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도 수많은 문화예술교육 지원사업은 새로운 대상을 ‘발굴’하고 그들을 ‘연구’하여 프로그램 계획에 반영하라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한다. 명시적으로 보면 이는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을 고민하는 예술가, 기획자의 입장에서 ‘대상’을 살피되, 그 ‘대상’을 둘러싼 주변, 환경과 관계 맺는 방식을 탐구하여 그 관점과 결과를 프로그램에 유기적으로 반영하라는 정책적 의도일 테다.
하지만 이러한 가이드라인은 사업계획서 속에 적용될 때 일종의 평면화된 대상에 대한 접근으로 치환되기도 하여 그 모순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설사 처음의 기획 의도는 달랐을지라도, 사업계획서에 ‘교육대상’으로 적시되는 순간, 가령 ‘생애주기별’ 같은 익숙한 정책 슬로건이나 용어가 곁들여져 설명되는 바로 그 순간, 이들 대상은 특정한 ‘집단’이 되고, 그 속에서 균질화되고 규격화되어 인식될 가능성이 내포된다. 이렇듯 정책과 예술이 만나는 지점의 역설적 모순성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상을 대상화하지 않고, 당사자성을 존중하는 방식을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까?
  • 홍예문 프로젝트
우리 동네 아이들이 궁금하다
인천 중구 신포동 일대, 개항장 중심에 자리 잡은 ‘꾸물꾸물문화학교’는 그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지난 10여 년간 꾸준한 실험을 지속해 왔다. 프랑스 유학 후 돌아온 커뮤니티 아티스트 윤종필 작가가 고향 인천에 터를 잡아 문을 연 후부터 이곳은 단순히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교육 공간의 의미를 넘어, 문화예술교육을 매개로 사람과 지역을 연결하는 ‘예술적 실행’을 추구한다.
10여 년 전 처음 시작되었던 ‘홍예문 프로젝트’에서부터 이러한 지향을 엿볼 수 있다. ‘동네 생활문화 버라이어티’라는 별칭으로 소개되곤 하는 홍예문 프로젝트는 2010년 당시 인천 중구지역 예술가와 초등학생들이 함께 동네를 느리게 걷는다는 모티브에서 출발하여 산보와 놀이를 통한 관찰의 과정을 거치며 우리 동네를 새롭게 발견해보자는 취지로 기획되었다. 왜 굳이 초등학생이었을까? 윤종필 교장은 귀국 직후 2000년대 초중반 ‘스톤앤워터’에서 문화예술교육을 처음 접하면서 주로 함께 호흡했던 이들이 초등학생이었기에 상대적으로 익숙했던 대상이었다고 겸손히 설명한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이미 기획단계에서 익숙함을 넘어 그들에 대한 ‘궁금함’을 가지고 접근했던 것이 여느 프로젝트와 다르게 보였다.
같은 신포동 지역에서 같은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자라는 아이들. 이 아이들이 바라보고 경험하는 동네도 똑같을까? 어른들의 기준으로 볼 때 골목이나 흙바닥에서 함께 놀 거리가 없어진 ‘우리 동네’는 그들에게 어떤 의미 혹은 이미지일까? 이것이 홍예문 프로젝트를 촉발한 원동력이었다. 그렇기에 아이들에게 놀이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 스스로 놀이의 의미를 발견하고 만들어 갈 수 있도록 하되, ‘지역예술가와 아이들이 만나는 장(場)’으로서의 문화예술교육을 꿈꿀 수 있었다. 그들은 파트너였고, 동반자였다. 함께 하는 실험 속에서 천천히, 느리지만 아이들만의 독특하고 개별적인 동네에 대한 기억을 만들어갈 수 있었다.
