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李창식은 터와 사람을 만나는 퍼포머(Performer)다. 그의 몸과 일련의 예술 활동은 이런저런 연기적 조건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향해 열려있는 ‘공(空)’과 같아 어느 하나로 고정되지 않은 잠재성이기도 하다. 그는 마치 예술을 통해 무주상보시(無主相布施)를 실천하듯 공동체 안에 이미 내재된 가치와 사랑을 발견하려 애쓰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힘들어도 힘들지 않은 사람이다. 왜냐하면 지난한 예술의 여정에서 마주한 사람들의 삶, 가는 곳곳 구구절절한 터의 역사, 그 자체가 커다란 선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외부인이자 내부인으로 공동체와 뒤섞여 조금 더 나은 삶을 꿈꾸었고 애씀과 실천을 통해 변화를 경험했다. 순례하듯 다양한 지역의 삶과 평화적 소통으로 공생해온 그에게 지금 예술, 예술가는 무엇을 해야 할지 물었다. 그의 예술 여정을 경청하며 때아닌 위로와 용기를 받았다.
자기소개 부탁드린다.
나는 호기심이 많은 사람 같다. ‘호기심’이 뭔가 새로운 걸 경험하고 열기에 좋은 도구잖나. 대학 졸업 후 주로 사회적 이슈와 시대 상황을 맞닥뜨리다 보니 행위예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행위 작업을 꾸준히 모색하면서 영상, 사진, 사운드 등 다양한 매체를 결합하는 작업이 자연스럽게 시도되었고 변화되어야 하는 상황을 스스로 만들어 실천하는 과정을 통해 무언가와 공감하는 것에 익숙해졌던 것 같다.
오랜 시간 동안 설치와 퍼포먼스 작업을 하셨는데 경기북부 수몰 지역 프로젝트, 안정리생활사박물관, 여주 여강길 유랑 프로젝트 등 2009년부터 마을 프로젝트를 하셨다. 이러한 작업으로 전환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
2005년 제주 지역 전역을 유랑하는 ‘문화유목민’ 프로젝트를 4년간 진행했다. 중산간 지역 귤창고에 연극 무대를 만들어 공연도 하고 미술 작가들은 동네 주민들의 삶의 공간이나 담장에 그림을 그리기도 하면서. 당시 공연예술가들이 주로 관객 대상의 공연을 해왔다면 여기서는 4.3의 장소에 가면 그 장소의 영혼들과 같이 공연을 하는 등 그 터와 보이지 않는 시간, 장소와 관계 맺는 작업을 하게 된 거다. 4년간 문화유목민 프로젝트에서 족장 역할을 하면서 익숙하고 소비 지향적인 것으로부터 일탈하여 스스로 가치를 생산해내는 작업의 의미를 돌아보게 되었다. 때때로 주민들에게 이해를 구하고 소통하기 위해 애썼던 경험이 마을 박물관 만들기 사업을 하는 데 토대가 된 것 같다. 그렇게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자연스레 퍼포먼스 활동과는 멀어지게 되었다. 터, 시간, 그리고 사람들과의 소통 속에서 더 큰 의미를 발견하게 되었고 그렇게 찾아낸 가치들을 어떻게 공유할 것인가가 나에게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경기도 의정부시에 위치한 문화살롱 공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 공간 이름이 재미있는데 ‘살롱’과 ‘공’은 어떤 의미인가?
2003년에 ‘스폰치’라는 그룹을 만들었다. 스펀지보다 좀 더 강렬한 메시지를 주기 위해서 이름 붙였다. 스펀지가 물을 흡수했다가도 꽉 짜내면 머금었던 물이 다 사라진다. 고정되고 유형화된 그룹이 아닌 ‘유형과 무형의 공존’이라는 의미를 담고자 했다. 그 의미들이 이후 ‘문화살롱 공’과도 연결된다. 2008년 만든 문화살롱 공은 처음에는 내 개인 작업을 위해 얻었다가 공적 공간으로 써보자 해서 당시 생각이 비슷하고 맥이 닿는 작가 여섯 명이 모였다. 작가들 저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공간을 활용할 수 있는 거리를 만들어 보자 해서 ‘살롱(Salon)’이라는 명칭을 갖게 되었다. 또 흡수하고 소통하는 ‘스폰치’라는 명칭이 ‘공’으로 바뀐 거다. ‘공’이라는 것이 중심일 수도 있고, 비어 있는 것일 수도 있고, 뚫은 공간을 호기심에 들여다보는 것일 수도 있고 또 무한의 공간을 의미하기도 한다.
