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당역 5번 출구에서 나와 첫 번째 골목으로 접어들면 치킨, 코다리와 황태, 횟집, 곱창, 카페 등 길 양편으로 도열해 있는 현란한 간판이 시야를 꽉 채운다. 자극적인 음식 냄새에 홀린 듯 10분쯤 걸으면 사당동의 소문난 맛집, 산오징어집이 나타난다. 그 건물 2층에 ‘억압받는 사람들의 연극공간 해(解)’(이하 ‘극단 해’)의 복합공간이 자리 잡고 있다.
  • 보알시민연극학교
  • <우리집에 왜 왔니>
연극으로 억압을 드러내고 해체하다
극단 해는 토론연극(forum theatre)과 플레이백 씨어터(playback theatre), 두 개의 축을 중심으로 개인과 공동체의 건강과 긍정적인 성장에 기여하는 ‘촉매’로서의 연극 활동을 지향하며 작업해 오고 있다. 1996년 브라질의 연극연출가 아우구스또 보알(Augusto Boal)의 한국 워크숍에 깊게 감명받은 참가자들은 뜻을 모아 1997년에 극단 해를 창단했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사회적이며, 따라서 모든 연극 행위 역시 정치적이다.”라고 선언한 아우구스또 보알의 ‘억압받는 자들의 연극’은 토론연극을 통해 관객과 배우의 경계를 없애고, 관객이 적극적으로 연극에 참여해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배역을 통해 직접 표현하는 연극의 주체로 변화시키고자 했다.
극단 해는 창단 이후 소외된 이들을 찾아 나섰고, 1년 동안 소년원의 청소년들과 토론연극 워크숍을 진행하면서 그들이 마음을 열고 변화하는 모습을 관찰했다. 이후 노숙자, 탈북자, 이주여성, 재소자, 성매매 여성, 이주노동자 등 소외계층을 만나 함께 배우가 되고 함께 관객이 되는 토론연극을 이어오고 있다. 외국인 주민 인권연극 <우리집에 왜 왔니>, 기지촌 여성들과 함께 하는 토론연극 <숙자 이야기>, 미혼모 인식개선 및 자립 지원 입법연극 <미모 되니깐> 등의 작업은 질문을 통해 관객 스스로 답을 찾아보고, 머릿속에 떠오른 답을 행동으로 직접 해보도록 함으로써, 상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좁혀갈 수 있도록 돕는다.
극단 해의 연극은 대본을 미리 준비하지 않는다. 연극을 준비하는 과정에 참가자의 이야기를 모으고 공연 직전에 대략의 대본을 정한다. 이때 플레이백 씨어터가 활용되기도 하는데, 이것은 관객의 이야기를 듣고 배우와 연주자가 즉석에서 연극으로 재현하여 보여주는 즉흥 재현극을 말한다. 미국에서 시작된 플레이백 씨어터를 원형으로 하여, 극단 해의 독특한 방식인 ‘나의 이야기극장’으로 발전시켜나가고 있다. 관객은 자신의 감정을 극을 통해 비추어보며 치료적인 효과를 경험하게 된다. 참여자들은 처음에는 자신의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것을 불편해했지만, 연극에 참여하면서 자기 안의 억눌림과 욕망을 인식하게 되고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스스로 찾아가면서 연극이 끝나면 직접 해법을 제시하기도 한다. 극단 해의 연극은 사람들의 일상을 연극으로 만들어가면서 내면을 치유하는 과정인 것이다. EscortStars
  • 음악 + 토론연극 <기후야 돌아와>
지역에 아고라를 펼치다
2010년 이후에는 소외계층에 집중되었던 이슈를 다양한 대상으로 확장했다. 청소년이든 성인이든, 공연장이든 비공연장이든 구분 없이 폭넓게 만나 작업을 확산시켜 나갔다. 청소년 인권연극 <양들의 침묵>, 평화통일 토론연극 <오버 더 라인>, 행복한 싱글라이프 관객참여 토론연극 <인터-뷰>, 사추기 여성들과 함께하는 토론연극 <상현동의 엄마들> 등 연극으로 이야기를 건넸다.
