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느닷없이 우리를 찾아온 거리두기의 시간은 해가 바뀌고도 여전하다. 만나지 않고 모이지 않아야 한다는 갑작스러운 시대적 요구 아래, 비대면과 언택트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문화예술교육 현장에 들이닥쳤다. 개념조차 생소했던 화상회의, 1인용 교육키트, 영상으로 제작한 프로그램과 원격교육 등 다양한 미디어를 활용한 여러 대안을 접하고 연구하며, 어떤 면에서는 문화예술교육 현장이 조금 더 다채로워졌는지도 모르겠다. 비록 그것이 우리 각자의 자유로운 선택이라기보다는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수용이었을지라도 말이다. 이 과정에서 대면과 비대면, 만남과 거리두기에 대한 본질적인 고민이 대두되었다. 특히나 거점 공간을 세우고 유지하며, 대면과 만남을 통해 지역의 일상 깊숙이 들어가는 활동을 해오거나 고려하는 단체라면 그 고민이 한층 더 컸을 것이다. 아울러 문화예술의 지방분권이 본격화되며 지역이 주체가 되는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시점에서, 일상 속 거점 공간의 역할과 방향에 대해 고민해보아야 하는 이유는 충분하다. 이에 성남시 태평동의 골목 안에서 6년째 ‘열린 공간(오픈스페이스)’을 유지하고 있는 오픈스페이스 블록스(open space BLOCK’s, 이하 블록스)를 직접 방문하여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기획자와 예술가 부부의 시작
블록스의 시작은 2016년, 성남문화재단 마을공간 조성사업에 선정되면서부터다. 혹은 그 이전, 이돈순 작가와 김은영 기획자가 거주하던 태평동 주택의 1층이 공실이 되면서 자연스레 그 자리에 복합문화공간을 기획하며 시작되었다.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아버지 대부터 성남 토박이로 성장하고 지역에서 미술교육을 받아 작가 활동을 펼쳤으며 성남에서 공공미술 활동에 참여해온 이돈순 작가, 기업에서 오래 활동했던 김은영 기획자, 두 사람의 오랜 고민 끝에 시작된 것이기도 하다.
이들은 본디 피아노 교습소였던 1층을 블록스 공간으로 삼아 리모델링하여 윈도우갤러리처럼 만들었다. 골목을 향해 커다란 유리창을 내어, 안에서도 밖을 훤히 바라보고 밖에서도 내부를 쉽게 들여다볼 수 있도록 했다. 전시만이 아니라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하고, 다과를 나누거나 네트워킹을 할 수도 있는 공간이 만들어졌다. 이 작은 공간에서 다양한 기획이 세상으로 나왔다. 대표적으로는 2017년부터 2019년까지 이어진 프로젝트 <에코밸리커튼>(문화가 있는 날 지원사업), <팝업아트 성남>(성남시 공공미술 지원사업, 2020), <아트 매치-매시업>(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21) 등이 있다. 그 외에도 주민이 스마트폰으로 태평동을 촬영하고 나아가 기술적 접목을 시도한 <스마트폰으로 본 세상_태평동>(2017), 지역의 공공예술 작가와 주민이 함께하는 골목 축제를 모티브로 한 <태평 십시일반>(2020)과 같은 프로그램들이 블록스의 색채를 잘 보여준다.
비교적 짧은 시간 내에 성장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뿌리는 오래되었다. ‘블록스’라는 이름부터가 지역에 대한 오랜 관찰과 고민을 담고 있다. 광주대단지 사건(주1)이라는 지역의 역사를 고려하여, 당시 이주민이 집을 지을 때 기틀이 되었던 ‘블록’에 주목한 것이다. 블록은 구조물을 구성하는 최소 단위이지만 함께 힘을 모으면 완성체를 만들어갈 수 있는데, 블록스 또한 이처럼 함께 하는 플랫폼이 되고자 하는 의지를 담고 있다.
일상에서 동네에서, 발견하는 이야기
앞서 소개한 여러 프로젝트와 프로그램을 매개로 하여 지역 주민과 지역 예술가, 단체가 함께 하는 폭넓고 느슨한 연대가 블록스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열린 공간’이라는 취지를 충실하게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너무나 당연한 지점이지만, 골목 안에 거점 공간을 설립하는 것은 단지 준비 작업일 뿐이다. 거점 공간만으로는 주민과 함께 하는 문화예술교육이 시작되지 않으며, 나아가 유지와 지속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공간을 확보하고 좋은 기획을 세웠더라도 모원의 어려움이나 지역 내의 경계심, 배타적인 태도로 인하여 정작 프로그램을 실행하기도 전에 지치고 소진되어버리는 모습도 현장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지역의 예술가나 단체들과 다양하게 손을 맞잡는 일도 마찬가지로 까다롭기 그지없는 작업이다. 그렇다면 블록스는 어떻게 해서 지역 안에 녹아들며 열린 공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실천할 수 있었던 것일까.
