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미적 인간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영유아를 비롯한 어린 시민 안에 내재한 내면의 야성(inner wildness)을 끌어내는 예술교육이 필요하다. 그런 예술교육은 미디어가 재현하는 ‘편집된’ 야생 프로그램을 소비하며 대리 만족해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the real)의 세계를 향해 발걸음을 떼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2008년부터 문화체육관광부-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시범사업으로 시작된 유아 문화예술교육은 2019년부터 17개 시·도 지역문화예술교육센터와 협력하여 지역 내 고유한 문화시설 자원을 활용한 문화예술교육으로 개편되었고, ‘아이와락(樂)’이라는 슬로건을 표방하고 있다. 2020년 3월부터 시행된 영유아들의 놀 권리와 놀이를 통한 즐거운 배움을 강조한 개정 누리과정에 따라 만 3~5세를 대상으로 한 유아 문화예술교육은 ‘아이 중심·놀이 중심’의 예술교육 영역을 향한다. 그러나 현장은 여전히 교사 중심·학습 중심의 교육이 적지 않고, 코로나19 시대 키트(kit)를 비롯한 교구재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경향이 높다. 키트 자체가 문제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질문’을 담은 키트 활용이 너무나 적다. 영유아가 탐색, 표현, 감상을 통해 정서지능 내지는 문화적 감수성이 높은 어린 시민으로 탄생하고, 어린 미적 인간으로 성장하는 예술교육이 어떻게 가능한지 우리는 묻고 또 물어야 한다.
섬세한 이해와 숙성의 시간
제주춤예술원은 2012년 단체 설립 이후 ‘엄마 뱃속 요람에서 무덤까지 춤추는 삶’이라는 모토 아래 인간 본연의 움직임과 생태미학을 결합해 소우주인 인간과 생태로서의 춤을 연구하며 창작과 예술교육 활동을 해오고 있다. 김미숙 제주춤예술원 대표는 제주의 자연에서 정형화된 춤이 아니라, 자연과 몸이 하나 되어 ‘스스로 되는 춤’을 위주로 한 예술교육을 하고 있다. 영유아, 성인, 신중년, 어르신 등 만나는 대상의 당사자성을 십분 존중하고 생명의 가치를 존중하며 ‘살림이스트의 춤’을 고집한다. ‘엄마’ ‘제주’ ‘우주’ ‘결춤’ 그리고 꾸준한 ‘학습’ 같은 키워드는 제주춤예술원 김미숙 대표를 설명하는 단어일 것이다. 최근 영유아에서부터 신중년을 포함한 어르신에 이르기까지 예술교육의 대상이 대폭 확장되었지만, 새로운 지원사업의 장르로 생각하려는 태도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제주춤예술원 움직임 수업에는 특별한 무엇인가가 있다. ‘학습’과 ‘공부’를 중시하며 특히 만나는 대상에 대한 섬세한 이해를 강조하는 단체의 가치지향에서 찾을 수 있다. 2020년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동료들과 함께 260여 쪽에 달하는 연구 보고서 「춤추는 배냇저고리 프로젝트」를 발간한 것은 그 생생한 실체이다. 2020년 제주 지역특성화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으로 진행된 이 연구 보고서에는 무려 42회에 달하는 연구 회의를 비롯해 심층 생태학 관련 리서치, 역량강화 워크숍, 철저한 선행 연구 과정이 잘 녹아 있다. 이러한 연구 활동을 통해 영유아를 비롯한 대상에 대한 구체적이고 섬세한 이해를 꾀하려 하는 김미숙 대표의 집요한 고집이 행간에 잘 묻어난다. 올해 제주 지역특성화 문화예술교육 사업으로 진행하는 <배리웰맘>은 2015년 <맘마미아> 선행 연구를 시작으로 <유·母·차>(2016), <유母차와 세발 㤵전거>(2017), <유모차와 레이디카>(2018), <춤추는 배냇저고리> 프로젝트(2019,2020)를 거친 심화·확장 과정이라는 점을 이해하게 된다. 다시 말해 프로그램이 아니라 ‘프로젝트(project)’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김미숙 대표가 “시간의 흐름이 중요하다. 최소 3년은 숙성시키려 한다.”라고 말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타인을 위한 나, 나를 위한 나
올해 진행하는 <배리웰맘>은 임신, 출산, 육아 경험이 있는 30~60대 여성을 대상으로 한 통합예술교육 프로그램이다. 지난해 진행한 <춤추는 배냇저고리> 프로젝트를 이으면서도 조금 다르게 변주했다. 원래 임산부를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이었으나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영유아 모집 자체가 어려워 교육 대상을 바꾸었다. 하지만 프로그램은 간단하지 않다. 움직임을 기반으로 하되 퍼머컬처(Permerculture)를 비롯해 제주 신화 워크숍 등 여러 형식들이 통합된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여러 장르 간 이음새 또한 자연스럽다.
