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으로 인해 문화예술 현장이 초토화되었다. 대부분의 예술공연과 문화행사가 취소되었고, 작가와 기획자는 창작과 활동, 그리고 생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런 와중에도 꿋꿋하게 문화예술의 현장을 지키는 사람이 있다. 바로 플랜비문화예술협동조합 이승욱 대표이다. 부산의 원도심에서는 최근까지 ‘신나는예술여행’의 일환으로 <부산 원도심 문화회복 프로젝트-OPEN THE DOOR, OPEN THE ARTS>가 진행되었다. 일상의 공간을 창의적이면서도 희망적인 삶과 예술의 텃밭으로 가꾸고 있는 이승욱 대표에게 팬데믹 시대에 어떻게 문화예술을 향유하며 살아갈 수 있을지 들어보았다.
플랜비문화예술협동조합(이하 플랜비)에 관해 소개를 부탁한다.
지역의 문화예술 혁신과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취지로 문화예술 기획, 정책 연구 등에서 활동하는 분들이 함께 만든 협동조합이다. ‘플랜비’의 ‘B’는 부산의 이니셜이기도 하고, 주류 문화예술과는 다른 가치를 추구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훌륭한 동료들과 함께, 미약하지만 부산의 문화를 가꾸는 데 힘을 보태고 있다.
얼마 전 열린 <부산 원도심 문화회복 프로젝트>가 무척 반가웠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어려움이 적지 않을 텐데, 재난 상황 속에서의 문화예술이란 어떤 의미일까?
작년부터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신나는예술여행’의 일환으로 축제형 사업을 개최했다. 작년엔 부산 영도에서 ‘남항 바닷길 축제’를 진행했고, 올해는 북항, 원도심, 바닷가, 재개발 지역 등을 찾아가고자 했다. 그런데 그사이에 코로나 상황이 심각해져서 현실적으로 축제 행사가 가능하지 않아 장소를 여러 번 옮겼다. 그 과정에서도 코로나는 계속 확산되다보니 보다 근본적인 고민을 하게 됐다. 어찌 보면, 이 문제는 일시적인 사태가 아니라 우리 삶의 기저를 변화시키는 ‘미증유의 사건’이 아닐까? 코로나 이후, 실제 현장에서 대면해야 하는 예술 장르가 특히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그걸 긴급하게 온라인 플랫폼으로 옮기는 작업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가 코로나 사태 속에서 힘겹게 프로그램을 준비하면서 고민한 부분은 두 가지였다. 첫째, 코로나는 누구도 피해갈 수 없지만, 특히 비정규직이나 사회적 안전망 바깥에 있는 분들이 더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점이다. 예술가 역시 존재론적으로, 또 생활인으로서 굉장히 큰 고통을 겪고 있다. 이번 코로나가 한편으로는 예술가들의 존재 이유와 삶의 조건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둘째, 더 근본적으로는 문명의 폐해를 반성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기후 변화와 생태계 파괴가 초유의 바이러스 사태를 불러왔다고 얘기하는데, 이는 문명의 발전과 성취 속에 가려져 있던 사회적 모순이 집약적으로 드러난 결과일 것이다.
결국은 사회적 거리두기와 같은 일시적 행동 방침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질문과 실천이 필요하지 않은가. 이를테면 ‘우리 삶의 가치와 양식을 어떻게 만들어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와 같은 것들. 코로나로 인해 상점도, 학교도, 공연장도, 전시관도 모두 문을 닫으면서 인간관계가 단절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심지어, 재난 상황에서 특정 집단에 대해 혐오감이 표출되기도 한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인간 삶을 철저하게 되돌아보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우리가 잃지 말아야 하는 것’을 ‘사유’하고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사람들 사이에 이런 생각을 모으고 성찰하는 역할을 문화예술이 마땅히 감당해야 하고, 그래서 코로나 이후 문화예술의 책임과 역할 역시 적지 않다. 부족하지만, 이번 프로젝트는 그러한 문제의식을 실험하는 작은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코로나 사태 이후의 문화예술은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폐기된 것 중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다시금 성찰하고 복원한다는 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작년의 작업도 그렇고, 플랜비의 문화예술기획은 부산 곳곳을 탐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떤 이유일까?
