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가운 볕에 가만 서 있기만 해도 땀이 맺히는 오후, 최근 열린 듯한 장터 현수막 아래로 어린이 서너 명이 뛰어노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충남 아산시 ‘송악마을공간 해유’(이하 해유) 마당으로 들어서는 길, 면에 있는 마을 공간이라기엔 규모가 큰데도, 마당, 카페, 제로웨이스트숍 등 공간을 삼삼오오 이용하고 있는 사람들이 꽤 많이 보인다. 해유 마당 앞 자유롭게 피어 있는 여름꽃들 사이를 지나 건물로 들어서자니, 번듯하게 지어졌지만 텅 비어 있는 시골의 수많은 공간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수억을 들여 지어진들 누구에게도 ‘장소’가 되지 못하는 공간들과 이곳은 무엇이 다를까. 사랑받는 공간과 외면받는 공간의 차이는 뭘까.
우물을 팔 준비가 된 사람들과 공간이 만나면
해유는 농림축산식품부의 농촌마을 종합개발사업의 일환으로 2016년에 완공된 시설로, 사회적협동조합 ‘송악동네사람들’이 주민들의 배움터이자 마을 공유 문화공간으로 위탁운영하고 있는 곳이다. 송악동네사람들은 커뮤니티 카페와 제로웨이스트숍으로 운영되고 있는 ‘놀다가게’, 50명이 이용할 수 있는 대강당, 10~20명이 이용할 수 있는 소모임터, 작은 사무실, 마당 등이 있는 해유 공간을 거점으로 다양한 지역 활동과 사업들을 펼쳐나간다. 해유 2층은 ‘송악반딧불이지역아동센터’가 입주해 있어 인근 송남초등학교 어린이들 대부분이 방과 후에 드나드는 공간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 건물도 처음엔 1년 정도 비어 있었어요. 운영할 수 있는 주체를 찾기 어려웠었던 거죠. 마침 협동조합 송악동네사람들이 활동을 하다 보니 조금 더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었고요. 그래서 마을 추진위원님들을 찾아다니며 우리가 하고 싶은 사업들, 운영 계획들을 설명하며 설득한 거예요. 처음엔 지금과 달리 인테리어랄 것이 없는 건조한 건물이었어요. – 유채영 송악동네사람들 상임이사
우물을 팔 준비가 된 사람들이 터를 갖게 되었으니 함께 모여 시키지도 않은 일들을 신나게 벌이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 7평짜리 좁은 공간을 기반으로 활동하던 송악동네사람들에게 ‘해유’라는 공간은 그동안 꿈꾸었던 일들을 원 없이 펼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을 터이다. 교육에 초점이 맞춰져 있던 활동은 지역의 자원순환 활동으로, 어린이와 청소년 중심의 활동은 어르신 돌봄 활동으로 확장되어 가고 있다. 주민들에게 필요하다 싶으면 다양한 지원 사업을 확보해 프로그램과 공간을 채워나가며 지금의 모습으로 가꿀 수 있었다.
무엇보다 송악면은 90년대 말 친환경 농업과 거산초, 송남초를 중심으로 한 마을교육공동체 운동이 그 어느 곳보다 활발히 시작된 곳이다. 행정 주도의 마을교육공동체 ‘사업’이 아니라, 좋은 마을을 만들고자 하는 활동의 중심축이 민간에 이미 존재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공간이 생기고 난 뒤 커뮤니티를 만들어 간 것이 아니라 친환경, 농업, 교육, 문화예술, 돌봄 등의 수많은 커뮤니티 활동이 이미 켜켜이 쌓이고 있는 곳에 떡 하니 공간이 생겼으니, 그 공간은 물 만난 물고기와도 같지 않았을까. 지역에 아무리 번듯한 공공 공간이 생긴다 한들, 공공성을 가지고 활동해 나갈 민간 파트너와 활동이 없다면 그 공간이 성공할 확률은 거의 없다는 것을, 해유를 보며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 송악마을예술제
소비자가 아닌 창조자로, 서로가 서로에게 배운다
“마을주민 스스로의 힘으로 마을 안의 문화예술을 창조해갑니다. 함께 즐거움을 나누며 세대 간의 삶을 나눌 수 있는 문화예술은 마을에 활력을 불어넣고 더불어 어울릴 수 있는 정자나무가 될 것입니다” (출처_송악동네사람들 홈페이지)
많은 사람들이 시골에서의 문화예술을 ‘결핍’으로 이야기하곤 한다. 우리 동네에는 극장이 없으니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보려면 도시로 나가야 한다. 어디 그뿐인가. 배우고 싶은 악기가 있지만 가르칠 강사가 없어 악기를 배울 수도 없다. 직업군이 다양하지 않아 번듯한 직업 체험을 할 수도 없다. 하지만 문화예술을 소비가 아닌 창조의 관점에서, 배움을 순환과 증여의 관점에서 본다면 문제가 완전히 달라진다. 누구나 자신만의 이야기를 다양한 형태로 표현할 힘을 가졌기에 문화예술의 생산자로 거듭날 수 있고, 누구나 배움을 주고받을 힘이 있기에 관계망 안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배우며 성장할 수 있다. ‘없어서 못 하는’ 게 아니라 ‘우리 것으로 만들어 갈’ 수 있는 곳, 그래서 시골은 문화예술의 불모지가 아니라 생산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송악동네사람들’의 미덕은 바로 그 믿음과 연결력에서 나온다.
