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금, 플루트, 피아노 연주자와 한 손에 펜을 쥔 작곡가가 교실을 돌아다니며 즉흥 연주를 시작한다. 대금 가방을 여는 지퍼 소리와 플루트로 내는 날 선 바람 소리, 펜으로 피아노의 현 부분을 긁는 소리 등, 음악가들이 선택한 모든 소리는 음악의 재료가 된다. 이들의 목표는 ‘선’이라는 단어의 다중 의미를 풀어내는 것. 음악과 음악이 아닌 것을 가르는 선(線)의 존재를 재고하며, 예술의 선(善)이 무엇일지를 탐구하는 이들의 창작은 서로 다른 전공의 네 음악가가 함께하는 자유 즉흥연주에서 출발한다.
다른 한편, 성악가와 작곡가, 피아노 연주자 두 명으로 이루어진 팀은 선릉과 정릉이라는 역사적 공간에 관한 현장 리서치 내용을 발표한다. 이들은 서울의 도심지에 있었지만 그동안 쉽게 찾지 않았던 그 거대한 무덤에서 마주했던 압도감을 상세히 묘사한다. 『악학궤범』이 편찬됐던 시기부터 지금까지 고요히 침묵하고 있는 그 무덤의 ‘안과 밖’은 이들이 만들어나갈 음악의 주제다. 이외에도 또 다른 이들은 ‘저잣거리의 음악’이라는 키워드를 소재로 네 명의 피아노 연주자와 함께 아이돌 음악을 재구성하거나, 미술관에서 만난 오브제들을 각자 하나씩 골라 거기서 받은 인상을 음악적으로 풀어내고, 이를 다시 공동의 음악으로 묶는다.
현장학습
자율적 협업의 플랫폼
이 장면들은 2019년 9월 26일,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원의 수업 ‘뉴뮤직프로덕션랩’에서 목격한 수업 현장의 일부다. 작년 가을에 개설되어 올해 2회차를 맞은 이 수업은 작품의 기획부터 실제 공연까지 이어지는 그 기나긴 여정을 한 학기 동안 압축적으로 다룬다. 수업의 목표는 수강생들이 각자 팀을 이루어 신작 공연이 만들어지는 프로세스를 낱낱이 경험해보고, 학기 말에 최종 공연을 올리는 것이다.
수업을 듣는 이들은 음악을 전공하지만 학교에서 함께 모여 자율적으로 음악을 만들어볼 기회가 없었던 음악대학 대학원생과 학부생들이다. 서로 초면인 대여섯 명의 음악가가 만나 한 학기 안에 공연을 올린다는 것이 결코 넉넉한 일정이 아님에도, 이 속도감 있는 창작의 현장에서 수강생들은 음악이 만들어지는 모든 순간에 개입하며 질문과 과정을 공유한다. ‘우리가 만들고 싶은 음악은 무엇인가’라는 최초의 질문부터 어떤 주제에서 창작의 단초를 얻을 것인지, 어떤 리서치를 진행할 것인지, 어떤 방식으로 소통할 것인지, 어떤 과정을 거쳐 음악을 만들 것인지, 공연의 형식은 무엇이 될지 등, 창작에 관한 실질적인 논의들이 도마 위에 오른다.
교수자의 역할도 그간의 정보전달식 강의와 상당히 다르다. 강의내용을 미리 준비해와서 수업 시간에 일방향으로 전달하는 것은 이 수업에서 꽤 드문 ‘특강’으로 여겨진다. 학생들의 창작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수업의 주를 이루는 만큼, 교수자는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는 필드워크 장소를 추천하거나 특수한 악기를 비롯하여 공연에 필요한 제반 사항 준비를 돕는 등 단순 강의를 넘어 프로덕션 차원에서 작업을 지지한다. 또 교수자는 음악 현장에서 조금 더 오래 활동해왔던 경험자로서 학생들에게 피와 살이 될 조언을 던져주는 일종의 멘토 역할도 맡는다. 이 수업을 진행하는 작곡과 이신우 교수는 수업에서 어떤 단계에서 학생들이 지금보다 더 깊은 고민을 해야 할지, 자신이 특정 주제를 음악적으로 표현할 때 맞닥뜨렸던 어려움은 무엇인지 등 창작을 업으로 삼은 이가 후배에게 들려줄 수 있는 솔직한 이야기들을 꺼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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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창작의 프로세스
어찌 보면 ‘음악대학 내 조별 과제 수업’일 뿐이라고 일축할 수도 있겠지만, 이 수업에서 도전하는 것은 창작의 구조가 단단히 고정되어 있던 그간의 음악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의 ‘협업’이다. 장르마다 차이는 있으나, 오늘날 보통 음악대학에서 배울 수 있는 한국음악과 서양음악 분야에서 대체로 창작의 프로세스는 작곡—연주—공연기획으로 이어지는 선형적 구조를 따랐다. 이 구조의 장점은 각자의 업무가 분화된 만큼 전문화된다는 것이었지만, 분명한 한계점도 존재했다. 각자의 일에 대해 점점 더 모르게 될 가능성이 크고, 소통의 여지가 줄어들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런 맥락에서 ‘뉴뮤직프로덕션랩’은 교육 단계에서부터 음악가들의 거리를 좁히고 그 관계를 견고히 다지고자 모든 과정을 함께하는 창작을 시도했다. 그러자 수많은 연쇄효과가 잇따랐다. 이전까지 작곡가가 창작을 도맡았던 것과 달리 성악가/연주자들이 적극적인 공동창작자로 나서자 작곡가는 그들로부터 예상치 못한 아이디어를 얻었고, 자연스레 연주의 몰입도도 한층 높아졌다. 또 서로의 영역을 가까이에서 관찰하는 것도 배움의 큰 부분이었다. 연주자가 오랜 시간 다듬어온 테크닉과 예리한 손끝 감각, 생각을 소리로 실현하는 것에 대한 작곡가의 경험, 호흡과 몸의 움직임에 관한 성악가의 감각 등, 각자가 지닌 특별한 능력은 서로를 보완해주는 동시에 영감의 대상이 됐다. 그뿐만 아니라 작곡을 해보고 싶었지만 방법을 몰라 시도해보지 못했던 성악가/연주자나, 특정 악기를 위한 곡을 쓰고 싶지만 가까이서 접해본 적이 없어서 곡을 쓰지 못했던 작곡가에게 이 수업은 그간의 갈증을 해소해줄 수 있는 창구였다.