장소성, 즉 문화예술과 삶의 ‘콘텍스트(context)’를 중시하기 때문일 것 같다. 물리적인 ‘공간’과 삶의 콘텍스트가 들어간 ‘장소’를 구분하기도 하잖나. 우리도 같은 생각을 한다. 장소성에 대한 고민은 지역에 대한 고민이고, 더 나아가면 여기 있는 사람들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관심이다. 플랜비의 작업은 공연장이나 전시관과 같은 정형화된 공간보다는 오히려 비정형화된 공간에서 주로 이루어진다. 일반적으로 공연장은 블랙박스, 미술관은 화이트큐브라고 하는데, 어찌 보면 블랙박스나 화이트큐브는 콘텍스트를 배제한 중립화된 공간이다. 공연장이나 미술관에서 이뤄지는 작업이 의미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플랜비는 콘텍스트가 많이 투사되고 드러나는 작업을 선호한다는 뜻이다. 아마도 플랜비 구성원들이 사회와 예술, 사람과 예술의 관계에 관심이 많고, 일련의 예술 작품이 그 배경, 맥락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를 세심하게 관찰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일상의 공간과 예술문화적 맥락에도 관심을 많이 기울이게 되는 것 같다. 플랜비가 영도에서 5년 정도 ‘깡깡이 예술마을’ 작업을 했던 것도 하나의 커뮤니티 속에서 그 예술 텍스트와 삶의 콘텍스트를 (재)구성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부산을 떠나 서울에서 미학을 공부하고 현장에서 청년문화 기획자로 활동하다가 미국 유학 후 ‘고향’ 부산으로 돌아온 것으로 알고 있다. 어떤 계기가 있었나?
2003년부터 계속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지냈고, 2010년에 부산으로 완전히 내려왔다. 거창한 계기는 없었다. 어른들 표현으로 역마살이 있어서 그런 것 같다. 새로운 것에 대해 관심이 많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했을 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미국 유학보다는 처음으로 유럽 배낭여행을 다녀왔을 때의 경험이 내 삶에 더 큰 변화를 준 것 같다. 대단치는 않지만 유럽 이곳저곳을 돌아보면서 좋은 문화, 나쁜 문화가 아니라 문화적 다양성에 관심을 두고 천착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부산에 돌아왔을 때 ‘부산 문화’를 외부자와 내부자의 시선에서 동시에 보게 된 것도 마찬가지 이유가 아닐까 싶다.
부산에서 다시 문화예술기획 활동을 시작한 게 지역 문화지 [안녕 광안리] 창간이다. 처음에 보고 굉장히 신선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가 잊고 있었던 일상의 모습을 새롭게 발견한 느낌이랄까?
2011년 6월 [안녕 광안리]를 창간해서 5년 동안 만들었다. 대단하게 시작한 건 아닌데 너무 큰 관심을 받아서 나도 놀랐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광안리에 이사 와서 사춘기 시절을 여기서 보냈던 나에게 [안녕 광안리]는 고향 부산에 대한 ‘오마주’이자 ‘반성문’ 같은 거다.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지낼 때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촌스럽냐고 구시렁댔었다. 20년 동안 서울 살며 어설픈 표준말을 쓰게 되면서, 지역이 가지고 있는 언어적·문화적 풍성함을 까먹은 거다. 근데 자세히 보니, 서울에서는 볼 수 없는 창의적인 것들이 감지되었다. 또 한편으로는 기획자로서 내가 왜 새로운 것에 호기심이 많은가 이해가 되더라. 부산은 온갖 새로운 물자가 드나드는 상인들의 도시다보니, 솔깃하고, 자유롭고, 이것저것 갖다 붙여보는 하이브리드도 많이 일어난다. 지역성은 단순히 객체화되어있는 대상이 아니라 내 삶을 이해하게 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안녕 광안리] 편집진은 어떻게 구성했나?