블록스와의 긴 이야기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렇다: 시간과 노력.
그래, 결국은 그런 것이다. 우선은 시간을 생각해본다. 블록스가 지금의 공간에서 문을 연 이래로 6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블록스의 두 대표는 실제로 골목에 거주했고 거의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열린 공간이라는 블록스의 정체성을 굳혀갈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블록스의 두 대표는 골목의 예술가이고 기획자이며 단체인 동시에 골목의 주민이 되었다.
그래, 결국은 그런 것이다. 우선은 시간을 생각해본다. 블록스가 지금의 공간에서 문을 연 이래로 6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블록스의 두 대표는 실제로 골목에 거주했고 거의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열린 공간이라는 블록스의 정체성을 굳혀갈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블록스의 두 대표는 골목의 예술가이고 기획자이며 단체인 동시에 골목의 주민이 되었다.
예술가이며 기획자인 두 주민은 일상의 곳곳에서 변화를 위해 노력했다. 도둑맞을 거라는 주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골목길에 화분을 내놓고, 몇 번이고 다시 내놓고, 그 과정에서 우리의 골목에 초록이 필요하다는 공감대를 이웃 사이에 형성하고, 그렇게 일상의 풍경을 변화시켰다. 골목과 초록에 대한 블록스의 고민은 후일 <태평 십시일반>에서 마을의 농부나 옥상 정원 동호회와 함께 하는 행사로 발전했다. 또 다른 고민으로는 한여름의 태평동 골목을 걸으며 뙤약볕의 고통스러움을 몸으로 느꼈고, 이를 <에코밸리커튼> 프로젝트로 발전시켰다. 지역의 초등학교 학생들이 그린 그림에 영감을 얻은 작가들의 이미지를 현수막에 인쇄해서, 그 현수막들을 그늘막으로 활용하는 작업이었다.
3년 동안 진행된 <에코밸리커튼>은 블록스의 대표적인 기획이기에 조금 더 설명을 덧붙이자면, 블록스는 이 프로젝트에 참여할 초등학교를 섭외하고, 작가들을 섭외하고, 인쇄한 현수막을 좁고 가파른 골목에 설치하고, 이후 낡은 현수막을 철거하여 또 다른 콘텐츠로 제작하는 모든 과정과 이때 발생하는 민원에 대한 대응까지 맡아왔다. 하지만 2020년, 프로젝트 4년 차에 이르러서는 코로나 시국에 도저히 이어갈 수 없다는 판단으로 사업을 중도 포기하게 되었다. 3년의 일들, 그리고 4년 차의 결단에 이르기까지의 간략한 설명만으로도 그간의 노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거점 공간의 뿌리, 사람
현장 활동가라면 다 그렇듯, 블록스가 보내온 시간도 돌이켜보면 “고생하셨어요, 별별 사람들이 다 있군요” 하며 한숨을 짓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지금 생각해도 한바탕 웃음과 유머로 기억되는 순간도 있다. 현장은 힘들고 고단한 동시에 에너지를 충전시키고 우리가 지속해야만 하는 이유를 보여준다. 우리에게 눈물과 동시에 웃음을 주는 것이 현장인데,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현장의 사람들이다. 우리는 서로를 웃게 하고 울게 하는 존재인 것이다. 블록스를 버티게 해준 것도 결국은 사람의 힘이다.
김은영 기획자는 “작고 소중한 친구들”에게 깊은 감사를 보냈다. 블록스의 여러 프로젝트는 두 대표만의 힘이 아닌, 단단한 코어 조력자들 덕분이라는 것이다. 근처에 사는 이웃이나 프로그램 참여자라는 인연으로 출발했으나 이제는 친구이고 든든한 동료가 된, 마음으로 믿고 기댈 수 있는 소중한 친구들로부터 큰 힘을 얻는다고 했다. 제아무리 작고 끈끈한 동네라고 할지라도 모든 이웃을 동원하기란 어려운 법이다. 소중한 몇 명이 수십, 수백 명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기획자는 경험을 통해 믿는다.
이돈순 작가는 “이웃집에 가서 못을 박아주는 일”의 중요성을 말한다. 재개발, 도시재생이라는 민감한 이슈가 있는 동네에서 문화예술 활동을 하며 피치 못하게 빚어지는 갈등 상황을 해결하는 것은, 예술이라는 거창한 이름이나 권위가 아니다. 그보다는 손재주 좋은 이웃이 우리 집에 와서 못 하나 박아줬다는 고마움으로, 그 이웃이 벌이는 낯설고 어색한 변화들을 너그럽게 받아들여 주는 것이라고, 작가는 생각한다. 평소에 인사를 주고받는 이웃이 준비한 행사라니까 가서 들여다보기도 하고, 뭔가 도울 일 없냐고 물어봐 주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가 고민하는 문화예술의 여러 담론도 결국에는 동네에서 벌어지는 일이고, 사람 사이의 일이라는 것을 새삼스레 되새기게 하는 경험담이었다.
