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부터 전북 남원시 산내면, 지리산 자락 아래에서 “삶을 예술로, 예술을 일상으로”라는 슬로건 하에 문화예술 활동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는 여성주의 문화단체 문화기획달. 이들은 마을 농촌여성들과 함께 일상에서 느끼는 불편함을 문화예술을 통해 새롭게 바라보고, 세상의 변화를 위한 예술행동을 적극 실천하고 있어 주목된다. 문화기획달은 달리, 이리, 자정 등 세 명의 활동가가 함께 이끌고 있다. 그중 자정(그림지기)과 이리(행동지기), 두 활동가를 만나 이들이 젠더적 관점에서 세상의 불편함을 예술을 통해 말하기 시작한 계기, 그리고 지역에서의 이들의 활동이 마주하는 다양한 도전과 의미를 들어보았다.
최근 ‘문화다움기획상131’을 수상하게 되면서 문화기획달의 여성주의 문화예술활동이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지리산, 산내면에 들어오게 된 계기와 활동가들의 협업 배경은 무엇인가?
이리 : 내려온 계기는 각자 조금씩 다르다. 나의 경우 7년 전 귀농 목적으로 내려왔다. 당시 마을공동체 단체에서 활동가로 일했었는데, 여기서의 삶이 기대했던 바와 달라 기존 공동체 조직이나 활동에 한계를 느끼게 되었다. 그러던 중 각자 시골 생활에서 느끼게 된 남존여비 사상이나 마초적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공유하다가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자정 : 귀촌한 지는 8년째다. 서울에서 공공미술 작업을 하면서 녹색평론 읽기모임에 참여하면서 농촌의 삶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산내면 마을공동체 단체에서 방과후 교사로 직장을 구해 내려왔었다. 막상 내려와서 보니 내가 생각했던 생태주의, 공동체 문화, 시골 마을 생활이 다른 것을 느끼게 되었다.
어떤 점들이 달랐나?
이리 : 사실 전혀 젠더 감수성 없이 회사생활 하면서 페미니즘의 ‘페’자도 모르던 차에 귀농했었다. 그러다 남자와 여자가 들어가는 문이 다른 것 같은 상황들을 접하고 놀라게 되었다. 마을공동체 활동을 하다 보면 부엌일이 많이 결합되는데 당연히 여자들은 부녀자로 동원되어 밥하고 뒷정리하고 시중드는 일을 했다. 마치 50년 100년 전으로 퇴보한 것 같은 광경을 마주하면서 공동체 생활의 평화로움이나 자연으로의 회귀, 소박한 삶에 대한 환상이 깨지게 되었다.
자정 : 나도 비슷했다. 문제의식은 있었지만 서울에서는 그리 느끼지 못했던 불편함이 여기서는 일상의 너무 가까운 곳에서 훅하고 들어오는 것이 불편하고, 나만 그런 것인가 싶기도 했다. 그즈음이었던 2014년경 기획자인 달리가 [지글스](지리산에서 글쓰는 여자들)라는 계간지 활동을 먼저 시작했고, 잡지의 한 코너가 여성들의 수다로 이뤄졌었다. 그때 잡지 필진으로 참여하면서 함께 했던 마을 여성들과 함께 이런 문제의식을 공유하게 되었다. 그 이야기를 담아 「농촌 성문화 다시보기」 자료집을 만들기도 했지만, 당시 페미니즘 단어를 정면에 내세우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그 활동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문화예술 여성주의 단체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달리가 1인 기획자로 먼저 시작했고, 세 명 활동가 체제로 본격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2015년 ‘살롱 드 마고’라는 공간을 마련하게 되면서부터다.
문화기획달이 추구하는 활동의 핵심키워드를 ‘재미, 창조, 여성성’으로 강조하는 것이 흥미롭다. 특별한 이유가 있다면?
