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고통을 넘어 사회 구조의 문제가 되도록

책으로 읽는 문화예술교육

나는 지난 20년 가까이 신문기자로 일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얘기를 듣고 글을 써왔다. ‘권력자’들의 얘기는 최대한 기록에 남김으로써 그들 자리에 값하는 책임성을 묻고 ‘사회적 약자’의 얘기는 그들의 목소리가 사회에 들릴 기회를 한 번이라도 더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임했다. 하지만 늘 미진함을 느꼈다. 상당 부분은 나의 능력 부족 때문이고, 내가 글 쓰는 매체가 가진 짧은 호흡에서 비롯된 측면도 있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더 어려움을 느꼈던 인터뷰이는 ‘사회적 약자’였다. 신뢰 관계 형성 없이 불쑥 그들 삶에 끼어든 나의 접근이 무례하거나 시혜적으로 보이지 않을까 신경 쓰였다. 그중 홈리스 취재는 늘 빚처럼 남아있었다. 외환위기 후인 2000년대 초 서울역 광장에서 “소주 살 돈 주면 얘기해줄게”라는 몇몇 홈리스에게 지폐 몇 장 꺼내 접근했다가 대화를 오래 이어가지 못하고 내가 필요로 했던 얘기만 듣고 서둘러 현장을 떠난 기억이 몇 번 있다.
  • 『힐튼호텔 옆 쪽방촌 이야기』
    (홈리스행동 생애사 기록팀, 후마니타스, 2021)
  • 『당신의 말이 역사가 되도록』
    (이호연·유해정·박희정, 코난북스, 2021)
당사자의 목소리를 담는 구술기록
그로부터 20년. 팬데믹 와중에 그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궁금했다. 몇 번 서울역 주변을 다녀왔지만 주변만 맴돌았을 뿐 그들 속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던 중 접한 『힐튼호텔 옆 쪽방촌 이야기』를 소개하는 것으로 부채감을 조금이나마 덜고자 한다. ‘홈리스행동 생애사 기록팀’이 쓴 이 책에는 ‘우리는 양동에 삽니다’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서울역 광장 건너편 구 대우빌딩과 힐튼호텔 사이에 고층 건물로 둘러싸여 잘 보이지 않는 양동 쪽방촌의 홈리스 8명의 생애사가 수록됐다. 기록팀은 주로 홈리스 당사자들인 ‘말한 사람’과 활동가들인 ‘듣고 적은 사람’으로 이뤄졌다.
서울시가 2019년 10월 ‘양동 도시정비형 재개발구역 정비 계획 변경안’을 가결하며 건물주들의 주민 쫓아내기를 가속화한 것이 시급하게 이들의 구술생애사를 듣게 된 계기였다. 인터뷰는 사회적 거리 두기가 강화된 2020년 10월부터 1년간 이뤄졌다. 기록팀도 인정하듯 짧은 시간에 기획된 만큼 인터뷰이의 다양성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고, 20·30대 여성 인터뷰어와 60·70대 남성 인터뷰이 사이에 돈독한 관계가 형성되지 않아 어려움이 있었다. 그럼에도 이 책은 드물게 홈리스의 ‘스스로 말하기’를 돕고 기록한 의미 있는 작업이다. 기록자 최현숙에 따르면 기록팀은 분명한 목적의식을 갖고 작업에 임했다.
“홈리스 자신의 입으로 자기 경험과 생애 기억을 말하도록 돕고, 그간 겪어 온 다양한 어려움들(빈곤, 탈가정, 관계 단절, 질병, 중독, 노숙, 범죄, 낙인, 자괴 등)이 개인적 문제가 아닌 사회적 문제임을 드러내며, 홈리스 당사자가 직접 자신들을 규정하는 국가·자본·사회의 관점과 정책에 대항하는 서사를 생산하도록 한다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었다.” (『힐튼호텔 옆 쪽방촌 이야기』, 310쪽)
그러한 의도는 어느 정도 달성된 것으로 보인다. 생애를 구술한 홈리스 대부분은 없는 집에서 태어나 배고픔과 가정폭력, 미래가 보이지 않는 삶에서 탈출하고자 집을 나와 결국 서울역 주변에서 살게 됐다. 몸이 망가질 정도로 일해도 가난을 벗지 못한 경우가 많았고, 명의도용에 이용돼 ‘범죄자’가 되거나, 이들의 가난을 이용해 돈을 버는 복지시설과 정신병원 얘기가 공통적으로 등장했다. 기초생활수급자로서 자신의 노동 사실을 숨길 수밖에 없는 사정은 복지체계가 가진 허상을 잘 드러내 보여줬다.
