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는 존재조차도 경제와 사회라는 시스템의 대상이 되어버린 시대. 예술과 문화도 어떤 목적성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가 되어버렸다. 그 사이 지역문화 현장에서 시민은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온전히 하고 싶은 일을 해도 된다고? 그게 말이 돼?’ 주체성이 가장 우선되어야 할 문화 영역에서 당사자들은 자신의 당당한 문화예술적 활동이 행정과 사업의 기준에 의해 무참히도 깨지는 경험을 해왔던 것이다. 그간 억압받은 주체들을 호명해서 스스로 ‘발화’할 수 있게 하는 문화예술은 과연 가능할까? 2012년 칠곡군이 창조지역 사업으로 인문학도시 사업을 중심으로 추진하겠다고 했을 때, 다들 일반적인 마을동아리 사업 정도로 봤다. 필자도 문화판에 막 들어온 신참으로 계획 수립에 일부분 참여했고, 그 경험을 소중히 여기고 있다. 경북 칠곡군 인문학마을 중 하나인 북삼읍 어로1리 보람할매연극단의 10년의 경험을 이유미 팀장과 함께 복기해보았다.
  • 보람할매연극단 첫 데뷔작품 <훨훨간다>(2013)
  • 실버문화페스티벌 최우수상 <흥부네 박 터졌네>(2015)
삶의 자리에서 재미있게
보람할매연극단이 여타 동아리 사업과 확연히 다른 점은 계획 단계부터 반년 이상을 지역에 있는 역량을 발굴하는 데 시간을 들인 것이다. 지역의 여러 마을과 마을 자원, 그리고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이장님, 예술강사, 기획자를 씨줄과 날줄로 엮는 노력이 있었다. 행정에서는 바로 실행할 수 있는 사업과 프로그램을 요구했지만, 그 기간을 감내했기에 여러 마을이 참여하였고 다른 사업과는 확연히 다른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삶의 자리에서’ ‘재밌게 하자’는 시민의 주체성이 반년이라는 시간, 일상, 마을의 속도와 맞닿으면서 자연 발화한 셈이랄까. 2012년 칠곡군은 무척이나 더웠지만, 마을마다 새로운 싹이 분명 보였다.
“칠곡군 성인문해교육의 일환으로 한글 교육을 진행했던 어로1리 보람학당 황인정 선생님이 평생학습 성과공유회에서 새로운 발표 무대를 고민하다가 5분짜리 단막극을 준비한 게 보람할매연극단의 시작이었던 것 같아요. 나중에는 40분짜리 연극을 소화할 만큼 성장했어요. 인문학마을 안에서도 활동이 이어졌어요. 당시 마을 이장님이셨던 이영석 현 칠곡인문학마을협의회 회장님의 역할도 컸죠. 처음에는 어르신들이 재밌어하고, 마을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한 거였어요. 그것이 연극이었고 합창단이었고 다른 자발적인 활동이었던 거죠.”
– 이유미 (사)인디053 팀장
주체에서 대상으로, 다시 주체로
그런데 3년여가 지나고 인문학마을이 최고의 정점에 도달한 2015년 즈음이 되자, 그간 자기 주체와 자기표현으로 하던 일들이 외부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행정기관에서도 대외적인 성과로 보여주기 욕망이 강해지면서 마을 내에 새로움이 없어지던 때가 있었다. 비유하자면 자연발화 한 새싹이 큰 논으로 옮겨 심어지고는 풀이 죽은 시기였다. 함께 연습하고 수다 떨고 수박을 썰어 나눠 먹는 그 준비의 시간이 좋아서 시작한 연극이었는데 말이다. 연극 연습에서는 즉흥적으로 내뱉던 할머니 당신의 ‘내러티브’도 무대 위에서는 사라진 것이다. 평소와 달리 자신의 언어로 이야기하고 소통하고 싶어 시작한 일이었는데 지켜보는 눈이 많으니 마음대로 못했다. 주체가 대상이 되는 건 한순간인 셈이다.
“할머니 연극단이 새롭게 느껴지다 보니 정책기관에서도 지원해주었어요. 그런데 이 지점에서 문제가 발생했어요. 딱 연극단만, 합창단만 하고 있는 거예요. 원래 출발은 네가 잘하는 것, 나도 잘하는 것들이 우리 마을의 문화가 되게 하자는 취지였는데, 마을 밖에서 재밌고 감동을 주는 요소가 되자 행정, 기획자 등이 깊숙이 관여하게 되면서 재미없다, 식상하다는 비판 아닌 비판도 받았던 거 같아요. 그 시기엔 당사자들도 마을과 지역에 대한 어떤 공명심으로 하셨던 거 같아요. 할머니들도 그때부터 일로 느끼고 지치게 되셨어요.”
하지만 그 순간 보람할매연극단은 시간과 공간 차원에서 경계를 넘는 시도를 하고 어느 정도 성공한다. 시간적으로는 세대라는 경계를 통해 자신들의 주체성을 더욱 세웠고, 공간적으로는 마을을 벗어나 그들의 영토를 확장하는 경험을 해본 것이다. 칠곡인문학마을축제에도 나갔고, 마을 자체적으로 연극축제를 열어 경상권 연극단을 초청하기도 했다. 단순히 불러주는 곳에 가는 것을 넘어 할머니 단원들과 강사, 이장이 합심하여 새로운 판을 만들어버린 것이다.
“언제까지 인문학마을 사업이나 평생학습 차원에서 연극을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당시 강사님과 이장님이 활동 전환을 시도하셨어요. 할머니들도 수혜자 아닌 수혜자였는데, ‘찾아가는 문화활동’ 사업을 통해 양로원이나 보육원을 다니면서 공연 봉사를 하는 것으로 전환했어요. 그러다 1기 단원분들이 90세가 가까워지시면서 은퇴식도 해드렸어요.”