2015년부터 관악구에 터를 잡고 지역주민을 만나기 시작했다. 활동을 시작할 당시는 지역에서 알려진 단체가 아니어서 참여자를 모집하기 위해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주민센터, 도서관, 구청, 지역 연고 단체 등을 찾아다니며 홍보를 위해 엄청나게 다리품을 팔았다. 참여한 주민들은 익숙하지 않은 연극 양식에 너무 낯설어했다. 대부분 ‘연극학교’라고 하면 화술을 배우거나 대본을 읽고 연기하는 것을 기대하는데, 이야기를 나누자고 하니 주춤했던 것이다. “나는 무대에서 연기해보고 싶었는데” “내가 바랐던 연극이 아니네” 하며 참여자들이 빠져나갔다. 지난 5년간의 활동을 통해 지역에서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고, 2018년부터 2년간 관악아트홀(구 관악문화도서관) 상주단체로 있으면서 보알시민학교를 운영한 경험도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구청이나 재단 같은 공공기관과 좋은 관계를 맺으며 협력하게 된 점 역시 이전과 확연하게 달라진 점이다.
무엇보다도 지역예술가와 청년활동가 네트워크가 생긴 것이 커다란 성과라고 할 수 있겠다. 참여자로 인연을 맺은 이들이 활동가로 성장하고, 이제는 극단 구성원으로 함께 하고 있으니 말이다. 김현정 대표는, “범위가 좁아지니 그만큼 깊이가 생긴다. 중요한 것은 다양한 사람과의 만남 그 자체가 아니라, 관계를 통해 스스로가 바뀐다는 점이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것 같다.”라고 말한다. 현재 관악구 외에서 찾아오는 참여자도 늘어나 깊고 넓게 관계의 밀도를 높여가고 있다고 한다.
건물 재건축 때문에 조만간 새 보금자리를 찾아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지만, 극단은 관악구을 떠나지 않을 작정이라고 한다. 산오징어집 아주머니부터 치킨집 사장님까지, 매력적인 동네 사람들과 귀한 인연을 맺고 있고, 매년 극단 해의 연극을 기다려주는 주민이 있고, 활동가로 성장하고 있는 참여자들이 지역에서 함께하고 있으니 말이다. 앞으로 지역의 공통관심사를 발굴하고 주민들과 소통하며, 자기성찰의 시간을 긴 호흡으로 가져가 보려 한다. 서로 이야기를 들려주고 보여주며, 이해하고 표현하면서 서로를 알아가는 연극, 그것이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가 되고 지역의 이야기로 재탄생할 것이다.
  • 남현동 주민센터 <나의 이야기 극장>
  • <관악 아고라2 판>
    예술로 질문하기: 관심과 무관심 사이
연극으로 질문을 건네다
김현정 대표는, “연극은 소통의 장으로 굉장히 좋은 힘이 있다는 것을 지역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확인할 수 있었다.”라고 말한다. 2017년부터 문화예술교육 콘텐츠 연구‧개발 프로그램인 ‘아고라 프로젝트’를 통해 지역에서 공통관심사를 함께 찾아가고 있다. 2020년에는 기후환경 이슈를 주제로 <관악아고라2: 판>을 진행했다. 참여자들은 매주 만나 공부하고 토론하며, 주제와 형식을 정한 후 자발적으로 모둠을 구성하였고 세 개의 콘텐츠를 만들어 냈다. 우선 쓰레기 분리 배출법을 잘 몰라 잘못 배출하는 사례처럼 일상에서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문제를 브이로그(Vlog)로 만들고, 유튜브에 송출했다. 그리고 도림천 복원사업과 연관 지어 멸종동물 이야기를 동화 그림자극으로 제작해서 공연했다. 관악구에 넓게 분포된 도림천은 주민이 많이 모이는 장소인데, 기후위기에 관심이 있는 주민도 많았다. 그래서 생물 다양성과 도림천을 연관 지어 어린이를 대상으로 공연을 올린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간이 버린 쓰레기로 인해 고통받는 동물들에 관한 퍼포먼스를 통해 관객에게 질문을 던졌다.