문화살롱 공에서 작가들과 어떤 작업을 진행했나?
2008년 지하 1층에서 작가중심의 공간으로 출발했다가 1년이 지난 2009년에는 지하뿐 아니라 1층까지 작품 공간으로 사용하게 됐다. 1층에 올라오니 전면 창을 통해 지나가는 주민들이 보이기 시작하더라. 마을에 관심이 생기면서 무언가 마을에 할 수 있는 게 있겠다, 경기북부를 안고 함께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주변을 돌아보기 시작하면서 우연히 연천에 수몰지가 형성되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2000년부터 추진된 한탄강 홍수조절용 댐 건설로 연천군 고문리와 포천 교동마을이 수몰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렇게 고문리에 찾아가 시작하게 된 프로젝트가 <재인폭포상회>(2009)다. 댐 건설로 인해 정을 나누며 살아온 마을 공동체가 붕괴 직전이었다. 예술가들이 깨진 공동체를 다시 봉합하고 연결할 수 있을까, 첨예하게 갈등하고 있는 공동체를 어떻게 이어줄 수 있나를 질문했다. 찬성하는 주민과 반대하는 주민, 수자원공사 사람들 모두의 이야기를 최대한 객관적으로 듣고자 했고 이 과정을 한 시간짜리 다큐멘터리로 담아냈다. 그것을 다 같이 모여 보는 자리에서 주민들 모두가 울었다. ‘저 사람이 나하고 친했는데 저런 마음이 있었구나’ 하며 그간 쌓인 오해를 풀고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며 공감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들의 관계를 연결할 수 있었던 건 바로 서로의 마음을 들어보는 것이었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커뮤니티 아트란 소통을 목적으로 억지로 상황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소통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 내는 것이구나, 예술을 통해 소통의 전제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수몰 지역 집을 해체 복원하는 ‘포천도롱이집 이주프로젝트’도 진행하셨다. 쉽지 않은 결정과 과정이었을 것 같다.
한탄강 댐이 건설되는 상류에 더 크게 수몰되는 포천 관인면 교동마을을 알게 되었다. 이곳에서 2010년 ‘도롱이집 이주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도롱뇽이 많이 살았다 하여 ‘교동’이라 이름 붙여진 이곳에는 50년 넘게 옛날 집을 고수하며 살아온 이수하·김영자 부부의 집이 있었다. 도롱이집으로 명명한 이 부부의 집을 해체하고 이주하는 곳에 복원해 마을 박물관을 만들 것을 제안했다. ‘도롱이집’을 공동체의 구심점으로 삼아 마을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박물관을 만들자, 이곳에 마을 주민들이 사용했던 다양한 물건들과 삶의 이야기들을 모아 놓으면 마을의 역사가 되고, 수몰지 전체를 상징하는 공간으로서의 의미를 갖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수몰 지역의 공동체 훼손은 보상이 이루어지면서 시작된다. 더군다나 첨예하게 갈등이 발생한 지역에서의 공공미술은 실행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프로젝트를 진행한 것은 개인의 문제뿐 아니라 공동체의 기억과 추억을 남기기 위해서였다. “사람이 절망이고 사람이 희망”이라는 말이 있듯이 수몰지에서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지난했던 5년간의 프로젝트 과정에서 결국 공동체 마을 만들기를 성사시키지는 못했지만, 박물관은 수몰지에서 사라지는 것들의 가치를 드러내는 공간으로 남아 여전히 지역과 마을 주민들에게 우리가 회복하고 복원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질문하고 있다.
경기북부 포천, 연천과 같은 도시에서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셨다. 대표님께서 경험한 경기북부는 어떤 곳인가?
사람들이 경기북부 지역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다. 내가 의정부에서 왔다고 하면 ‘의정부에서 사세요? 의정부분 같지 않아요.’ 한다. 어디 지역 사람이라고 명찰을 단 것도 아닌데 왜 그런 편견을 갖게 되는지 의아하다. 경기북부 지역이라고 하면 문화적으로 낙후된 곳, 미군기지뿐만 아니라 군부대와 관련된 지역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일례로 동두천에서 혼혈 아이들을 대상으로 프로그램을 진행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아이들이 들려준 이야기가 있다. 수학여행 가서 만난 다른 지역 아이들이 “너희들 어디서 왔어?”라고 물으면 “천두동”이라고 대답한다고 했다. 자신들이 사는 지역에 대해 불편함을 갖고 있는 지점이 많은 거다. 동두천에서 진행된 프로젝트들을 보면 대체로 지역의 자극적인 사례를 전면에 끄집어내서 진행한 것이 대부분이다. 물론 숨겨진 사실, 불편한 진실을 끌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편으론 화젯거리로써 지역을 보는 게 아닌지. 그러다 보니 진정성 없는 결과로 끝나버리는 경우도 많아 안타깝다. 그러면 마을에 남겨진 사람들은 뭔가? 사람뿐만 아니라 자연환경 또한 마찬가지다. 예술가들이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실행하면서 고민해야 되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새롭게 갈고 닦아야 할 시기가 아닌가 생각한다.
