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이주노동자 방송국으로 시작하여, 샐러드 TV를 거쳐 극단 샐러드 활동을 통해 이주민과 정주민의 문화적 경계를 뛰어넘는 소통을 꾀하고 있는 박경주 대표를 만났다. 월드 와이드 웹(world wide web)으로 엮여 세계가 하나의 거대한 사이버 바구니를 형성하는 것 못지않게 땅 위에선 정주와 이주가 분주히 교차하면서 이질적 문화가 뒤섞인 샐러드볼(Salad Bowl)*이 곳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특히 넘나들 수 있는 국경 하나 없이 고립된 섬과도 같았던 우리나라의 다문화사회로의 진입은 요 몇 년 사이 매우 빨라서 아무런 준비도 없이 손님을 맞은 형국과도 같다. 숨 가쁜 변화의 속도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미 14년째 이주민들과 어울려 살고 있는 박경주 작가의 입장이 궁금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세상의 변화와 예술(가)의 역할, 예술교육의 방향 등에 대한 소중한 의견을 듣는 시간을 가졌다.
* 샐러드볼 이론은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자는 이론으로 국가라는 큰 그릇 안에서 다양한 문화들이 각자의 고유한 맛을 가지고 샐러드처럼 함께 어울리는 맛을 만들어나가는 것을 뜻한다.
2005년 이주노동자 방송국으로 활동을 시작하셨는데, ‘다문화’라는 용어조차 익숙하지 않던 때가 아닌가 싶다. ‘다문화’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1993년 2월 독일에 유학 가서 겪었던 황인종으로서의 자각이 계기가 되었다. 네오나치가 활동을 심하게 할 때라 지하철 같은 공공장소에서 불안, 모멸 같은 감정들을 처음으로 강하게 느끼게 되었고, 그때 ‘아, 나는 노란 얼굴의 아시아인이었구나’라는 사실을 직면하게 되었다. 그 이후부터 사람들을 바라볼 때, 특히 외국인을 바라볼 때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는 버릇이 생겼다. 귀국 후 이주 노동자들을 많이 볼 수 있었고, 그들이 처한 상황을 조금 알게 되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작가로서 예술 프로젝트로 해보려고 했는데 한계가 많이 느껴졌다. 특히 주류 언론의 단순 보도 뒤에 가려진 미시적인 이야기를 취재하고 공유하고 싶어서 아시아 다국어 방송을 시작하게 되었다.
사회 현실에 적극 개입하여 당사자들과 함께 활동하고 있는데, 미술 전공자로서 흔치 않은 경우라고 생각된다. 어떤 동기와 판단이 쉽지 않은 활동을 지금까지 이어오게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미술을 전공하면서 알고 있던 예술사 속에 내가 속해 있지 않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게 된 때가 있었다. 백인, 남성 중심의 미술사를 아무 생각 없이 배워온 데 대한 반성과 함께 서양 예술사의 흐름 속에서 작품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일반적인 창작활동에 대해서 회의감이 일었다. 그런 심리적 변화로 인해 실험 영화를 전공하게도 됐고, 귀국 후 한국의 변화된 상황들이 좀 더 행동적인 예술 활동을 하게끔 한 것 같다. 작업실에서 작품을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사건과 사람들을 직접 만나며 활동하는, 액티비스트로서의 예술가가 체질적으로 더 맞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삼면이 바다이고 대륙연결통로가 막혀 있는 분단된 반도 국가에서 살아왔기에 국경은 매우 낯설고 견고하고 엄격한 경계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이주민, 이문화에 대한 배타성 또한 우리의 공통된 특질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주민들의 문제를 어떻게 당사자 시선으로 볼 수 있을 만큼 동화될 수 있었나?
처음부터 동화되었던 건 아니다. 매년 12월이면 그만두려고 하다가 단원들이 안 나가니까 그냥 “알았어, 1년만 더 하자.” 하면서 유지하고 있다. (웃음) 타인에 의해 배제된 경험을 당하고 나면 함부로 배타적이 될 수 없다고 본다. 내 일과 남의 일의 경계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해보는 계기가 될 테니까. 처음 방송국으로 시작했을 때 여러 가지 닉네임으로 취재도 직접 다 하고 기사를 쓰면서 현장에서 배운 게 많다. 출입국 사무소에 항의하러 가서 취재하면서 봤던 것들, 또 10년째 추적하며 작업하고 있는 베트남 여성의 사망 사건 등 깊이 들어가다 보면 몰랐던 진실을 하나하나 알게 되고, 그런 진실의 힘이 이들과 더 단단하게 결속시켜주는 것 같다. 알게 된 이상 얘기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계속하고 있다.
극단 샐러드의 정체성과 관련된 질문인데, 샐러드 활동을 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직접 겪은 이야기가 아니면 안 한다는 고집스러운 원칙이 있다. 여수 외국인보호소 화재 사건 공연했을 때 관객들이 죽은 영혼이 온 것 같았다고, 소름 끼쳤다고 놀라더라. 그게 바로 실제로 겪은 당사자로부터 나오는 어마어마한 힘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극단의 정체성을 잘 함축할 수 있는 핵심어는 ‘당사자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누락된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다. 역사는 사건의 기록이고, 그 축적된 기록이 있어야 새로운 것을 쓸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술사는 백인 남성들의 카르텔로부터 비롯된 것이어서 배제된 기록들이 너무 많다. 특히 황인종, 아시아 여성들의 이야기는 변방 중에서도 변방에 위치해 있다. 그들의 미술사를 쓰고 싶다.