2020년에는 코로나19로 인해 비대면과 대면 방식을 오가며 진행되었는데, 이 모든 과정을 참여자들이 스스로 해냈다. 2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주민들이 함께한 이 프로젝트에 15명으로 시작해서 14명이 완주했다니, 놀라운 자발성이 아닐 수 없다. 당시 극단 해가 주민들에게 던진 질문은 한 가지였다. “저희는 기후환경 이슈로 작업을 해왔고 다양한 방식의 제안이 가능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제안이 가능한가요?” 예술가는 질문으로 판을 열어준 것뿐이고, 주민들은 놀라운 집중력으로 화답했다. 극단이 먼저 주제를 정하지 않고 사람들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그 안에서 ‘기후환경’ 주제를 정했던 것이 중요한 지점이었다.
“예술가는 예술적 지식을 교육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찾아내고, 무엇을 질문하고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를 계속 고민해서 참여자가 스스로 발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예술교육은 가르치는 게 아니라 함께 배워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교육이 아니라 학습이다. 스스로 능동적으로 깨우치는 과정이다.”
– 김현정 극단 해 대표
극단 해는 현재 여덟 명의 예술인을 주축으로, 프로젝트에 따라 객원 예술가 또는 지역의 활동가들이 합류한다. 이들은 참여자가 자발적으로 문제를 찾고 해결하고 또 그것이 일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판을 열어주는, 질문자가 된다. 예술적 카테고리는 넓히고 물리적 범위는 지역으로 좁히며, 예술이 왜 필요한가에 대한 새로운 담론이 필요한 코로나 시대에 전환적 예술지향을 보여준다.
현재 코로나 팬데믹에 대처할 수 있는 적절한 방식을 찾는 것이 당면한 과제이다. 토론연극은 참여자뿐만 아니라 관객 역시 같이 참여하면서 만들어가는 연극이기 때문에 비대면 온라인으로 진행할 때 현장성을 살리기 위해서는 참여자를 제한하거나 돌발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조력자가 더 많이 필요해졌다. 지금까지의 다수 참여 대신 소수 참여 방식, 참여자 스스로 문제를 찾는 방식, 이를 위해서 예술가들이 적절한 질문을 찾는 방식 등 코로나 시대에 대처할 수 있는 다양한 해법을 고민하고 있다.
“우리는 연극으로 질문을 한다. 질문을 통해서 대화를 열고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그 관심을 통해서 나의 일상을 돌아보고 대상과 상황에 맞게 변화한다. 이런 가치는 더욱 확장되어야 한다. 예술가는 질문을 찾고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다.”
– 김현정 극단 해 대표
극단 해는 ‘연극은 다른 어떤 예술 분야보다도 특히 강력한 치유의 힘이 있다’는 믿음으로 오늘도 예술에 대한 정의와 예술적 철학에 대한 질문을 쉼 없이 던지고 있다. 어렵지만 현장의 감동이 늘 살아 있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가는 중이다. 현장의 감동이야말로 예술가를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니까 말이다.
유은경
유은경
문화집단 너느로 대표. 마을에서 예술하는 마을사람.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만들어가는 데 예술은 최고의 매개체라고 생각한다. 예술사랑방 ‘나무가모인숲’을 지키며 어린이부터 어르신까지 다양한 세대와 사귀고 있다. 지역 콘텐츠 및 신화를 발굴하여 주민과 새로운 콘텐츠로 창작하고 있다.
bblack9@hanmail.net
사진제공_연극공간 해 https://blog.naver.com/theaterha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