  • 우리동네고고씽 RPG_가을운동회
  • 우물쭈물잉여력 대폭발
천천히, 느리게, 함께
2011년부터 사용하고 있는 ‘꾸물꾸물문화학교’라는 이름 역시 이러한 배경을 품고 있다. ‘꾸물꾸물’은 중의적이다. 작은 애벌레가 움직이듯 천천히, 결과보다는 과정에 집중하여 함께하자는 뜻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조금 느리더라도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꿈을(꾸물)’ 함께 바라보고 이야기하고 같이 한발씩 성장하자는 의미도 포함한다. 지역에서 함께하는, 함께 할 이들을 그 ‘중심’에 놓고 이들의 시각과 관점에서 접근하겠다는 ‘예술적 선언’이자 ‘철학’을 그대로 담지하고 있는 셈이다.
홍예문 프로젝트는 이후 도시디자인-연극-사진 등 장르를 바꿔가면서 새롭게 재시도 되었고, 아이들은 장르를 매개로 동네를 또다시 낯설게 보면서 ‘자기만의 놀이’의 기억을 가질 수 있었다. 동네 놀이터에 나만의 아지트를 설치하기도 하고, 유적지인 홍예문을 우주인이 발견하는 이야기의 주체가 되기도 했다. 옛 사진 속 홍예문과 현재를 비교하며 지역에 대한 기억을 재구성하거나 동네 이웃 할머니에게 필요한 의자를 디자인하기도 했다. 다양한 실험적 과정에서 아이들은 단순히 프로그램 수업 참여 여부를 떠나 꾸물꾸물문화학교를 일종의 아지트이자 놀이 공간으로서 넘나들었다.
그렇게 4년, 5년을 거듭한 시간이 지났을 때 얻게 된 것은 바로 아이들과 예술가 사이에 넓고도 두텁게 형성된 ‘사회적 관계망’이었다. 처음부터 단순히 배우고, 가르치는 관계가 아니라 ‘함께 천천히 걷는 동반자’로서 관계를 설정했기에 가능했으리라 여겨진다. 학교를 졸업한 아이들과 예술가들은 이제는 동네 형 동생 사이처럼, 서로의 작업이나 고민을 함께하면서 단단해진 수평적 관계 맺음을 지속하고 있다. 어쩌면 바로 이것이 마을학교를 표방하는 꾸물꾸물문화학교가 일궈 낸 가장 주요한 성취가 아닐까.
정책과 사업의 틈새에서
초창기 꾸물꾸물문화학교는 자라나는 아이들의 시간과 속도에 발맞추듯 다양한 실험을 시도해왔다. 아이들이 훌쩍 성장해 중고등학생이 되었을 때는 지역의 동네 명소를 돌아다니는 롤플레잉 게임 ‘우리동네고고씽 RPG’를 함께 만들었다. 어느새 청년으로 성장하여 새로운 문화기획을 꿈꾸는 이들을 지역 청년활동가로 양성하는 ‘우물쭈물잉여력 대폭발’ 프로젝트도 시도했다. 일반 성인을 대상으로 했던 ‘생활의 발견’은 일상 속 사소한 살림살이부터 공간, 역사적 현장에 이르기까지 참여자 스스로 상상되고 유추될 수 있는 것들을 민속지로 만드는 일종의 지역 탐색형 학예연구 체험 프로그램이었는데, 당시 함께한 참여자는 이전 청소년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아이의 부모나 가족인 경우가 많았다.
