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생태·환경’ 책을 주로 펴내는 1인 출판사를 시작해 9년째 일단 망하지 않고 버티고 있다. 출판사를 시작할 때 그 많고 많은 주제 중에 왜 이 비인기 주제에 꽂혔을까, 생각해 보니 식물에 관한 ‘의미 있는’ 기억 하나가 떠오른다. 하루가 멀다고 새벽 야근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날도 새벽에 일을 마치고 택시를 잡기 위해 도로에 서 있었는데, 가로등 불빛을 받으며 서 있는 나무 한 그루가 보였다. 아직 추운 날씨인데 동글동글 작고 예쁜 하트 모양을 한 연둣빛 이파리를 나뭇가지에서 밀어내고 있는 그 나무가 너무 신기하고 예뻐 보였다. 누가 눈길 한 번 주지 않아도, 이 자리에서 묵묵하게 매년 싹을 틔우고 잎을 펼치며 네가 살고 있었구나.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저 아무것도 없었던 맨 가지에서 초록 잎을 만들어 내는 ‘나무’라는 생명체가 궁금해졌고, 이렇게 예쁜 이파리를 만드는 아이의 이름을 불러 주고 싶었다. 몹시 지쳐 있었던 그때의 나를 위로해 주던 그 나무는 나중에 알고 보니 계수나무였다. 그날 이후로 나의 닉네임은 계수나무가 되었고, 나는 이전보다 더 ‘새로운 식물’에 관심이 생겼다.
레이첼 카슨이 쓴 『센스 오브 원더』에서 딱 한 줄만 건져 올리라면 아마 이 문장일 것이다. “자연을 아는 것은 자연을 느끼는 것의 절반만큼도 중요하지 않다.” 식물의 특징과 이름을 외워 줄줄 읊을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전에, 존재하는 생명 하나하나가 지닌 고유의 아름다움과 넘치는 생명력 앞에서 경외감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지금 돌이켜 보면 나무 앞에서 ‘신비하고 사랑스럽다’는 감정을 느끼게 해 준 계수나무가 어쩌면 내 본격적인 식물 공부의 시작, ‘식덕’으로 가는 출발점이었는지도 모른다.
식물을 ‘살아 있는 것’으로 보고 있을까
일단 생태출판사를 시작하긴 했는데, 너무 이 분야에 일자무식이라 숲해설가 공부도 시작하고, 여기저기 좋다는 생태 강연도 열심히 들으러 다녔다. 강사가 이런 질문을 던졌다. “식물과 동물의 차이가 뭐죠?” 뭐지? 움직이고 안 움직이는 건가? 식물은 스스로 자신의 먹을 것을 만들어 내며 사는 ‘독립영양’ 생물이며, 식물을 먹고 사는 초식동물이나 다른 동물의 생명을 취해 자신의 생명을 이어가는 육식동물은 ‘종속영양’ 생물이다. 이 질문의 답을 듣고는 조금 충격을 받았다. 분명히 학교 다닐 때 생물 시간에 배운 내용인데, 생각 없이 외우기나 했지 지금까지 그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구나. 식물은 물과 공기, 햇빛만 있으면 스스로 생명을 이어갈 수 있다. 식물의 광합성이야말로 생태계에서 벌어지는 일 중에 가장 경이롭고도 효율적인 에너지 생산 과정이다. 스스로 먹을 것을 만들어 내다니, 식물은 정말 위대한 생명체가 아닌가! 우리 동물은 식물 없이는 단 한순간도 살 수 없구나! 이때부터 식물의 초록 잎이 다르게 보였다.
김포의 모 미술관에서 어린이 대상 생태놀이 수업을 한 적이 있다. 처음 만났을 때 보통 나뭇잎을 가지고 하는 놀이를 많이 한다. 머릿속에 있는 나뭇잎을 하나 그리고, 마음에 드는 나뭇잎을 주워와서 똑같이 그린다. 처음 그림에서 아이들 대부분은 길쭉한 원에 선 하나를 그어 잎자루를 표현한다. 하지만 주워온 나뭇잎 중에 그렇게 생긴 것은 없다. 잎 가장자리에 자잘한 톱니가 있기도 하고, 하트 모양으로 둥글넓적하게 생기기도 했고, 손바닥 모양으로 잎이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기도 하다. 당연히 잎맥도 잎자루도 모두 다르고, 한 나무에서 떨어진 잎도 그 모양이 다 다르다. 그림을 그린 후 우리가 다 다르게 생겼듯이, 나무도 다 다르게 생겼고 다 다르기에 예쁜 것이라고 말해 준다. 무엇보다 나뭇잎을 따지 않고 땅에서 주운 이유를 말해 준다. 나뭇잎은 나무가 먹을 밥을 만드는 밥공장이다. 우리도 배고플 때 밥을 먹어야 하듯이, 나무도 밥을 먹어야 하고, 나뭇잎이 그 일을 한다. 내 밥을 누가 빼앗으면 슬프듯이, 나무도 잎을 강제로 빼앗으면 슬퍼한다. 신기하게도 이 수업을 하고 나면 이파리와 꽃을 꺾는 아이들이 줄어든다.