그 무엇보다 학생들을 몰입하게 만드는 것은 이들의 작업이 단순히 과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 공연까지 이어진다는 점이었다. 지난해 수업 수강생이자 이번 학기 수업 조교를 맡은 작곡과의 정철헌은 “이 수업에서 팀원들과 함께 다양한 역할을 맡아가며 정말 최초의 구상 단계부터 마지막 공연까지 쭉 경험해봤다는 것이 가장 큰 의미로 남았다”고 말했다. 창작 과정에 다양한 역할로 개입하며 공연을 만든다는 점이 꽤 매력적으로 다가온 것인지, 한 수업 안에서도 여러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중복 참여자들도 눈에 띄었다.
녹음
뉴뮤직프로덕션랩과 미래
수업에서 학생들이 경험하는 것은 단순히 ‘창작 프로세스’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음악을 업으로 삼는 학생들은 여전히 오선보에 음표를 기입하거나 베토벤과 모차르트를 연주하는 일을 여전히 소중하게 여기지만, 이 시대가 사람들이 유튜브에 열광하고 개개인이 ‘콘텐츠 크리에이터’가 되어 승부를 보는 시대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학생들이 스스로 찾은 주제를 발전시켜 공연 형태로 결과물을 완성하는 것은 오늘날 예술가들에게 요구되는 독창적인 콘텐츠 제작을 그들에게 가장 익숙한 형태로 시도해보는 기회이기도 하다. 학생들은 모두가 작곡가이자 연주자이지만, 그보다 앞서 ‘기획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학생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새로운 경험을 제공한다는 크나큰 장점도 있지만, 물론 난점도 존재한다. 이 수업이 한 학기 동안 이루어지는 프로젝트성 수업이다 보니 일회적 경험이 될 우려가 있고, 또 학생들이 창작을 위해 몰입 해야하는 시간이 상당히 많은 만큼 다른 수업과의 밸런스를 잘 조절해야 한다는 점이다. 나아가 세부적인 사항이지만 크레딧, 즉 역할 표기 문제도 있다. 모두가 연주자이자 작곡가이자 기획자로 나선 이 프로젝트에서는 각자 역할을 기존 방식으로 나누는 것이 불가능하고, 그렇게 구분하는 것 또한 이 수업의 목적과는 정반대지점에 위치한다. 약 4개월에 이르는 시간 동안 함께 프로젝트를 일궈온 이들의 새로운 관계를 무어라 명명할 수 있을지, 그것은 이 수업에서 실험해볼 수 있는 또 다른 사안이다. 이것은 음악의 창작과정에 대한 실험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음악의 개념과 존재 방식을 바꿔나갈 수 있는 작은 출발점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몸에 밴 음악적 언어로 즉흥연주를 하며 음악의 경계를 가르는 ‘선’을 탐구하던 수강생들의 모습처럼, 이 수업은 음악가들이 지닌 감각을 기반으로 기존 관념을 조금씩 넘어서며 새로운 형태의 창작과정을 적극적으로 시도한다. 이신우 교수는 “10년은 지나야 수업이 자리를 잡고 어떤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까”라고 예상한다. ‘뉴뮤직프로덕션랩’은 그것이 특히 공고한 교육체계를 유지해왔던 음악대학 내에서 이루어진 변화라는 점에서 그 귀추를 주목할 만하다. 현실의 변화에 조응하는 이 창작자 양성 수업은 음악계의 미래에 과연 어떤 영향을 미칠까. 그 미래의 장면들을 상상해본다.
신예슬
신예슬
음악 비평가, 헤테로포니 동인. 유럽 음악과 그 전통을 따르는 근래의 음악에 관한 의문으로부터 비평적 글쓰기를 시작했다. 서울대학교에서 음악학을 공부했고, 2013 객석예술평론상과 2014 화음평론상을 받았다. 『음악의 사물들』(작업실유령, 2019)을 출간했다.
shinyeasul@naver.com
사진제공 _ 이신우(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