꾸물꾸물문화학교가 이렇듯 대상에 관한 관심의 확장과 유기적 연계를 지속적으로 모색한 것은 어쩌면 전형적인 정책 지형을 벗어나 지역 속에서 커뮤니티 아트와 문화예술교육 간 접점을 찾고자 했던 소신과 철학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2019년 꾸물꾸물문화학교 10년을 자체 평가하는 토론회를 열었을 때, 이 자리에 발제자로 참여한 최혜자 문화디자인자리 대표는 “꾸물꾸물문화학교는 정책의 중심에서 벗어난 영역에서 이루어진 활동이다. 문화예술교육이 학교 중심으로 진행되고, 사회 영역의 문화예술교육마저 부처 간 협력사업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는 상황에 존재한 유일한 틈새에서 이루어진 실험이었다. 바로 지역사회에서 이루어지는 문화예술교육(지역사회 문화예술교육 활성화 지원사업 등)이라는 영역이었다.”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처음 홍예문 프로젝트에 함께 했던 초등학생 아이들이 대학에 진학하던 2016년을 기점으로 꾸물꾸물문화학교는 동네예술대학, 마을학교로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2017년 ‘우리동네예술대학’이란 콘셉트로 성인을 대상으로 한 목공&브리콜라주, 생활요리, 커뮤니티 판화, 일상드로잉, 사진, 도예, 차 등 다양한 커리큘럼을 기획하면서 중요하게 생각했던 원칙은 전문성 획득이 아닌 일상적 삶 속에서의 예술적 감각의 확장이었다. 특히 공들인 것은 지역에서 이미 오랫동안 활동해 온 다양한 분야 전문가와의 협업이었다. 윤종필 교장은 목수, 요리사 등 이들 동네 전문가들의 협업을 끌어내기까지 지난한 설득과정이 있었다고 회고한다. ‘문화예술교육’이라는 말을 처음 듣는 이들에게는 낯선 시도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 동네 지식인, 전문가들과 ‘문화예술교육’이 무엇인지, 일상 속에서 예술이 왜 필요한지 논의하고 공감을 획득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동네예술대학은 단순히 무언가를 배우고 가르치는 곳이 아닌, 함께 예술적으로 상상하면서 더불어 성장하는 곳으로 자리매김해 올 수 있었다고 한다. 더 이상 단순히 참여자, 예술가(혹은 예술교육자)로 이원화되는 것이 아닌, 이들 모두가 예술적 상상력의 주체로 스스로를 인식하고 성장할 수 있는 예술적 실천의 장으로서 꾸물꾸물문화학교의 지향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 우리동네예술대학_목공&브리콜라쥬
  • 우리동네예술대학_커뮤니티 판화
시작은 결국 사람
지역 아이들의 성장과 더불어 단단하게 걸어온 꾸물꾸물문화학교는 지금 또 다른 예술적 실천을 위한 실험을 진행 중이다. 오랜 터전인 인천 중구를 벗어나 송도지역에도 분원(연수캠퍼스)를 내어 그곳을 살아가는 이들의 일상과 삶은 또 어떻게 다른지 궁금함을 가지고 다양한 예술적 실험을 시도하고 있다. 또한 작년에 이어 올해도 연수문화재단과 함께 신중년을 대상으로 한 문화예술교육을 준비하면서, 아직 미처 경험하지 못한 세대를 이해하기 위한 조용한 ‘관찰’ 역시 진행 중이다. 이들의 앞으로의 행보가 자못 궁금해지는 것은 초기 행보에서 보여왔던 꾸물꾸물문화학교만의 소신과 철학이 ‘사람’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커뮤니티 아트와 문화예술교육의 접점을 통해 지역 속에서의 문화공동체 실현을 모색해 온 꾸물꾸물문화학교. 이곳을 이끄는 윤종필 교장에게 있어 문화예술교육은 우리 동네와 지역에 살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을 실제적으로 만나고 이해하기 위한 핵심적 매개이자 일종의 ‘수단’이다. 그러나 잠깐, 여기서 ‘수단’이라는 말에 멈칫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문화예술교육이 예술적 상상을 통해 좀 더 나은 삶을 꿈꾸는 것이라면, 꾸물꾸물문화학교가 표방하는 지향과 그간 일궈 온 궤적은 바로 이러한 문화예술교육의 시작이 결국 ‘사람’에서 비롯되어야만 가능할 수 있음을 한결같이 일깨워 주고 있으니까 말이다.
최보연
최보연
정동극장, 아트선재센터, 세종솔로이스츠에서 공연기획을 경험했다. 예술행정과 문화정책을 공부한 후 한국문화관광연구원 부연구위원으로 일하면서 정책연구자로서 이력을 갖게 되었다. 정책의 한계와 가능성 간의 줄다리기 균형 탐색을 업보로 생각하고, 지금은 상지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에서 학생들과 함께 호흡하며 얻는 자극과 배움을 더 사랑한다. 본지 편집위원.
philoarts@gmail.com
사진제공_꾸물꾸물문화학교 https://www.facebook.com/ccs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