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며들다
‘듣는다는 게 대체 뭘까?’
올해로 어느덧 4년 차에 접어든 아트엘의 <듣다> 프로젝트를 리뷰하기에 앞서, ‘듣는다’라는 것의 의미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았다. 듣는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감각 기관, 그중에서도 특히 청각기관을 통한 소리의 알아차림을 뜻한다. 그런데 만약 이 같은 일반적·사전적 의미 밖에서 듣는 행위를 사유해본다면 어떨까. 만약 듣기의 대상이 ‘소리’에 한정되지 않는다면, 만약 듣기의 이유가 ‘의미나 정보의 전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면, 만약 듣기의 방식이 귀를 비롯한 ‘청각기관’에만 의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들을 수 있을까. ‘듣기’라는 명사적 상태를 ‘듣는다’는 동사적 행위로 전환할 때에서야 비로소 만날 수 있는 생각의 고리를 풀어 그 이음새들을 차례로 놓아보았다.
듣는다 / 들린다 / 무엇을 듣는가 / 소리를 혹은 소리의 여백을 듣는다 / 의미를 듣는다 / 몸짓을 듣는다/ 무엇을 어떻게 듣는가 / 소리를 냄으로써 듣는다 / 소리를 감촉함으로써 듣는다 / 소리를 봄으로써 듣는다 / 소리를 씀(writing)으로써 듣는다
이처럼 ‘듣는다’는 것은 때로는 보는 것이기도 하고 때로는 만지는 것이기도 하며 때로는 의지적인 행위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무의지적인 현상이 되기도 한다. 이번 리뷰는 이 같은 경험 혹은 앎의 상태 속으로 필자 자신을 스며들게 하는 것에서부터야 비로소 첫머리를 뗄 수 있었다.
예술적 매개로서의 장애
“프로젝트 <듣다>는 듣는 것에 어려움이 있어 보는 감각이 발달한 사람, 보는 것에 어려움이 있어 듣는 감각이 발달한 사람, 그리고 듣고 보는 감각이 함께 하는 사람들이 모여, 시각예술, 사운드아트, 몸의 움직임을 통해 ‘듣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탐구하는 작업이다. (중략) 이 작업 속에서 ‘장애’는 새로운 시각이 되고 표현언어가 되었다.”
– 노경애 아트엘 대표·안무가, <낯선 조우의 순간, 장벽이 걷힌다>(웹진 [이음] 5호(2019.6.)) 중에서
2018년부터 서로 다른 감각의 상태에 놓인 작가들과 함께 <듣다> 프로젝트를 진행해온 노경애 작가의 글은 장애를 결여가 아닌, 자기표현의 가능성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참여 작가들의 인식과 관점을 충실히 담아낸다. ‘장애’라는 단어는 ‘막을 장(障)’에 ‘거리낄 애(礙)’를 붙여 만든 한자 조어인데 이처럼 단어가 지닌 부정적 의미, 즉 ‘순탄함을 방해한다’는 의미는 ‘할 수 있음(ability)’에 반한다는(dis-) 의미로 구축된 영단어 ‘disability’에서도, ‘신체(Körper)’라는 단어와 ‘방해(Behinderung)’라는 단어를 합성시켜 장애의 의미를 발생시키는 독일어 단어 ‘Körperbehinderung’에서도 예외 없이 나타난다. 그렇다면 긍정성을 막거나 거리끼거나 부정하거나 훼방하는 것으로서 장애를 포박해온 대립적 도식에서 벗어나, 그 자체로 긍정성을 획득할 수 있는 장애란 어떤 조건 안에서 가능한 것일까. 더 나아가 장애 예술과 장애 담론은 그와 같은 대립적 도식이 오랫동안 불러온 위계의 질서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이 같은 질문을 떠올리며 <듣다> 프로젝트의 진행 여정을 되짚어보자 흥미롭게도 오랜 시간 서로 다른 몸의 상태에 축적되어온 서로 다른 몸의 경험이 그 자체로 작가 개개인의 예술적 표현을 가능케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어쩌면 김원영 작가가 공저 『사이보그가 되다』에서 언급한 것처럼, 흔히 ‘장애와 비장애’라는 표현으로 일컬어지는 서로 다른 몸의 상태를 ‘똑같음(sameness)’으로 환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와 같은 다름의 상태 사이에서 가능할 수 있는 ‘동등함(equality)’에 대한 예술적 고민 내지는 실천이 아닐까 싶다. 그런 점에서 <듣다> 프로젝트에 있어서 장애가 갖는 의미란 예술가와 예술작업을 매개하는 각각의 특정하고도 고유한 감각 방식에 다름 아닐지도 모른다.
