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보다 오래된

오늘부터 그린㉘ 생명과 교감하고 공존하기

어느 이른 아침 구불구불한 산길을 달리다 사슴과 마주쳤다. 아무도 없는 산중에서 마주한 사슴은 몹시 다급하고 이상하리만치 간절한 눈빛이었다. 무언가 망설이듯 머뭇거리던 사슴은 이내 사라졌고, 잠시 후 흰 개 몇 마리가 나타났다. 쫓기고 있었구나!
종일 사슴의 잔상이 마음에 남아 뒤숭숭한 기분이었다. 반쯤 얼이 빠져 있던 나에게 누군가 물었다. 노루였어? 아니면 고라니? 그제야 둘 다 이름만 익숙할 뿐 서로 무엇이 다른지 조금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름을 안다는 것은, 어쩌면 하나의 신비를 하나의 단어로 덮어버리는 일인지도 모른다.
이름을 안다는 것
내가 아침에 만난 사슴이 누구인지 알고 싶었다. 수컷 노루는 뿔이, 수컷 고라니는 송곳니가 있다는데, 내가 아침에 만난 사슴은 둘 다 없었다. 암컷인 모양이었다. 암컷의 특징에 대한 자료는 아무리 뒤져도 보이지 않더니, 노루궁뎅이버섯이 연관 검색어로 떴다. 하얗고 둥글고 보송보송한 모양이 노루 엉덩이를 닮았다고 했다. 황급히 달아나던 사슴의 뒷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엉덩이에 그런 도드라지는 특징은 없었다. 내가 아침에 만난 사슴은 암컷 고라니였다.
고라니는 작은 사슴으로 산과 평지가 만나는 곳에 산다. 기본적으로 혼자 살고, 영문 이름은 ‘워터 디어(Water deer)’. 물을 좋아해 물가에서 서식하고 수영도 곧잘 한다. 내가 알아낸 것들을 들려주려는데, ‘고라니’라는 이름을 듣자 사람들의 반응이 싸늘해졌다. 고라니는 농작물 피해를 주는 ‘유해 동물’이라고 했다. 개체수를 줄이기 위해 국가에서 정기적으로 사살하고 있다고. ‘유해 동물’이라는 표현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지구상에 인간보다 더 유해한 동물이 있을까? 우리가 저지른 서식지 파괴와 환경오염, 그에 따른 기후 위기를 생각하면 우리는 지구상의 모든 생명에 대해 더 깊은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나라에서는 유해 동물인 고라니는 한반도와 중국 극히 일부 지역에서만 서식하는 우리의 고유종이자 희귀종이었고, 남은 수가 사자, 치타, 코알라 수준으로 적어서 세계적으로는 멸종위기종에 속했다. 절대적인 숫자는 적은데, 좁은 땅에 모여 사는 바람에 너무 많은 것으로 오인된 것이다. 고라니는 인류가 등장하기 전부터 한반도에서 살아온 터줏대감이지만, 산을 허물고 도시를 넓히고 도로를 만들 때 고라니의 생태는 존중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인간의 허영은 고라니가 도로교통법을 준수하고, 인간에게 쓸모없는 땅에서 인간에게 불필요한 것들만 먹고 살기를 바란다. 그런 것을 ‘공존’이라 부를 수 있을까?
구조센터에서 만난 초코와 도도
지그시 들여다봐 줘
고라니를 만나러 전국을 다니는 동안 난개발에 시달리는 고라니들을 보았다. 나까지 야생의 고라니들을 성가시게 하고 싶지 않았다. 대신 인간의 보살핌을 받는 고라니를 만나러 갔다. 야생동물구조센터의 꼬마 고라니들은 보호사들의 손길과 우유에 익숙해 나를 크게 겁내지 않았다. 나는 계류장 구석에 앉아 고라니들과 시간을 보냈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 눈빛 혹은 느낌만으로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두 번째 구조센터에서 ‘초코’라는 친구를 사귀게 되었다. 초코는 반려견처럼 내게 애정 표현을 쏟아냈다. 나도 마음을 전하고 싶어 바닥에 엎드렸다. 눈높이를 맞추자 내려다볼 때와는 확연히 다른 초코의 진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초코도 정면에서 보는 내 얼굴이 신기한지 내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렇게 초코의 얼굴이 눈에 익자, 마치 새롭게 눈을 뜬 것처럼 다른 고라니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까지 달랐다니! 그 생생한 고유성과 다양성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 체험을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었다.
마주 보는 느낌이 들도록 정면 사진을 찍고 싶었다. 실내 공간이라 셔터속도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플래시를 사용해야 했다. 그러나 ‘번쩍’하고 터지는 플래시는 겁 많은 꼬마 고라니에게는 폭력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나에게는 높은 선예도의 사진을 얻는 것보다 고라니들의 심리적 안정이 더 중요했다. 나는 늘 최소한의 장비만 들고 계류장에 들어갔고 플래시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자연광만으로 촬영할 수 있으려면 고라니 쪽에서 나를 지그시 들여다봐 줘야만 했다. 어린 고라니들이 나라는 존재와 카메라에 익숙해지고, 심지어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고 내 눈을 들여다봐 줄 때까지는 적잖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어른 고라니는 교감은커녕 접근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웠다. 구조센터에 들어오는 어른 고라니들은 100퍼센트 야생성을 간직한 데다 심지어 다친 상태였기 때문에 대부분 극도로 흥분해 있었다. 멀리서 인기척만 들려도 필사적으로 날뛰는 바람에 문조차 열지 못한 경우가 허다했다. 뭔가 다른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나에게 구조센터 직원이 구조된 고라니들이 야생에 적응하기 위해 거쳐 가는 곳이 있다고 귀띔을 해주었다. 충남 서천에 있는 국립생태원이었다. 반(半)야생 상태의 보호공간인 사슴생태원은 부지만 6만 제곱미터(18,150평)로, 언덕과 호수를 품은 거대한 규모였다.
촬영을 위해서는 서로에게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고라니들이 나를 충분히 관찰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었고, 나의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도록 늘 같은 패턴으로 이동했다. 휴대전화는 무음으로 설정했고, 작은 소음도 만들지 않으려고 섬세하게 움직였다. 내가 고라니들마다의 영역과 행동 패턴을 하나둘 파악해 가는 동안, 고라니들도 내가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은 알아차렸다. 마음을 열었다고까지 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해가 되지 않을 거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고라니들은 나의 존재에 조금씩 익숙해졌고, 우리 사이의 거리는 서서히 좁혀져 갔다. 변화는 느리고, 미묘하고, 기적 같았다.
꼬마라니
생명의 의미와 무게
어느덧 고라니는 나에게 북극곰이나 앨버트로스 같은 이국의 생명들보다 애틋한 존재가 되었다. 고대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송곳니와 무언가 한없는 것을 바라보는 듯 애수에 젖은 눈빛, 복숭앗빛 혀를 살짝 내밀며 ‘메롱’하는 버릇, 어디서 작은 기척이라도 들리면 흠칫 놀라 한쪽 발을 든 채로 얼어붙곤 하던 겁 많은 성격까지 좋아하게 되었다.
고라니에게만 집중할 수 있도록 배경을 닦아냈다. 전체적인 톤은 산사에서 들려오는 깊고 묵직한 종소리 같기를 바라 중성의 흑백으로 정했다. 독립을 앞둔 꼬마 고라니들은 졸업앨범 형식으로, 어른 고라니들은 포그머신을 이용해 배경에 숨결을 불어 넣었다.
몸을 낮추고 눈을 맞추는 일, 그 단순한 경험만으로도 우리는 살아 숨 쉬는 생명의 의미와 무게를 실감할 수 있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약간의 시간인지도 모른다. 낯설고 불가해한 존재들을 천천히 들여다볼 시간. 모든 존재에게는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심연이 있다.
어른라니
문선희
문선희
동시대의 사회 문제를 다루는 사진작가. 특히 시스템이 생명을 대하는 방식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질문을 던진다. 구제역·조류 독감 매몰지 3년 후를 기록한 《묻다》, 5·18 때 광주에서 초등학교에 다녔던 아이들의 기억을 엮은 《묻고, 묻지 못한 이야기》, 고공농성의 장소들을 기록한 《거기서 뭐 하세요》, 고라니 초상 연작인 《이름보다 오래된》을 발표했다.
sunnybymoon.modoo.at
4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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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옹이 물고기 2024년 07월 18일 at 9:28 AM