자정 : 만나는 대상에게 설명하기 위한 것이기보다, 우리 세 명이 항상 재미있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것, 관심 있는 것을 놓고 기획하고 싶었다. ‘삶을 예술로, 예술을 일상으로’라는 슬로건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무얼 할 때 회의가 아니라 ‘달수다’라고 부른다. 세 명이다 보니 결정구조가 단순하기도 하지만, 수다 떨면서 같이 결정하고 농담처럼 나온 말을 아이디어화 하기도 한다. 누군가 장난처럼 던진 말을 그대로 포스터 문구로 담기도 하고, 날스러운 것을 차용해서 많이 쓰기도 한다.
문화기획달의 최근 주요활동, 그리고 가장 주력하고 있는 활동은 무엇인가?
이리 : 공동으로 하는 활동과 개인 활동이 있는데, 페미니즘 관점에서 최근 같이 하고 있는 것은 스쿨미투다. 지방의 스쿨미투 사례를 수집하고 인터뷰해서 내용을 분석하는 일을 하고 있다. 작년 지역 고등학교에서 스쿨미투 사건에 당사자로 개입하게 되면서 문제의식을 느꼈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
자정 : 작년에 ‘농촌 페미니즘-예술인문 공부 공동체(예공공)’ 활동을 통해 농촌 여성의 인권과 문화 관점에서 농촌 성폭력, 여성학자 박이은실 선생님의 특강, 남원지역 농촌교육 현실, 농촌 비혼여성 실태나 신화 속 이야기, 페미니즘 동화책 읽기 등 다양한 주제를 다뤘다.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숲속에서 공동촬영을 하고 이를 페미니즘 이미지로 구현하는 ‘페미스크린’ 작업도 진행했다.
이리 : 당시 남원 춘향제 모니터링을 계기로 마을 여성들과 고전 읽기를 시작했다. 행사가 춘향선발대회, 신관사또부임행차 등으로 이뤄지는데, 기저에 깔린 기생문화가 남원의 대표적인 문화상품으로 둔갑하는 것을 보고 많은 문제의식을 느꼈다. 그러다 원본을 제대로 읽고 비판해보자는 취지에서 『춘향전』 다시 읽기를 시작했던 거다. 지고지순한 사랑, 절개의 상징 등 남성들이 원하는 개념녀 이미지로 고착된 춘향이 아닌, 잘못된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저항정신 관점에서의 새로운 해석과 비판 등을 시도하고자 했다.
자정 : 올해는 또 다른 남원 지역의 고전으로 알려진 『흥부전』을 함께 읽고 있다. ‘왜 흥부 부인에게는 이름이 없을까?’라는 의문에서 시작해서 ‘흥부전’에 담겨 있는 여성혐오 코드 등을 함께 분석하고 논의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보드게임도 만들어보려고 한다. 또 마을분들과 함께 지역특성화 사업의 하나로 타로와 실크스크린, 테피스트리, 업사이클링 바느질을 하나로 엮어 진행하는 ‘블루밍’ 교육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문화예술교육 활동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자정 : 2015년 현재의 공간을 마련하기 바로 직전에 ‘살롱303’이란 이름으로 공공 지원을 받아 타로와 미술을 연계한 교육프로그램을 개발했던 것이 처음이었다. 시골이다 보니 도시와 달리 문화예술을 접할 기회가 적은데, 미술 같은 예술활동에 관심 가지는 마을 분들이 많았다. 참여했던 주민들의 반응도 좋았고, 장기적으로 했으면 하는 의견이 많았다.
타로와 실크스크린, 공예를 연결하는 접근방식이 인상적이다.
이리 : 타로 읽기는 달리가 담당하고 미술 작업은 자정이 주로 진행하는데 교육방식에서 ‘자기의 이야기를 끌어내는’ 것에 주력하는 편이다. 참여자에게 그냥 자신의 이야기를 하거나, 그려보라고 하면 선뜻 하기 어렵다. 타로카드를 같이 보고 왜 이 그림이 나왔을까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끌어낼 수 있다.