언젠가는 ‘살아 있는 것’을 그린 그림으로 모빌 만들기를 한 적이 있다. 놀랍게도 식물을 그린 아이들이 없었다. 과연 아이들만 이렇게 생각할까? 식물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들이 말하는 식물이 ‘꽃’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식물의 생식기관인 꽃을 본래의 기능을 할 수는 없어도 더 화려하고 풍성하게 보이도록 만들기 위해 지금도 온갖 과학 기술이 동원된다. 인테리어 바꾸듯이 내킬 때마다 뿌리내린 식물을 가차 없이 베어내는 사람도 꽤 있다. 수십 년간 온갖 악조건을 견디며 길가에서 자라고 있던 키 큰 가로수들도 새 도로를 내야 한다, 간판을 가린다, 열매에서 냄새가 난다, 이런저런 이유로 한순간에 사라지게 만들기도 한다. 과연 우리는 식물을 ‘살아 있는 것’으로 보고 있을까. 우리는 1년 중 단 며칠만 볼 수 있는 꽃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식물의 ‘온 삶’을 제대로 바라볼 준비가 되어 있을까.
서로를 살리는, 생존을 위한 의존
숲 공부를 하며 내가 아는 ‘생태계 먹이사슬’은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역시나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과거의 나에게 생태계 먹이사슬 피라미드는 그저 ‘먹고 먹히는’ 관계를 나타내는, ‘약육강식’의 생태계를 보여 주는 그림이었다. ‘적자생존’의 의미도 그렇게 오해하고 살아왔다(‘적자’가 ‘강한 자’가 아니라 ‘적응한 자’였다!). 생산자(식물), 소비자(동물), 분해자(미생물)로 이루어진 생태계 피라미드가 다른 존재 없이는 어떤 생명도 생존할 수 없다는 ‘생존을 위한 의존’이 이루어져야 하는 ‘생명의 관계망’이라는 사실을 안 순간 시야가 갑자기 확 넓어지는 느낌이었다.
화분 속에서 풀 한 포기를 키우는 일도, 손바닥만 한 땅에서 먹을거리를 키우는 일도, 제법 너른 땅에 정원을 가꾸는 일도, 대규모 농장이나 숲을 가꾸는 일도 결코 ‘식물’만 이해해서는 불가능하다. 미생물이 움직이는 ‘살아 있는’ 땅이라면 어떤 땅도 결코 인간이 원하는 특정 종의 식물만 자랄 수 있게 해 주지 않는다. 식물이 있으면 곤충과 새가 날아들기 마련이고, 곤충과 새는 또 식물이 다음 생을 이어갈 수 있게 돕는다. 땅속 미생물은 모든 동물을 살리는 식물이 살아갈 수 있도록 환경을 마련해 주고, 생명을 다한 동식물들을 다시 땅으로 돌려보내 준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부터 인간까지, 지구상의 어떠한 생물체도 ‘나 홀로’ 살 수 있는 생명은 없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고, 서로가 서로를 살리는 관계!’ 나처럼 그저 눈에 보이는 식물의 외양에 반해 ‘식덕’의 세계로 입문한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메시지다. 어쩌다 식덕의 길에 들어섰지만 이제는 식물의 화려한 외관이나 이름이 아닌, 어떤 식물이 살아가는 방식에 눈을 돌릴 수 있어야 진정한 ‘식덕’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진정한 ‘식덕’은 결국 ‘생명 사랑’의 길에 다다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 전은정
- 목수책방 대표. ‘생태·환경’ 주제의 책을 펴내는 목수책방의 대표 편집자다.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모든 책에 ‘모든 살아 있는 것은 연결되어 있고, 서로가 서로를 살리는 관계’라는 생태 지식의 핵심 메시지가 담길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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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_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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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생명을 유지하는 것과 다른 생물에 기대어 살아가는 것이 차이라니 의미심장하네요~ 식물의 삶을 좀 더 배워보고 알아가야 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