그 당시 ‘1인 잡지’가 많이 생겨날 때였는데, [안녕 광안리]는 편집진을 10명 정도 꾸렸다. 사실 부산에서 문화 쪽에는 아는 분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초반부터 여러 사람과 함께 만들고 싶었다. 매체는 집단 지성의 산물이라는 생각도 있었지만, 한 사람의 사정이 어려워지면 폐간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힘을 모으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정치하려고 하냐, 왜 사람을 모으냐?” 그런 얘기를 듣기도 했다. 서울에서 공연 기획할 때부터 알고 있던 장현정 호밀밭출판사 대표를 비롯해 여러 사람을 소개받고 섭외해 잡지를 발간했다. 그렇게 20호에 이르렀고 지금은 ‘휴간 중’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웃음) 초창기부터 여러 편집진이 들고 나면서 힘을 모았던 게 [안녕 광안리]가 다양한 색을 만들고, 5년 동안 이어질 수 있었던 동력이 아닐까 한다.
그 후 본격적으로 부산에서 문화기획자로 활동을 시작했다. 어떤 계기가 있었나?
부산에서 만난 분 중에는 서울에서 독립예술제(현 서울프린지페스티벌) 활동을 하며 직·간접적으로 인연을 맺었던 분들이 많다. ‘재미난복수’의 류성효 감독이나 김건우 대표도 그렇다. 서로 만난 적은 없지만 각자의 존재를 알고 있었기에 쉽게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물론 인간관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제가 부산을 새롭게 인식하고 공부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고등학교 시절까지 여기에서 살았어도 부산을 제대로 이해하거나 경험해 볼 기회는 별로 없었으니까. 다시 부산에서 살게 되면서 스스로 발견한 것이 있었다. 바로, 부산은 ‘청년의 도시’라는 것.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청년(성)은 나이에 국한된 것만이 아니라,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 그래서 ‘그까짓 거 한번 해보지!’ 이런 게 사실 부산의 중요한 멘탈리티이자 청년성이라고 보았다. 어찌 보면 역발상이다. 부산이 청년 유출이 심각한 도시라지만, 오히려 청년문화의 메카가 될 만한 속성을 가진 곳이라고 보았고, 그런 방향으로 크게 성장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청년문화를 운동적으로 접근해서 상상력을 제약하지 말고 “무조건 재밌게 해보자”라고 제안했다. [안녕 광안리] ‘창간 파티’할 때처럼.
당시 부산 문화가 젊어져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던 때였지만, ‘청년’이 수면 위로 떠오르지는 않았던 것 같다.
부산에서 처음으로 총괄기획한 프로그램이 2012년 <청년문화수도프로젝트>다. 재미난복수가 기획하고 제가 자문으로 참여했던 <부산회춘프로젝트>의 2탄으로 볼 수도 있다. <부산회춘프로젝트>가 부산대학교 앞에서 ‘부산의 청년성’을 회복하겠다는 뜻으로 기획됐다면, 그 연장선에서 <청년문화수도프로젝트>는 부산이야말로 청년성이 핵심이자 청년문화의 주효한 플랫폼이라는 점을 강조한 프로젝트다. 행사 거점도 부산대학교가 아니라 ‘광안리’로 잡았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그 차이가 크다. 그래피티, 사운드 웨이브 등의 주요 프로그램이 세대를 가로질러 폭넓은 수용성을 보여줘서 우리도 상당히 놀랐다. 2013년에는 ‘바다미술제’ 축제행사감독을 맡아 시각예술과 공연예술이 융합된 형태로 구성해 지역 문화예술의 외연을 확장하고자 했고, 2014년에는 ‘부산비엔날레’가 지역성 폄하로 파행적 사태를 겪으며 대안적 성격의 ‘무빙트리엔날레’를 기획하게 되었다. 사실상 무빙트리엔날레를 하면서 지금의 플랜비가 만들어졌다. 그 당시 3~4년간 같이 일했던 동료, 선후배가 모여 문화예술 공동체를 만들자는 얘기를 나눴고, 문화 다양성에 대해 결집된 목소리를 낼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한 활동을 하기 위해 느슨한 연대가 아닌 협동조합을 선택했다. 협동조합으로서 플랜비가 추구하는 가치가 궁금하다.