주변에 보면 전문가는 아니지만 영역별로 꽤 잘하시는 숨은 고수들이 많아요. 그리고 어떤 것들을 배우고 싶은 사람들이 있고요. 그 사람들도 당장 전문가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배움을 통해 삶이 조금 더 재밌어지기를 바라는 거고요. 이분들을 연결해 드리는 거죠. 그것만으로도 많은 관계와 이야기들이 나누어지는 것 같아요. 그 프로그램이 지금의 ‘마을인생학교’ 입니다. – 유채영 이사
송악동네사람들은 ‘마을인생학교’라는 틀거지를 두고 사람들을 발굴하고 연결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유아예술학교, 청청캠프, 마을인생학교, 마을학당, 인문강좌 등 해유에서 여는 다양한 마을 배움터를 통해 관계망을 넓혀 가고, 그렇게 발굴된 사람들이 또 새로운 역할로 연결된다. 송악동네사람들의 활동을 보며 신뢰하게 된 주민들이 점점 많아지다 보니 처음 30여 명으로 시작했던 조합원은 어느새 150여 명으로 늘게 되었다.
마을의 모든 활동 안에 문화예술이 스며들어 있어요. 그게 기반이 되었기 때문에 좀 더 주민 가까이 갈 수 있었고, 좀 더 우리가 하고자 하는 내용들을 확장할 수 있었고, 좀 더 쉬운 언어로 다가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결국엔 ‘같이 이렇게 어우렁더우렁 살아야지 재미있지 않겠어?’라는 얘기들을 계속 건네고 있는 셈이죠. 그런 부분들에 공감해 주셨기 때문에 저희 조합원들도 늘어나지 않았을까 해요. – 유채영 이사
  • 마을언니에게 배우자 – 마크라메, 펜드로잉
플랫폼으로서의 마을축제, 네트워크의 힘
해유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다양한 문화예술 활동의 방향은 주민들이 ‘자기 언어를 가지고 많이 표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딱히 ‘문화예술교육’이라고 명명하지도, ‘우리는 문화예술교육사업을 해야 해!’라고 시작한 것도 아니지만, ‘어떻게 하면 재밌게 할 수 있을지, 즐거운 만남이 될지를 고민하다 보니 문화예술교육사업이 되었다. ‘연극’ ‘바느질’ ‘그림책’ ‘도자기’ ‘미술’ ‘음악’ 등은 결국 주민들의 삶의 이야기들을 담아내는 ‘아름다운 그릇’이 아닐까.
