 그림은 기운이 없다. 나는 이 기운을 생명력이라고 부른다. 생명력이 없는 그림이 그려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고민하고 있을 때 친한 미술 작가는 그림을 그린 이의 예술적 감각이 부족해서라고 얘기했지만 나는 다른 결론을 내렸다.
생명력의 기록
나는 논문을 쓸 때와 다르게 식물 도해를 그릴 때는 마음 한구석에 비과학적인 믿음이 있다. 과학적 결과물을 내는데 ‘믿음’이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지만 말이다. 나는 과학계에서 주술적 식물학자로 낙인찍히고 싶지 않아서 이 믿음에 관해 다른 식물학자들에게 얘기한 적이 없다. 식물 그림에 생명력을 넣기 위해서는 식물을 연구하고 관찰하는 것 외에 온몸으로 느끼는 것이 필요하다는 믿음 말이다. 그것은 잘 그리고 못 그리고와는 상관이 없는 것 같다. 그림을 못 그리는 사람이 평생 키운 식물을 생명력 넘치게 그리는 경우를 많이 보았으니까. 식물채집의 에피소드나 실패한 실험들, 실험실에서 먹고 자던 고생이나 동료들과의 추억, 학회에서의 자랑스러움이나 부끄러움을 논문에 담을 수 없듯 식물 도해도 마찬가지다. 식물 도해는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그림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나는 그런 식물과 관련된 경험과 추억이 식물의 생명력이라는 표현으로 그림에 들어간다고 믿는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식물에 대한 사랑이 있다면 생명력이 생긴다 생각했는데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생명력을 담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구체적이고 경험적이며 식물과 가까이 해야 하는 연애 같은 시간이 필요함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올 한해 모과나무만 보이면 달려가 관찰했다. 모과나무와 관련한 것이라면 식물학적인 것이 아니어도 관심이 갔다. 그림이 완성될 때까지 나는 계속 이런 짝사랑을 하며 모과나무를 온전히 알고자 할 것이다.
모과는 돌처럼 딱딱한 석세포가 많아서 자르기 어렵다. 이미 모과의 석세포에 대한 논문을 읽었고 현미경으로 석세포가 어떤 형태이며 얼마나 많은지 관찰했지만 내가 석세포를 제대로 그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 시기는 더 많은 시간이 지난 후다. 일주일 동안 힘겹게 채를 썰며 얼얼해진 손 감각과 모과차를 마실 때 씹히는 까끌까끌함으로 석세포를 더 잘 알게 되었다. 설탕에 절인 과육과 버려진 씨앗 주변의 딱딱한 과육 속 석세포 비율을 생각한다. 모과청을 나눠줄 고마운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이 사람들도 모두 모과의 석세포를 느끼길 기대한다. 모과에서 나온 씨앗을 말려 작은 봉투에 담는다. 모과청과 함께 모과 씨앗을 나눠줄 생각이다. 모과 씨앗을 처음 만져보고 관찰하며 모과 씨앗을 심는 것은 그 사람에게 작지만 특별한 기억이 될 것이다. 모과청과 씨앗을 주면서 모과나무와 석세포에 관해 얘기해 줄 생각이다. 이 모든 것이 그림에 들어갈 것이고 모과나무는 종이 위에서 생명력을 얻을 것이라 믿는다.
- 신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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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그리는 식물학자, 식물을 연구하는 화가다. 대학에서 생물학을 공부하고 식물분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식물형태학적 분류 및 계통 진화와 같은 전통적인 연구부터 식물 DNA바코딩과 식물 게놈 연구와 같은 최신 연구들을 수행하고 있으며, 식물생태학적 분야로 연구 범위를 넓혀 나가고 있는 신진연구자이다. 영국왕립원예협회의 보태니컬 아트(Botanical Art) 국제전시회에서 2013, 2014, 2018년 참여하여 모두 금메달을 수상하였으며, 최고전시상 트로피와 심사위원스페셜 트로피를 수상하였다. 영국왕립원예협회 역사상 참여한 전시에서 연속 모두 3번의 금메달과 트로피를 수상한 유일한 작가이다. 영국왕립원예협회, 미국 카네기멜론대학, 환경부 국립생물자원관 등 다수의 그림이 컬렉션으로 선정된 바 있다. 식물분류학과 생물 일러스트레이션 분야를 융합한 다양한 활동을 수행하고 있다.
hyewooshin@naver.com
www.hyewoo.com
www.instagram.com/hyewoo.plant
사진 제공_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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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인 식물그림은 차갑고 빈틈없을 것이라는 생각은 편견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오랜 시간 식물을 관찰하고 느끼는 과정이 그림에 반영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대상을 알기 위해 공부하고 관찰하고 그림으로 옮기는 작업은 긴 호흡과 끈기, 성실함이 필요한 것 같아요. 자신의 재주를 (그림에 대한) 의심하기 보다 당장 무엇을 해야할지를 알려주셔서 용기를 얻습니다. 솔직하고 담담하지만 확고한 생각과 의지가 담긴 글을 잘 읽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최해운 독자님,
제가 글을 읽으면서 느꼈던 감동을 이렇게 독자님의 언어로 읽으니 더 감동이네요. (감동)
신혜우 선생님이 식물에 가진 철학과 관점을 잘 느낄 수 있는 글이라 저도 왠지 모르게 용기를 얻었던 글이에요.
즐겁게 읽어주시고 마음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계속해서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는 기사 만들겠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살아있는 식물 그림을 그리는 법
정말 너무나도 유용하네요
살아있는 식물 그림을 그리는 법
흙의 예찬② 생명력을 기록하기 정말 너무나도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