나에게 듣기란 무엇인가
<듣다> 프로젝트의 참여 작가들은 지난 3년간 ‘나에게 듣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부터 출발해, 워크숍과 리서치, 그리고 대화의 과정 안에서 소리와 형태, 소리와 몸, 소리와 언어, 소리와 공간 등의 관계를 탐색해나가는 방식으로 작업을 이어왔다. 그와 같은 과정을 지나오며 비교적 ‘소리’와 ‘듣는 것’에 한정되어있던 프로젝트 초반의 관심사는 점차 ‘청각적 듣기’와 ‘시각적 듣기’로, 더 나아가 서로 다른 감각들이 교집하는 지점에서 경험되는 ‘공감각적 듣기’에 대한 관심으로까지 확장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프로젝트의 지향점이 단순히 청각, 시각, 촉각 등 서로 다른 감각의 상태를 연결 짓거나 한 곳에 배열해놓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참여 작가들은 각자에게 익숙한 듣기 방법들을 공유함으로써 어떤 이유에서 그와 같은 방법에 대해 ‘듣기’라고 명명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견을 나누며, 동시에 자신만의 듣기 방법을 다른 참여 작가들과 공유 가능한 방식으로 작업화하고자 힘썼다.
가령, 청각장애를 가진 시각예술가인 김은설 작가는 프로젝트 첫해에 자신이 평소 소리 이미지를 떠올리던 방식으로부터 모두가 함께 사유해 볼 수 있는 질문을 다음과 같이 도출한 바 있다.
“청각장애를 가진 저는 한 사물을 보고, 그 모양이 꼬물거리고, 복잡한 무늬가 반복되고 하는 그런 모양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소리 이미지가 떠오르는데. 여러분도 그렇게 느끼나 궁금했고, 이것도 ‘소리를 듣는다’라고 할 수 있는지 궁금했어요.”
– 김은설 시각예술가, <듣다 1> 프로그램북, 39쪽
이 같은 궁금증으로부터 작가는 ‘촉감으로 소리를 느껴보기’ ‘사물의 거리감을 눈으로 소리 듣기’ 등을 주제로 한 워크숍 진행 방식을 고안해냈다. 이처럼 (귀로) 듣는 것을 넘어서서 만지거나 봄으로써 사물의 소리를 감각할 때, ‘듣는다’는 행위는 ‘소리에 대한 상상’의 경험으로 확장되고, 눈과 손, 피부 등은 바로 그와 같은 상태를 매개하는 일종의 ‘상상적 청각기관’으로 재발견된다.
이러한 과정은 곧 참여 작가 개개인의 몸에 저장되어있는 감각의 근원을 재감각해보는 혹은 객관화해보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 바로 그 지점에서 예술교육을 예술작업으로부터 분리하는 대신에 예술교육의 의미 자체를 “지식이나 기술을 가르치거나 습득하는 방식에서 더 나아가, 서로의 경험을 공유하고 생각을 교류하는 방식”(<듣다 2> 프로그램북, 55쪽)으로 전환하고자 하는 프로젝트의 방향성 또한 가늠해볼 수 있다. 장애 여부가 가르침의 주체와 대상을 결정하는 기준이 되는 대신, 참여 작가들 각자가 가르치면서 동시에 배우기도 하는 시간 속에서 동료 작가의 감각을 상상해봄과 동시에 자기 자신의 감각을 이전과는 다르게 경험해보는 것이다.
만약 특정 장애를 지닌 신체로 감각의 중심을 옮겨본다면, ‘비장애’라 일컬어지는 몸의 상태는 이를 경험해본 적 없다는 점에서 즉시 어떠한 감각적 결여나 결핍의 상태에 놓이게 된다. 서로 다른 몸들의 동등함에 대한 가능성은 바로 이 같은 방식의 결여 혹은 차이를 자각하고 인지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점에서, <듣다> 프로젝트를 통해 구현되는 예술교육이란 장애와 비장애 사이에 놓인 ‘非(비)’의 부정적 의미를 중립적으로 재고하고자 하는 것에 그 지향점을 둔다고 할 수 있다.
소리와 언어
올해 진행 중인 <듣다> 프로젝트에는 공연예술, 시각예술, 영상예술, 사운드아트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 중인 작가들(위성희, 김은설, 고아라, 원하라, 전경호, 박찬별, 안마노, 오로민경, 해미 클레멘세비츠(Rémi Klemensiewicz), 노경애)이 참여하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지난 3년간의 프로젝트가 ‘나에게 듣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했던 반면, 올해는 ‘소리와 언어’라는 주제를 프로젝트의 시작점으로 삼아 5월부터 7월까지 주제와 관련한 워크숍 및 공동 리서치가 진행되었다. 그 결과, 다른 작가들과 개별 경험을 나누는 동시에 자신의 경험을 객관화하는 과정에서부터 출발했던 이전의 리서치 방식과는 달리, 올해 프로젝트는 워크숍 형식 안에서 언어와 소리에 관한 작업을 먼저 시도한 후에 그에 대한 작가 개개인의 경험이나 생각을 자유롭게 나누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워크숍은 크게 전경호 작가의 점자 워크숍, 안마노 작가의 타이포그라피 워크숍, 권병준, 배인숙 작가의 사운드 워크숍 등으로 나뉘어 진행되었으며, 워크숍과 공동 리서치가 마무리된 올 하반기에는 개별 리서치가 이어지고 12월 중순에는 작가들의 리서치 결과물을 바탕으로 한 발표회가 개최될 예정이다.