지난 5월 제주 조천읍 선흘리 동백동산에서 진행된 프로그램을 찾았을 때 참여자들은 흐린 날씨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춤 리듬으로 동백동산 소류지를 산보하며 타인을 위한 ‘나’ 이전에 ‘나’를 위한 나로 만나고자 일종의 마음 재계(齋戒)하는 ‘결춤’을 추었다. 왜 나를 위한 나인가.
“우리 각자가 제 자리에 잘 서는 것, 나 자신으로 중심을 잡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야 타인을 위한 프로그램 공급자가 되지 않죠.”
– 김미숙 제주춤예술원 대표
그의 예술교육 철학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스스로 설 줄 알아야 나란히 설 수 있다. 이 말은 결국 나의 자립(自立)이 이루어져야 너와의 연립(聯立) 또한 가능하다는 점을 풀이한 말이다. <배리웰맘>이 2015년부터 지금까지 지난 시간의 경험과 고민이 응축된 프로그램이라는 점은 여기서도 확인된다. 영유아를 대상으로 하는 예술 수업에서 움직임은 왜 중요한가.
“아이의 기운은 ‘발’에 있습니다. 발은 제2의 심장이거든요. 나이가 들수록 (기운이) 입으로 올라가지요.”
지금은 스스럼없이 ‘제주의 딸’을 자처하는 김미숙 대표이지만, 처음부터 대상에 대한 이해를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 무대에서 구덕(바구니)을 안고 해녀 복장으로 공연을 했는데, 어느 관객이 “테왁(뒤웅박) 한번 짊어졌수광?” 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후 김 대표는 자신이 제주의 딸이라는 점을 깊이 생각했다. 영유아와 엄마들이 참여하는 프로그램에서 반드시 삶의 기반이 되는 제주 자연에서 움직임 활동을 하고, 제주말을 십분 활용하며, 단동십훈(檀童十訓)을 비롯한 한국 전통육아법을 예술교육적으로 해석하고자 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 고민의 과정에서 나온 춤이 생태적 몸의 관점에 기반한 ‘결춤’이다.
“하늘이 지붕인 제주 자연에서 아이들과 함께 움직임 활동을 합니다. 아이는 엄마를 따라 하며 세상을 배우죠. 한번은 엄마에게 아이의 행동을 무조건 따라 해보라고 한 적 있습니다. 그때 대부분 엄마가 아이를 진지하게 관찰한 적이 없다는 점을 깨달았어요.”
어쩌면 영유아는 그런 움직임 활동에서 소위 자기 효능감을 발휘한 것이리라. 아이들은 놀이에서 시작해 춤을 춘다. 그런데 코로나19 시대 아이들은 미디어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며 ‘탈’자연화하고 있다. 혹자는 영유아를 비롯해 지금의 아이들에게 스마트폰, 텔레비전, 게임 같은 미디어는 ‘초강력 또래’(super peer, 크리스 메리코글리아노)가 되었다고 단언한다. 실제 육아정책연구소가 펴낸 「2019 영유아 주요 통계」를 보면 3~9세 아동은 대부분 영화, 텔레비전, 동영상 시청을 위해 스마트폰을 이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스마트폰 의존도와 키즈 산업은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더 높아진 것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이른바 2010~2024년 출생 세대를 의미하는 알파 세대야말로 스마트폰 과의존 위험군인 셈이다.