  • 어로마을 연극제-실버연극경연대회(2017)
  • 찾아가는 문화활동(2017)
예술이 일상, 삶이 되어
90을 앞둔 할머니들께서 연극을 한다는 데 그 누구도 왜 그러시는지는 묻지 않았다. 다들 할머니들의 무대에서의 모습에만 주목했고 무대 뒤, 마을에서의 일상의 의미에 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10년여간 끊어지지 않고 연극공동체 활동이 이어지게 한 원동력은 무엇일까?
“일상에서 배울 수 있는 지혜의 자원들이 활발하게 제안되지 않은 시기가 있어요. 그냥 한글 공부하던 소소한 일상이 특별해지니까 새로운 것이 더는 나오지 않았어요. 마을 안에서 새로운 문화가 생명력을 가지고 생성하고 소멸되고 재조합되거나 일상이 되는 데에 굉장한 방해요소로 작동한 거죠. 온갖 관내 행사에 불려 다녔고요. 그때는 단원들도 마을주민도 계속 이렇게 밀고 가면 되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연극단 단원 교체 등으로 한동안 공연을 쉬었던 시기가 있었는데, 이 시점부터 보람할매연극단이 스스로 새로운 활동을 시도하기 시작했어요.”
행정의 언어나 작동방식이 요구되면서 마을이나 당사자가 대상화되는 경향성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 시스템 안에서도 자연 발화하여 마을이나 공동체를 만들어 온 힘은 자신이나 마을의 필요 내지는 관심사를 계속 드러내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런 힘이 어느 정도의 시간을 감내하여 쌓이게 되면 일상이 되고 대상화하려고 해도 되지 않는 하나의 정체성으로 규정되는 것이다. 보람할매연극단의 연극은 하나의 도구일 뿐이고 그들은 이미 하나의 일상을 구축해 온 것이다.
“이제는 그냥 하시는 거예요. 누가 시켜서가 아니고요. 그간 해온 시간을 아까워하시고 의미 있게 여기기도 하면서 활동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시는 능력이 생긴 것 같아요.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경지에 이른다고 하잖아요. 진짜 일상이 된 느낌? 시키는 사람도 없고, 오라는 사람 없어도 할머니들은 그냥 하고 계세요.”
지역과 마을에서는 사람이나 마을의 시간이란 게 있고 패턴이 있다. 문화예술교육은 특히 서로의 얼굴을 익히고 관계를 통해 차이를 경험하여 일상적인 상태에 이르기까지 최소 5년은 걸린다. 하지만 대부분 사업은 3년을 최대로 보고 있다. 마을은 대상화되지 않기 위해 이런 공동체 사업에 참여하지만, 지역에 좋은 문화콘텐츠로 부각되면서 이리저리 불리어 다니면서 도리어 대상화된다. 전문 예술가도 아닌 주민들에게는 결국 본인이 무대에 서는 경험을 가지고 마을, 일상으로 돌아와서 풀어내는 경험이 더 중요한데 그런 시간이 보장받지 못하는 것이다.
“무대에 서는 건 일상이 아니죠. 오히려 할머니들에게 무대에서의 문화적 경험은 특별한 경험이고 연극을 준비하고 무대 후 돌아와서의 여운이 일상이죠. 일상성은 철저히 존중받아야 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해요. 결국 당사자성은 누가 재단해서 되는 게 아니라 저마다의 일상과 속도감을 존중하는 데서 시작된다고 봐요.”
‘우리,해봐야지(知)’ 보람할매연극단 힙합 도전기(2021)
‘나 너 우리’라는 작은 무대와 세계
일상성은 관계의 힘으로 지속할 수 있다. 그때서야 자신의 성장 욕구를 뛰어넘어 나와 우리의 새로운 수평적 정체성 안에서 예술강사, 마을 리더, 단원으로서의 주체성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를 넘어 함께 만들어가는 공동체 단계가 된 것이다.
“보람할매연극단이 내년이면 10년이 되거든요. 정책으로 생활문화를 활성화하자고 만든 사업인데, 또다시 동아리 안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사람으로 나눠진다면 우리가 반성해야죠. 저희는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고 직면한 공동체의 문제를 함께 풀어가는 역할에 충실하려고 해요. 일상을 존중하는 것. 그리고 길게 호흡하는 것. 그 두 가지가 바로 주민과 지역을 대상화하지 않는 가장 중요한 방법인 것 같아요.”
80, 90 된 어른들이 모이게 하고 자신을 드러내게 했던 힘은 결국 누군가의 욕망이 아닌, 자신의 욕망이 공동체의 욕망과 맞았을 때 나타났다. 대상화하지 않는다는 건 결국 작지만 안전하고 편안한 무대 하나 만들어주는 일에 다름 아니고, 하고 싶은 말과 몸짓을 마음껏 할 수 있게 우리 안에 작은 세계를 만들어가는 일이다.
* 이 글은 칠곡군 전국대학생인문학활동을 시작으로 10년 가까이 인문학 마을을 가까이에서 보고 동행하고 있는 (사)인디053 이유미 팀장의 경험을 빌려 작성했다.
강구민
강구민
경북 영천에서 기억을 수집하는 연구소 기억과아카이브를 운영 중이다. 지역에서 문화를 매개로 작지만 큰 사례를 만들고 언젠가 그 힘으로 시간과 화해하는 꿈을 꾸고 있다.
northist@hanmail.net
사진 제공_보람할매연극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