더 많은 거점을 위하여
지금까지 이루어낸 블록스의 성과들은 거점 공간을 기반으로 골목 안의 일상에 녹아들었기에 가능했던 작업이 대부분이다. 일상에 녹아들기 위해서는 시간과 노력이라는 땔감이 필요한데, 이 땔감은 다양한 방식으로 쌓여갈 수 있다. 블록스 또한 가장 블록스에 어울리는 행보를 고민하고 실천할 뿐이다. 김은영 기획자는 저마다 자신만의 방식을 찾아가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블록스를 시작한 초창기부터 주민자치회의 일원으로서 활동해왔고 덕분에 좀 더 빠른 속도로 골목의 이웃으로 받아들여진 것 같습니다. 주민자치회 활동에서 보람도 느끼고 있고요. 하지만 지역에서 활동하는 기획자라면 꼭 주민자치회에 가입해야 하는지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아요. 제가 살아온 경험이나 환경, 어느덧 장년에 접어든 나이 같은 조건들에서는 주민자치회 활동이 자연스러웠을 뿐이죠. 만약 제가 청년 기획자라면? 자치회의 성격이 다르거나 존재하지 않는 지역이라면? 그랬다면 좀 다른 방법을 통해 골목에 다가가지 않았을까요. 각자의 상황에 따라, 자신에게 적합한 방식을 통해 마을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고민하고 찾아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 김은영 대표, 기획자
각각의 지역에는 그에 맞는 방식이 있다는 김은영 기획자의 말에 덧붙여, 이돈순 작가는 주민을 대하는 문화예술 활동가의 태도를 고민한다.
“동네 이웃을 살펴보면, ‘주민’이라는 말로 통칭할 수 없는 다양성이 있습니다. 작가인 제가 보아도 감탄할 만큼 개성적이고 예술적이고 지적인, 배워야 할 분들이 존재해요.”
– 이돈순 작가
어떠한 경우라도 주민을 대상화하지 않고, 기획자나 예술가 스스로 주민이 되는 자세가 필요하다. 외부인이 아닌 나 스스로 주민이 되었을 때 비로소 눈에 보이는, 섬세하게 읽어낼 수 있는 동네의 풍경이 존재하는 것이다. 예술의 시작은 관찰이다. 일방적이고 타자화된 관찰이 아닌 동등한 눈높이에서의 관찰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2021년을 맞아 블록스는 예술과 기술 융합 지원사업의 일환인 <아트 매치-매시업>을 진행하고 있다. 코로나가 불러온 변화, 즉 온라인을 기반으로 한 예술 활동에 관한 관심이 골목 안 거점 공간에서도 뜨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 내 거점 공간은 의미가 있는가? 답은, 그렇다. 효율성을 추구하는 비대면 원격교육이 오히려 대면을 통한 교육 회복의 필요성을 보여주듯, 온라인 기반의 예술 활동도 (그것의 기술적, 이론적 성취와는 별도로) 오프라인 기반 거점 공간의 소중함을 일깨워줄 것이다.
블록스 안에서 우리가 비대면 기술을 이야기하고 세계를 걱정하는 동안에도, 골목을 지나가는 이웃은 창문을 통해 우리에게 눈길을 주고 마스크를 쓴 채로 들어와서 안부를 전한다. 그 어떠한 거대담론이나 화두도 일상과 유리되어 존재하지는 않음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우리의 골목이 멈추지 않는 이상, 다시 말해 일상이 흘러가는 한 우리에게는 만나고 대면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지금 이순간에도 각자의 방식으로 마을의 일상을 담아내고 있는 오픈스페이스 블록스를 비롯한 지역의 거점 공간에 지지와 응원을 보낸다.
주1: 지금의 성남, 당시의 광주에 서울 청계천 철거민을 비롯한 이주민을 위한 대단지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정부의 무계획적인 도시정책과 졸속행정으로 이주민의 생존권이 극도로 위협받게 됨에 따라 1971년 8월 10일, 이주민이 일으킨 항의 시위 사건이다. 이를 계기로 광주대단지가 ‘성남시’라는 지위로 승격되었다. 이 사건은 폭동, 사태, 투쟁 등 여러 평가를 거쳐 현재에는 ‘성남 민권운동’이라고 공식적으로 불린다.
- 박성진
- 작가. 미술과 문학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창작활동을 하는 한편 새로운 예술교육을 고민하고 실험한다. 앤솔로지 소설집 『안녕을 말하는 방법』(공저)에 참여했고 때때로 번역을 한다. 요즘의 관심사는 지역에 기반한, 일상 속 문화예술교육의 가능성이며 알투스(altus) 멤버들과 함께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parksungjin0314@gmail.com
https://instagram.com/altusla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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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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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의 일상, 그곳에서 시작되는 이야기
정말 너무나도 기대만점이네요
골목의 일상, 그곳에서 시작되는 이야기
정말 너무나도 멋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