이 모든 활동은 매년 가을 해유의 마당에서 열리는 〈송악마을예술제〉에서 총화된다. 2023년 8회를 맞이한 이 예술제는 마을의 동아리, 어린이집, 학교, 주민자치회, 마을 협동조합 등이 한데 어우러져 연극제, 음악제, 미술제, 체험마당 등의 형태로 다채롭게 운영된다. 이렇게 한 마당에 다양한 주체들이 참여할 수 있는 건 예술제를 주관하는 송악마을교육네트워크 ‘오늘’의 힘이 크다.‘오늘’은 송악면에 위치한 3개 학교(거산초, 송남초, 송남중)의 학교장, 교사, 학부모회와 마을 교사, 지역아동센터, 협동조합, 주민자치회 등의 기관단체 대표 및 주민으로 구성되어 있다. 매월 해유에서 열리는 네트워크 회의를 통해 송악마을교육 주요 의제에 대해 공유하거나 토론하고 협의하며 다양한 마을교육 연계협력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네트워크 회의에서 논의되고 작동되는 것들이 학교에 돌아가서도 아이들의 교육에 도움이 된다는 것, 교육 활동에 마을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일들이 있다는 것들을 (교사들이) 인지하면 관계가 더욱 회복되는 것 같더라고요. 〈송악마을예술제〉도 처음엔 저희 조합의 문화기획자들 중심으로 진행이 되었어요. 그런데 한 3년 전부터는 송악마을교육네트워크 선생님들과 학부모님들 중심으로 기획단이 꾸려져 예술제의 방향과 내용, 예산까지 같이 움직이면서 운영하고 계세요. – 유채영 이사
특별하게 내용을 기획할 필요는 없다. 학교는 학교대로, 마을은 마을대로, 모임은 모임대로 각자가 한 활동 중 예술제에 담거나 공유할 만한 것들을 잘 모아 분류하고 아름답게 배치하면 된다. 진정한 ‘플랫폼으로서의 축제’ ‘주민들이 주도해가는 축제’의 좋은 예가 아닐까. 당장 눈앞에 있는 행사와 기획력에 에너지를 쏟기보다는 그것을 함께 만들어갈 주체들의 네트워크를 튼튼히 하는 게 큰 저력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송악마을예술제〉에서 배우게 된다.
  • 송악마을예술제 – 종이접기교실, 뮤지컬 발표
그들의 문제가 우리의 문제, 마을교육에서 마을돌봄으로
마을교육공동체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송악동네사람들은 코로나 팬데믹 시기를 통과하며 요즘 ‘어르신 돌봄’의 문제에 주목하고 있다. 이것이 단순한 어르신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곧 닥칠 우리들의 문제’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어르신들이 고립된 상태에서 외롭게 돌아가시거나 어려움을 겪는 일이 내가 늙었을 때도 생길 수 있는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을 조사 작업을 해봤는데 마을에 외로우신 분들이 진짜 많더라고요. 의료기관도 관공서도 아니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이 무엇일지에 대한 고민을 그때 시작하게 되었죠. – 유채영 이사
‘마을에 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일들을 해보자’라는 마음으로 송악동네사람들 안에 어르신 문제를 같이 고민하는 돌봄위원회가 만들어지고 돌봄 사업들이 시작되었다. 심리미술, 인지정서, 건강체조, 푸드테라피, 인생책 프로그램 등을 가지고 마을회관으로 찾아가 어르신들과 만나는 〈어르신인생학교〉 이런 활동을 할 수 있는 사람과 역량을 키우는 〈돌봄활동가양성사업〉 등을 통해 이웃이 이웃을 돌보는 시스템을 구축해 나가는 중이다.
이제 동네 어르신들 사이에서도 송악동네사람들, 아니 ‘해유 사람들’은 ‘재밌는 걸 해주는 팀’으로 소문이 자자하다. 예술제에 놀러 오시라 하면 “젊은것들이나 노는 자리”라고 손사래 치시던 분들도 이제는 “우리도 한번 가서 응원해 주자” 하며 찾아오는 사이가 되어가는 게 가장 큰 보람이다.
  • 어르신 그림전
시골에 사는 사람들은 요즘 그 어느 때보다 ‘소멸’이란 단어를 자주 들으며 살아간다.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실체 없는 불안감과 이주해 올지도 모를 도시인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여야 한다는 압박. 그런데 생각해보자. 누가, 무엇이 없어지는가. 행정구역? 공무원의 자리? 학교?
행정구역이 없어진다고 자연과 우리들의 삶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학교가 없어진다고 배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어쩌면 우리가 할 일은 명백하다. 서로 힘껏 배우고 나누는 것, 서로 즐겁게 만나는 것, 서로서로 돌보는 것. 그래서 시골에 정말 필요한 것은 ‘인구’가 아니라 즐거운 마을살이를 위해 길을 내고 일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과 공간이 잘 만나는 일 아닐까.
이은진
이은진
서울에서 경남 함양으로 이주한 지 올해로 13년째. 지역, 문화예술, 교육 등의 키워드로 활동과 일을 넘나든다. 지리산권역 사람들과 함께 촉진활동, 문화예술생산활동, 연결활동 등을 이어가고 있다. 요즘은 주로 서하다움청년레지던스플랫폼에 서식 중이다.
svjin96@gmail.com
영상_박영균 미술작가 infebruary14@naver.com
사진제공_사회적협동조합 송악동네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