저를 비롯한 플랜비 구성원들은 예술과 사회가 만나는 것, 문화와 일상이 만나는 것, 문화와 삶이 만나는 접점에 관심이 많았다. 협동조합으로서의 플랜비가 중시하는 가치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협업’과 ‘통섭’이다. 문화예술의 문제를 구체적 삶의 맥락에서 풀어내려면 주민, 활동가, 기획자, 예술가의 협업과 통섭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탈 위계적 관계’다. 플랜비에는 이사회도 있고 연구자 분들도 계시지만, 사실상 직원 협동조합적 성격이 강하다. 상근자 중에서는 제가 제일 선배이지만, 고용인-피고용인 관계로 묶이기는 싫었다. 저 혼자 다 책임질 수도 없고, 또 그게 가능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물론 조금씩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주요한 의사결정 사안은 공동으로 숙의하여 결정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코로나 사태는 우리에게 일상과 문화예술의 관계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지를 다시 질문하는 것 같다. 언택트 사회에서 문화예술은 어떤 가치를 지향해야 할까?
언택트 사회가 되니까, 일상적 의사소통만이 아니라 문화예술 작품이나 행위까지도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영상으로 제작되거나 이루어지는 것 같다. 그것도 의미가 없진 않다. 예전에는 항상 만나서 이야기하다가 온라인 화상회의로 진행하니까 편하다고 얘기하는 분도 있고, 또 예술 작품이나 실천 행위가 온라인에 맞게 기획되기도 한다. 다만, 나는 공연예술의 현장성만큼은 영상으로 번역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장비의 문제나 기술적 발전과 무관하게. 그러니까, ‘코로나’라는 미증유의 사태가 우리에게 던진 질문은 대면이냐 비대면이냐의 방법적 문제가 아니라, 예술가의 존재 조건과 방식, 그리고 새로운 예술적 재현 방식에 대한 질문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팬데믹 사태는 환경 파괴와 무분별한 개발, 성장과 경쟁, 효율성 중심의 패러다임에 대한 문제적 징후를 보여준 사례이고, 결국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것은 이러한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의 문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이런 사태를 제대로 반성하지 못하면 안 되지 않나. 지금 기후위기 문제를 되돌아보기도 하고, 다시 사회적 연대를 이야기하기도 하는데, 문화예술이 이러한 인간 문명의 폐해와 폭력성을 성찰하는 데 앞장서야 하지 않을까. 어쩌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문명적 대전환이 이루어져야 하는 시기가 아닐까. 저를 비롯한 플랜비가 그러한 변화의 플랫폼이 될 수 있을지…… 우리는 여전히 ‘실험 중’이다.
앞으로 어떤 작업을 해보고 싶은지, 또 10년 후에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지 궁금하다.
플랜비도 이제 6년이 되었다. 사업을 많이 하거나 영향력이 있다는 것 자체가 ‘기득권’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조금 더 자신을 돌아보고 경계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고 있다. 그래서 요즘은 ‘플랫폼’의 기능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한다. 현재 플랜비는 각 팀의 자율성에 기반해 협력하는 플랫폼, 다시 말해 문화예술 커먼즈 구축을 지향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내년부터 차츰 플랜비 일을 정리하려고 한다. 저와 같이 시작한 후배들에게 혹시라도 걸림돌이 되면 안 되잖나. (웃음) 물론 당장 플랜비를 그만두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 후배들이 더 잘할 수 있게 ‘새로운 자리’를 만들어주고 싶다. 그리고 10년 후에는 완전히 은퇴한 사람으로, 후배들이 일하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데 작은 역할을 한 사람으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이승욱
이승욱

서울과 뉴욕에서 미학과 예술행정을 전공하였다. 독립예술제(현 서울프린지페스티벌)를 비롯하여 다양한 축제기획과 문화예술 교육 및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플랜비문화예술협동조합 대표로 문화예술정책 연구‧개발, 문화예술의 올바른 가치를 추구하는 전문 인력의 교육과 컨설팅, 창의적인 문화예술 프로젝트의 기획과 운영을 통해 더욱 건강하고 풍요로운 지역 문화예술 생태계의 형성에 기여하고 있다. ‘수영성 문화마을’ ‘깡깡이 예술마을’ ‘부산-셰필드 인터시티 아트 프로젝트’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성공리에 이끌었으며, 지역문화지 [안녕 광안리]의 발행인과 <부산청년문화수도 프로젝트> 집행위원장을 맡은 바 있다.
박형준
박형준
부산에서 문학비평을 하고 있으며 부산외국어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piko999@hanmail.net
사진 _ 김태정 사진작가 bebetree2132@naver.com
프로그램 사진 _ 플랜비문화예술협동조합 페이스북 www.facebook.com/planbco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