아이들이 미디어에 절대 의존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자연 상태에서 삶에 필요한 삶의 기술을 배우고 익힐 기회를 박탈당한다는 것을 뜻한다. 갈수록 아이들의 내면이 자연이 없는 텅 빈 공간처럼 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나의 억측만은 아닐 것이다. 김미숙 대표가 유아 문화예술교육에 대해 “예술적 자극을 주는 수업이 못내 아쉽다”라고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다시 말해 아이 중심, 놀이 중심을 강조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유아 문화예술교육 현장은 그럴듯한 결과물을 내는 활동 위주의 교사 중심, 학습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영유아 문화예술교육의 질적 도약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다시, ‘또맘’의 마음으로
김미숙 대표가 영유아·엄마가 함께하는 프로그램에서 제주 자연을 고집하려는 것은 충분한 설득력이 있다.
“요즘 아이들은 작은 사각형(스마트폰) 안에 갇혀 있죠. 그런데 그런 아이들도 두꺼운 매트를 깔고 움직임 수업을 하면 곧바로 집중합니다. 그 다음 수업부터는 아이들이 제 안방처럼 활개를 칩니다. 자연에서 잘 놀고 잘 살던 아이는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을 의식하게 됩니다. 타인을 의식한다는 것은 결국 외향적인 것에 관심 갖는다는 것이겠죠.”
제주춤예술원이 제주의 자연, 장소성, 역사성을 강조하고, ‘생태춤’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며 현장에 적용하려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셈이다. 좀 거창하게 말하자면, 코로나19 시대 예술교육은 ‘사색에서 기도로’ 방향전환을 하며 자연과 지구를 생각하는 공심(公心)을 회복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제주춤예술원은 2016년 <유·母·차> 프로그램 이후 줄곧 생태적 가치를 중요시한다. 지난해 42회에 걸친 연구 회의에서 움직임 수업과 지속가능한 농업을 생각하는 퍼머컬처의 가치를 접목하는 연구에 집중한 것도 그 때문이다. ‘또맘’(again MOM, Mind of Mother)의 마음으로 ‘먹고 심고 사랑하라’라는 가치를 표방하는 퍼머컬처와 움직임을 결합하면 어떤 예술교육이 펼쳐질지 기대된다. 이처럼 김미숙 대표가 자기 진화를 위한 질문을 계속 던지는 것은 코로나19 시대 더 이상 얕은 생태학이 아니라 깊은 생태학의 필요성을 절감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제주 여신(女神) 신화를 비롯해 구덕, 어멍 같은 제주 사투리를 십분 활용해 지역 가치를 강조하고자 한 것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제주춤예술원 움직임 수업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또 있다. 전체 수업이 열기-풀기-품기-닫기 과정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는 점이다. 통합 예술교육을 표방하지만, 장르 간 연결이 자연스럽지 못한 현장이 적잖은 현실에서 여러 장르 간 자연스러운 이음 과정은 제주춤예술원의 특장(特長)이 아닐 수 없다. 마냥 쉽지 않았다. 김 대표 또한 도제식 수업을 위주로 한 무용 수업에 익숙한 나머지 하던 대로 하던 관성이 굳어져버렸기 때문이다. 지난 5월 참관한 수업은 강정심 참여자가 「지금 인연 된 이들에게」라는 글을 읽는 ‘시소(詩少)’의 시간으로 마무리되었다. 매우 자연스러웠다. 시소는 시 같은 소박한 글귀를 참여자들이 공유하는 의례(ritual)의 시간이다. 강정심 참여자는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나오는 저 유명한 ‘호곡장(好哭場)’ 편을 소개하며, “아이를 낳을 때 엉엉 운 적이 있습니다. 통곡(痛哭)은 나와의 합일이 아닐까요?”라고 소감을 적었다. 그런 ‘또맘’의 마음이 모여 파괴된 자연을 살리고, 나 자신과 아이들을 살리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배리웰맘>은 엄마를 위한, 엄마에 의한, 엄마들의 공동체를 구상하는 프로젝트의 의미를 갖는다. 어느 때보다 돌봄 가치가 중요한 이 시절, 시장에 모든 것을 아웃소싱(outsourcing)하는 방식이 아니라 지역에서 인소싱(insourcing)하며 일종의 ‘확대가족’의 가능성과 가치를 구현하고자 하는 예술교육 프로젝트가 필요하다. 정부는 ‘모두가 누리는 포용적 복지국가’를 표방하며 유아에서 대학까지 교육의 공공성 강화를 국정과제로 선정했다. 코로나19 시대 예술교육은 영유아를 비롯한 아이들을 어린 시민 또는 어린 미적 인간으로 길러내야 한다. 문화의 핵심 요소는 후세대에게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다. 코로나19 시대, 우리는 영유아를 비롯한 아이들에게 어떤 지식과 문화를 전달해야 할지 선택하고 실천해야 한다. 대상에 대한 깊은 이해 과정은 필수적이다.