그동안 <듣다> 프로젝트가 들리는 소리, 보이는 소리, 만져지는 소리 등 ‘듣다’라는 행위의 대상이자 매개인 소리에 대해 다양한 방식의 감각하기를 시도했던 반면, 4년 차에 접어든 올해 ‘언어’라는 주제에 보다 깊이 천착하게 되었다는 점은 여러모로 흥미롭게 다가온다. 지금껏 청각장애, 시각장애, 비장애 등 서로 다른 몸의 상태를 서로 다른 듣기를 가능하게 하는 계기이자 조건으로 바라봐온 작가들에게 있어 이 같은 다름의 상태는 자신만의 예술작업을 가능케 하는 표현언어에 대한 은유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 프로젝트에서는 이처럼 메타적 층위에서 몸과 언어의 관계를 사유하기보다는 실제 서로 다른 몸의 상태가 요청하는 언어의 형태 혹은 읽기/쓰기의 방식을 작업의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언어의 구성요소에 다가가는 방식을 보다 다양하게 실험해본 것이다.
일례로, 작가들은 전경호 작가의 점자 워크숍과 안마노 작가의 타이포그라피 워크숍 참여 이후에 이 두 워크숍을 결합한 방식의 <점자로 해보는 타이포그라피> 워크숍에 참여했는데, 이때 작가 개개인은 가로 두 칸, 세로 세 줄 총 6점(온점)으로 구성된 점자를 소재로 삼아 타이포그라피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글자의 배치’를 창작해보았다. 여기서 이루어진 다양한 그래픽적 시도들, 특히 상대적으로 점자 읽기에 익숙한 시각장애 작가들과는 달리, 점자를 철자에 상응하는 일련의 기호로 인지하는 습관에서 벗어나 있는 비시각장애 작가들이 보여준 점자 해석을 통해 매우 흥미로운 작업의 가능성을 발견하기도 했다. 가령, 청각장애 무용가인 고아라 작가는 총 6점 안에서 구현되는 일반적인 자모음의 구조에서 벗어나, 온점 자체를 하나의 점으로 상정함으로써 점자 표기의 영역을 확대하는 방식의 독창적인 점자-타이포그라피를 시도한 바 있다.
피드백 고리
<듣다> 프로젝트에서의 ‘듣다’는 배제의 반대말로, 그 바탕에는 포용과 확장과 공감의 정서가 흐른다. 그것이 가능할 수 있는 이유는 ‘듣다’를 ‘듣기’로만 한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프로젝트 전반의 디렉팅을 담당해온 노경애 작가는 ‘소리와 언어’를 주제로 한 작가들과의 대화에서 청각적인 언어, 시각적인 언어, 촉각적인 언어에 대해, 글자, 문자, 말투에 대해, 말하기와 쓰기에 대해 사소하거나, 포괄적이거나, 보편적이거나, 특수한 질문들을 건넨다. 그리고 그와 같은 질문들은 이어지는 질문, 피드백, 제안을 매개한다. 이처럼 서로가 서로를 매개하는 <듣다> 프로젝트의 연구, 창작, 예술교육 환경 안에서 프로젝트 초기부터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참여 작가들 안에 소통의 방식으로 자리 잡은 피드백 고리(Feedback Loop)가 아닐까 싶다. 작가들에게 있어 서로의 시도와 실험에 대한 피드백 주고받기는 앞서 언급한 바대로 각자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을 교차적으로 경험하는 시간 속에서 그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서로 다른 감각 상태가 교차하는 지점을 예술작업의 시작점으로 삼고자 하는 <듣다> 프로젝트의 지향점은 더욱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비장애인들은 감각하고 인지할 수 없는 장애 작가들의 감각과 인지를 통해 우리는 새로운 예술작업들을 실험하고 이것이 또한 예술교육이 되게 하고자 한다.”
– <듣다> 프로그램북, 55쪽
손옥주
손옥주
공연학자. 베를린자유대학에서 연극학, 무용학 전공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이후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무용 오리엔탈리즘에 관한 포스트닥터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하였다. 현재 학술 연구와 동시에 리서치 파트너, 드라마터그로 공연 현장에서의 활동도 이어가고 있다. ‘춤의 감수성과 문학적 상상력은 서로 맞닿아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오늘도 춤을 닮은 글을 쓰기 위해 노력 중이다.
okjuson@gmail.com
영상_박영균 영상작가 infebruary14@naver.com
사진제공_ 아트엘 https://artel.imweb.me/ [듣다 Listen / Hear] 페이스북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