자정 : 타로가 문화예술교육이 아니라는 얘기도 들었던 적 있다.(웃음) 드로잉이나 바느질같이 기술적인 것도 좋지만, 우리는 ‘여성의 스토리텔링’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 점에서 타로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도록 만드는 좋은 매개가 될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이야기와 에너지를 이미지화해서 실크스크린으로 표현하도록 하는 등 여성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담는 방식으로 진행하는데, 참여자 호응이 상당히 좋다.
예전 [지글스] 잡지뿐 아니라, 최근 ‘예공공’ 활동이나 스쿨미투 등 문화기획달이 진행하는 거의 모든 작업에서 여성 ‘스스로’의 이야기를 끌어내어 ‘기록’을 통해 역사성을 부여하는 일관된 방식이 인상적이다.
이리 : 원래 글 쓰는 일을 좋아하기도 하고, 궁금하면 파헤쳐 보는 편이다. 그리고 이를 책으로 남기는 것이 익숙하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여성의 이야기를 드러내고 담아내는 과정에서 기록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자정 : 인쇄물을 남기는 것이 여성들에게 임파워링(empowering)이 많이 되기도 한다. 블루밍(문화예술교육) 활동을 하고 나면 늘 기록을 남기는데, 화집은 거의 다 나갔다. 교육 마무리 단계에서 작은 전시도 진행하는데, 거창한 공간이 아님에도 전시된 자신들의 작품을 보며 참여자들이 매우 뿌듯해 한다. 열망이 많은 분들이 주로 참여하기 때문에 실제 작업도 잘 나오는 편이다. 작년에는 마을 분들이 마을지도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의견을 내서 참여자들이 자기가 그리고 싶은 것을 한 개씩 담아 ‘산내면 마을지도’를 만들기도 했다. 또 비혼여성들이 가족 중심적 귀촌 문화에서 겪게 되는 이야기를 엮어 자료집을 내기도 했다.
산내면은 귀촌인들에게 각광을 받아온 대표적인 마을공동체 지역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곳에서 지난 5년간 문화기획달이 농촌 페미니즘 관점에서의 문화예술활동을 묵묵히 이어오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끈끈하게 이어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자정 : 산내면은 주민이 2천여 명 규모인데, 그중 3분의 1이 귀농 인구로 전라북도에서 유일하게 인구가 증가하는 지역이다. 50대 이하 젊은 분들은 대부분 귀촌 인구로 보면 된다. 우리도 내려온 지 오래되다 보니 우리가 주로 접하는 문제들은 주로 귀농/선주민 간의 차이이기보다는 세대 간 차이에 가깝다. 우리 활동은 이 지역이 너무 좋아서 이 마을을 살기 좋은 마을로 바꾸고 싶다는 차원에서 시작했던 것이기보다는, 막상 여기서 살아야 하는 상황에서 불편한 부분들이 발견되어 이를 바꿔보자는 차원에서 출발했던 점이 컸다.
이리 : 산내면은 가시적으로 페미니즘 활동을 하시는 분이 많은 편이다. 전부는 아니지만 우리와 함께 했던 여성들이 파수꾼처럼 우리를 지지해주고 ‘뒷배’가 되어주기 때문에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외부에서 상을 받은 것이 많은 도움이 되기도 한다. 최근에는 ‘성폭력 근절을 위한 지리산 여성회의’같이 문제의식을 공유한 단체도 생기고 연대하는 등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지역에 완전히 스며들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한쪽에서는 여전히 우리 활동이 마을공동체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보는 이들도 있기 때문이다. 특강이나 워크숍 의뢰도 오히려 다른 지역에서 더 많이 들어오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산내면이라는 지역을 넘어서는 외연적 확장에 대한 고민도 있다.