연천에 살면서 시도 쓰고 환경운동 하는 이돈희 선생께 “연천은 어떤 곳입니까?”라고 물었더니 “변방이 있기에 중심이 있다. 연천은 변방이지만 중심을 있게 한 도시다.”라고 하셨다. 연천이라는 지역을 의미 있게 또 자긍심을 느끼게 하는 말씀이었다. 변방은 중심을 움직이게 하는 창조적인 공간이라고도 얘기한다. 주민들에게 지역을 이야기할 때 자극적인 이야기보다 지역에 대한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 지역이 갖고 있는 역사문화생태 상황을 주민들이 의미화하고 자긍심을 가지실 수 있도록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예술적, 교육적 행위이다
연천에 살면서 시도 쓰고 환경운동 하는 이돈희 선생께 “연천은 어떤 곳입니까?”라고 물었더니 “변방이 있기에 중심이 있다. 연천은 변방이지만 중심을 있게 한 도시다.”라고 하셨다. 연천이라는 지역을 의미 있게 또 자긍심을 느끼게 하는 말씀이었다. 변방은 중심을 움직이게 하는 창조적인 공간이라고도 얘기한다. 주민들에게 지역을 이야기할 때 자극적인 이야기보다 지역에 대한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 지역이 갖고 있는 역사문화생태 상황을 주민들이 의미화하고 자긍심을 가지실 수 있도록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예술적, 교육적 행위이다
지역에서 프로젝트 또는 마을 박물관 작업을 하시면서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게 있다면 무엇인가?
2016년도 여주에서 진행한 마을 박물관 형태의 사업 <여주두지>를 보고 연천에서도 이런 유형의 작업을 하면 좋겠다는 제안을 해왔다. <도롱이집> <재인폭포상회> 프로젝트를 통해 연천에 대한 애정이 있었던지라 새로운 유형의 박물관을 만들어 보자 마음을 먹었다. 지자체 홍보관을 만드는 사업이었는데 처음 기대와는 달리 연천군은 지역의 관광자원, 역사적 인물, 자랑할 만한 사건들 등에 주목했다. 연천이 얼마 전 임진강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되었고, 한탄강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등재되었다. 지질·생태 환경이 워낙 훌륭한 곳이긴 하지만 나는 아주 평범한 이야기를 통해서 연천의 가치를 드러내고 싶었다. 지질이라는 것도 그 터에, 그 환경에 벗하고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사람이 없는 곳은 자연환경일 뿐이다. 그래서 53명의 지역 주민을 만나 그들의 삶과 관련된 이야기와 물건을 모았다. 그런 것을 통해 연천의 지질·생태, 환경, 문화, 역사, 접경지역과 관련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1차로 진행된 자료를 연천군 관계자들에게 소개하려고 갔는데 관계자들 표정이 굳어 있는 거다. 이 사업을 이해 못 하겠다는 것이었다. 옆집 어르신, 동네 주민이 무슨 연천군의 대표적인 인물이 될 수 있느냐, 도리어 연천을 욕보이는 것 아니냐는 반응이었다. 결국 30분 정도 브리핑하러 들어갔다가 세 시간 동안 격론을 했다. 그러더니 지역 주민 중 몇 분을 빼자고 했다. 내 자존심도 있지만 자신의 귀중한 걸 내어 준 주민들의 마음을 내가 함부로 재단할 수 없다고 강력하게 얘기했던 기억이 있다. ‘사람이 없는 역사는 빈 자루와 같아서 세울 수가 없다.’ 또 ‘숲은 부러진 나무나 결함 있는 나무를 모두 품어서 하나의 숲을 만든다. 그 나무의 완성은 숲이다.’라는 신영복 선생님의 말씀이 있다. 내게도 사람이 가장 중요한 화두다. 연천 홍보관 명칭도 ‘연천, 사람을 만나다’이다. 모든 결함을 품어서 하나의 숲이 되듯 보이지 않았던 다양한 삶이 연천을 만든다고 믿었다. 프로젝트 작업에서 내게 가장 중요한 건 ‘사람’이다.