    초코가 유해동물이라니… 믿어지지 않아요. “고라니가 도로교통법을 준수하고, 인간에게 쓸모없는 땅에서 인간에게 불필요한 것들만 먹고 살기를 바란다. 그런 것을 ‘공존’이라 부를 수 있을까?” 마음에 와닿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 author avatar
    김양남 2024년 08월 03일 at 11:21 AM

    이름보다 오래된
    오늘부터 그린㉘ 생명과 교감하고 공존하기
    공감이 갑니다

  • author avatar
    안기현 2024년 08월 03일 at 12:44 PM

    이름보다 오래된
    오늘부터 그린㉘ 생명과 교감하고 공존하기
    기대만점입니다

  • author avatar
    이세희 2024년 08월 21일 at 2:51 PM

    가슴이 먹먹 해지네요.
    평소에 잘 하지않는 생각들을 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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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옹이 물고기 2024년 07월 18일 at 9:28 AM

    초코가 유해동물이라니… 믿어지지 않아요. “고라니가 도로교통법을 준수하고, 인간에게 쓸모없는 땅에서 인간에게 불필요한 것들만 먹고 살기를 바란다. 그런 것을 ‘공존’이라 부를 수 있을까?” 마음에 와닿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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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양남 2024년 08월 03일 at 11:21 AM

    이름보다 오래된
    오늘부터 그린㉘ 생명과 교감하고 공존하기
    공감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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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기현 2024년 08월 03일 at 12:44 PM

    이름보다 오래된
    오늘부터 그린㉘ 생명과 교감하고 공존하기
    기대만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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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세희 2024년 08월 21일 at 2:51 PM

    가슴이 먹먹 해지네요.
    평소에 잘 하지않는 생각들을 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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