자정 : 그럼에도 우리 활동을 지속할 수 있는 가장 큰 힘 중 하나는 여성들이 변화하는 것을 목격하기 때문이다. 이 지역에는 배우러 간다고 해도 집 밖으로 나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여성들이 많다. 자신을 위해서 무엇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어렵고, 시골이라 차가 없으면 움직이기 어렵다. 여러 가지 이유로 고립될 수 있는 상황 속에서 프로그램 참여를 통해 서로 지지할 수 있는 끈끈함과 연대가 생기는 것 같다. 페미니즘이 익숙하지도 않고 시부모님 모시고 살면서 운전도 어려워 고립된 상황에 있던 분이 있었다. 우리를 만나면서 어릴 적 꿈이었던 동화작가로서 글을 써서 책도 내고, 강사 활동도 하게 되셨다. 외출도 어렵던 분이 경제력을 가지게 되면서 집안에서의 발언권도 가지게 되고, 활동영역이 넓어졌다. 이런 변화를 보면 영 변하지 않는 것은 아니구나, 이런 것들이 힘이 되는 것 같다.
예술가나 문화예술교육 활동가들이 여성주의, 지역, 예술의 일상성에 대한 가치와 관심을 꾸준히 가지고 가기 위해서 어떤 태도나 관점이 필요할까?
자정 : 우리의 경우 기획할 때 일상에서 느껴지는 문제나 불편함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 문제를 어떻게 문화예술적으로 풀어내고 변화를 줄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해 지속적으로 고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문제를 바라보는 눈을 키우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리 : 제가 볼 때 여성주의 활동은 두 가지가 있는 것 같다. 대의를 보고 접근하는 방식이 있는가 하면, 당사자로서의 문제해결을 위해 기획에 녹여내는 방식이 있을 수 있다. 우리는 당사자로서 일상에서 불편했던 부분, 집에 가서도 계속 생각나고 잠 못 들게 하는 것들을 기록한다. 그리고 이것들을 일상적인 수다를 통해 지속적으로 공유하는 것이 기획의 밑받침이 되는 것 같다. 우리 활동의 특성상 백래시(backlash)가 발생하기도 하고, 과정에서는 문제가 늘 생기기 마련이지만, 그걸 어떻게 하면 또 재미있는 방식으로 풀어볼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활동을 이어가게 되는 것 같다.
자정·이리
문화기획달 기획자. 자정은 서울에서 ‘문전성시’ 공공미술 프로젝트에서 함께 작업하던 작가들과 녹색평론 읽기 모임을 하며 생태, 농촌의 삶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2011년 산내면으로 귀촌했다. 이리는 문학작가로 글쓰기에 좀 더 집중하기 위해 귀농을 결심하고 2012년 산내면으로 귀농하였다. 2015년 자정, 이리, 달리 세 명의 기획자가 함께 공간 ‘살롱 드 마고’를 마련하면서 문화기획달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페미니즘·성교육, 타로 상담 교육, 미술교육(드로잉, 실크스크린) 등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으로 지역 여성·남성, 청소년과 함께하고 있다. 성평등한 학교를 꿈꾸는 교사들의 모임 ‘성평등 연구교사 모임’, 지역 여성공무원 리더십 임파워링 타로 워크숍 ‘슬기로운 직장생활 W’, 지역 여성 주민과 함께하는 ‘블루밍 : 살림’ 등을 하고 있다. 페미니즘 캠페인 소식지 [회오리와 친구들], 생활 밀착형 B급 교양 문예지 [지글스](2014~2017, 총 16호), 『한 땀 한 땀 시골살이』 등 지리산 산내마을 여성들과 함께 기획·제작하는 출판 프로젝트로 여성들의 이야기와 활동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사진 _ 채홍필(빈둥협동조합) pathos1895@daum.net
- 최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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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아르떼365] 편집위원. 정동극장, 아트선재센터, 세종솔로이스츠 등에서 공연기획과 마케팅 업무를 경험했고, 미국 뉴욕대학교 공연예술행정학 석사를 마치고 영국 워릭대학교에서 창의성 담론에 대한 연구로 문화정책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여러 대학에서 문화예술행정, 예술경영 등을 가르치기도 했으며, 한국연구재단 지원의 박사후연구원을 거쳐 현재는 한국문화관광연구원 부연구위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philoart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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