프로젝트 하면서 만난 마을 분들과 지금도 종종 전화 통화를 한다. 요즘은 어떤 작업을 하는지, 어떤 고민을 하는지 물어보면 본인들이 자문을 구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필요할 때는 내가 달려가기도 한다. 그렇게 관계를 유지하고 함께 미래를 꿈꿔본다. 지금 코로나19 상황에서 예술가가 해야 할 일이란 무엇인가? 정답을 제시하기보다는 다양한 사례들을 연구하고 발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프로젝트 하면서 만난 마을 분들과 지금도 종종 전화 통화를 한다. 요즘은 어떤 작업을 하는지, 어떤 고민을 하는지 물어보면 본인들이 자문을 구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필요할 때는 내가 달려가기도 한다. 그렇게 관계를 유지하고 함께 미래를 꿈꿔본다. 지금 코로나19 상황에서 예술가가 해야 할 일이란 무엇인가? 정답을 제시하기보다는 다양한 사례들을 연구하고 발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지금 현재의 삶에서 느끼는 가장 시급한 문제가 있다면 무엇인가? 그 문제에 대해 예술, 예술가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최근에 많이 쓰는 글씨가 있다. 바로 ‘사람’의 ‘ㅅ’(시옷)자가 모여 만든 ‘씨’이다. ‘씨’에는 최근의 코로나19와 언택트 상황에서 보이는 상징적 의미가 담겨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에 끊어진 것들을 자연, 환경을 통해 어떻게 엮을 수 있을까? 엮어진 것들이 하나의 강이 되고 길이 되어 온전한 씨를 만들어 내는 프로젝트를 고민하고 있다. 2030년이 되면 지구의 평균 온도가 1.5도씨 올라간다고 한다. 그 순간 불가항력적인 상황이 되고 2050년 3도씨가 더 올라가게 되면 사람은 물론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이 살기가 어렵게 된다. 얼마 전 아프리카에서 수백 마리의 코끼리가 계속 원을 그리며 돌다가 머리를 콕 처박고 죽었다. 인간뿐만 아니라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체가 몸부림을 치고 있다. 연천 지역에서도 아프리카돼지열병 얘기가 쏙 들어갔지만 지금도 돼지열병으로 죽은 멧돼지 사체를 찾아내 묻고, 농가들 관리 점검하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사람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이니 돼지 죽는 것에 대해서 고민 안 하는 거다. 결국 환경의 문제다. 이제 예술가들이 환경 문제를 적극적으로 끌어안아 같이 연구하고 고민하는 유형의 작업으로 바뀌어 나가야 하지 않을까.
박李창식
중앙대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하였고, 설치미술과 행위미술작가로 활동하면서 대안공간 문화살롱 공, 그룹 스폰치를 결성했다. 경기북부 수몰 지역인 연천과 포천에서 공동체 마을 재건을 위한 ‘포천 도롱이집 이주프로젝트’를 비롯하여 평택 안정리생활사박물관, 여주 생활문화전시관 <여주두지>, 한탄강지질공원 <연천군 홍보관>, 연천 아트하우스 조성 아카이브 연구, 연천 에코뮤지엄 마스터플랜 수립을 위한 연구 등 근현대 생활사 발굴 및 보존을 위한 문화예술 활동에 힘썼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경기문화재단, 한국예술인복지재단 등에서 공공미술, 예술인 지원에 관한 자문과 심의를 맡은 바 있으며, 대통령직속 지역발전위원회 문화복지전문위원을 역임했다.
- 김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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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미술가. 아티스트커뮤니티 클리나멘 대표. 독일 카셀국립대학교에서 조형예술을 전공했다. 지금 만나는 사람, 내일 만나는 사람, 일 년 후 만날 누군가가 되기 위해 ‘아무도 아닌 나’가 되려고 애쓴다. 누군가가 되고 또 누군가와 대화하기 위해 질문을 만든다. 예술이 보이지 않는 ‘우리’를 위한 것, 그 보이지 않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 믿으며 예술의 공공성에 대해 고민한다. <빼뻘-주름 프로젝트 2019>, <손손수수:108명의 시민이 참여하여 만드는 손의 대화법 2019> 작업을 진행한 바 있다.
www.facebook.com/dalohyunjoo.kim
사진 _ 이재범 POV스튜디오 andy45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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