인상적인 부분은 이들이 다른 곳으로 갔다가도 ‘양동 쪽방촌’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표면적으론 경제적 동기가 컸다. 지방보다 수급비를 조금이라도 더 받을 수 있고 병원·일터로 이동하는 데 드는 비용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가족, 친구 등과의 관계가 끊어져 대부분 혼자 사는 이들에게는 바로 옆에서 한뎃잠을 함께 자고, 푼돈이라도 생기면 술과 담배라도 나누며, 한 평 남짓 방안에서 홀로 세상을 떠났을 때 장례를 지내고 유해를 뿌려줄 사람들이 여기 있다는 점에서, 이곳을 ‘내 집’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 사회에서 가장 가난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스스로 이를 말했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고 본다. 쪽방촌 주민들은 구술생애사 작업 과정에서 자신들이 살 수 있는 임대주택 건설 방안을 요구했고, 서울시의 양동 재개발 계획이 그렇게 수정된 것은 이들이 거둔 작은 승리이기도 했다.
윤리적이고 입체적으로 타인의 삶 기록하기
타인의 삶을 경청하고 기록하는 일은 사회를 조금이라도 더 낫게 바꾸길 원하는 누구나 활용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그 일을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까. 『당신의 말이 역사가 되도록』은 인권의 관점에서 그 일을 보다 윤리적이고, 효과적으로 하기 위한 좋은 지침을 제공해준다. 인권기록 활동가의 정체성을 공통으로 가진 이호연·유해정·박희정이 썼다. 세 사람은 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의 일원으로 참여한 『금요일엔 돌아오렴』(2015), 『재난을 묻다』(2017)를 비롯해 차별받는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전한 『나는 숨지 않는다』(2020) 등을 함께 낸 바 있다. 저자들이 자신의 경험뿐만 아니라 다른 구술기록들을 폭넓게 검토한 뒤 기획-인터뷰-기록의 세 단계로 나눠 풀어놓은 실용적인 구술기록 노하우이다.
개인의 삶에서 길어 올린 고통을 전시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사회 구조의 문제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전형성 내지 진부함에 갇히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가령 『힐튼호텔 옆 쪽방촌 이야기』의 기록자들은 70대 남성 홈리스 인터뷰 도중 실명 그대로 책에 싣겠다는 기존 결정을 번복하고 가명을 쓰기로 함으로써 수급자로서 허용되지 않은 고물·폐지 수집 노동(“범법행위”)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기록자 최현숙·홍혜은은 말한다.
“인생이라는 삶의 덩어리가 얼마나 입체적이고 분열적인지 드러낼 수 있어서 좋았다. 소위 ‘착한’ 소수자로 기록되고/기록하고 싶은 화자/청자 모두의 허영을 깰 수 있었고, 우리가 소수자들의 삶을 기록하는 이유를 다시 벼리게 했다. 그들에 대한 기록이 고통의 전시가 되어서는 안 되며, 기록의 목적은 화자가 어떤 사회적 위치들을 거쳐 왔는가를 드러내고 그에 연관된 사회 구조를 파악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힐튼호텔 옆 쪽방촌 이야기』, 224쪽)
손제민
손제민
경향신문 기자로 20년째 일하고 있다. 사회부, 국제부, 정치부 기자로 일했고 현재 문화부장을 맡고 있다. 이 글에 언급된 분들처럼 ‘기록노동자’의 정체성을 갖고 있다.
jeje17@kyunghyang.com
이미지 제공_후마니타스, 코난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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