김미숙 대표는 내년에는 안식년을 갖고자 한다. 다시 ‘심장이 뛰는 대상’을 만나 즐겁게 예술교육을 하기 위해 심층 생태학과 움직임의 접목 가능성을 공부할 작정이다. 김미숙 대표와 대화하다 보니 문화인류학에서 말하는 ‘할머니 가설’(Grandmother Hypothesis)이 떠올랐다. 할머니 가설은 문화의 발생을 설명하는 가설로서 코로나19 같은 재난의 시대에 영유아를 비롯한 모든 사람에게 돌봄의 가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잘 말해준다. 김미숙 대표는 지금, 영유아를 비롯한 엄마 참여자들에게 ‘꽃씨’를 퍼뜨리고 있다. 그 꽃씨에서 발아하는 어린 미적 인간의 탄생과 성장을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 고영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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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웹진 [아르떼365] 편집위원. 경기문화재단 전문위원을 지냈으며, 경희대 실천교육센터 운영위원, 춘천문화재단 [POT] 편집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삶의 시간을 잇는 문화예술교육』 『인문적 인간』을 비롯해 『자치와 상상력』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입니까』(공저), 『생애。전환。학교』(공저) 등을 펴냈다.
gocritic@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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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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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곳에서 많이 듣고 응원도 드렸지만 직접 찾아가서 뵙지는 못했네요.
글을 읽으면서 선생님의 깊은 울림을 느낄 수 있어서 너무 좋네요.
제주춤예술원 응원합니다.!!!!1
안녕하세요 오상운 독자님, 글에서 김미숙 선생님의 깊은 울림을 느끼실 수 있었다고 하니 저희도 감동입니다!
응원의 말은 김미숙 선생님께 잘 전달드리겠습니다 🙂
제주춤 예술원 기사를 보고 지역문화예술교육기관의
좋은 예를 볼수있어좋았습니다.
제주라는 풍부한 자연자원을 활용해 어린아기부터 엄마,그엄마의 엄마에 이르기까지 전세대를 아우르는 확장을 볼수있어 좋았습니다.
이전에 무용을 했던 친구가 제주에 살고있는데 도움이된것같아
관련기사를링크로 보내주었어요:))
안녕하세요 독자님, 즐겁게 읽어주시고 주변에 소개도 해주셨다니!
넘 반가운 말이네요. 계속해서 알찬 현장 사례를 전달하겠습니다.
지속적인 응원과 사랑 부탁드려요 (하트)
“지식은 책에서 배우고 지혜는 자연에서 배운다.”라는 말이 생각나는 프로그램입니다. 현대인들이 자연을 떠나 기계와 가까이 하면서 감수성을 일어가고있는데, 이 프로그램을 통해 사람들은 인간 본연의 감수성과 창작 욕구를 채우고,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과 소통하며 인간애를 키워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안녕하세요 독자님, 너무 멋진 말이네요. 제주춤예술원의 프로젝트는 자연의 소중함과 풍요로움을 많이 느낄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어요.
이런 프로그램이 계속해서 이어갈 수 있도록 응원과 소문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저희도 지역 곳곳의 문화예술(교육) 활동을 열심히 취재해서 전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