사회적 소수자 혹은 이주민들의 당사자로서의 발언을 돕고, 그것들이 주류의 역사 속에 묻혀버리지 않게끔 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인데, 예술가가 이러한 활동을 할 때 차별성은 무엇이라고 볼 수 있나?
본래 예술은 소통의 도구이지 않나. 좋은 예술가라면 나름대로 개발한 소통의 방법, 도구를 소유하고 있다고 본다. 그게 그림이냐, 사진이냐, 아니면 영화냐 그런 차이일 것이다. 예술가가 사회적인 문제를 다룰 때 다른 사회운동이나 NGO들과 다른 지점은 어떤 방법, 어떤 도구를 사용할 것인가에 대해 매우 집요하게 파고든다는 점일 것이다. 저 또한 ‘이렇게 한번 해볼까? 남들이 하지 않은 방법은 뭐가 있을까?’ 하면서 새롭고 적절한 소통의 도구들을 탐색하고 개발하고 실행하는 과정에 힘을 쏟고 있다. 다른 한편으론 소수자들이나 사회적 약자들의 이미지를 이용하거나 대상화하는 것을 항상 경계한다. 작업의 소재거리로 다루면서 자기가 해결해 준 것처럼 구는 작가가 꽤 있는데, 문제를 해결하는 게 예술가의 역할은 아니다. 사회 문제를 다루는 예술가의 역할에 대한 나름의 신념이 있기 때문에 밖에서 사람들을 만날 때 제 신분을 ‘작가’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저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방법을 고등학교나 대학에서가 아니고, 샐러드에서 일하면서 배웠다. 참 슬픈 얘기다. 예술 공부를 하면서 딱 장착되었어야 할 무기가 이들과 같이 활동을 하면서 비로소 생겼으니까.
앞서 당사자성이라는 다소 어려운 말을 쓰셨는데, 박경주 작가의 세계관, 예술관이 잘 담긴 표현으로 이해된다. 문화적인 토대가 각각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이 겪은 것을 극으로 만들어서 무대에서 직접 보여주는 것이 극단 샐러드가 지니는 당사자성의 대단한 힘이라고 생각된다. 그런 힘을 잘 전달할 수 있는 형식이라는 판단에서 방문 공연 활동을 지속하고 있는 것인가?
그동안 유튜브로도 해봤고, 유스트림도, 페이스북도 해봤다. 관객이 많이 보는 게 중요하고 이 문제를 알려야 하니까. 하지만 무대를 실제로 보는 직접적인 대면이 더 중요하다. 무대하고 객석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아름다운 에너지를 매번 느낀다. 공연이 잘 됐을 때는 마지막에 그 에너지가 정말 폭죽처럼 터진다. 그런 예술을 어떻게 끊을 수가 있을까. 공기, 호흡 이런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섞여서 직접 그 장소에 몸이 있었기 때문에 느끼는 소통, 잊을 수 없는 하나의 자각, 그런 것들에 대한 고집이라고 할 수 있다.
마샬 맥루한의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말이 떠오른다. 같은 콘텐츠도 형식이 지니는 특성에 따라 다르게 전달될 수 있고, 바로 그 맥락에서 사회적 주제를 다루는 예술가의 역할이 특별해진다는 의견으로 해석된다. 그런 점에서 소통 형식에 대한 제대로 된 학습이 중요하지만, 그 이전에 남의 얘기를 더 이상 남의 일로 보지 않는 시선이나 태도를 갖춰야만 형식의 탐구 과정이 절실해진다고 본다. 우리의 전문적 예술교육이 그런 것을 잘 교육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앞서 얘기했듯 예술의 본질을 소통으로 본다면 그 소통의 매개 역할을 제대로 담당하는 사람을 프로페셔널한 아티스트라고 할 수 있다. 다음 주에 대학로에서 하는 공연은 뮤지컬인데, 노래가 완성되는 무대를 보고 싶은 욕심에 한국인 배우를 많이 썼다. 그런데 연습할 때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다. 전공자로서 배워 온 연기를 그대로 하는 배우가 많아서 그렇다. 예를 들면, 무대에서 돌 때는 라운드로 돌아야 해, 무대 위에서는 등을 보여주면 안 돼, 그런 규칙만 지키면서 연기하느라 정작 자기 문제가 뭔지 모른다. 제대로 된 예술교육에는 어떤 상황이나 사건의 당사자가 되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는 과정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남의 얘기로부터 시작되지만 한 예술가가 그것을 자신의 예술세계로 끌어들이는 순간, 얘기의 주체가 되어버리는 정도가 되어야 소통의 힘이 생긴다.
역지사지의 태도는 예술가뿐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 모두에게 중요하게 요구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태도를 기르는 데 있어서 예술교육이 담당해야 할 역할이 있다면 무엇일까?
우선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워야 할 것은 지식이 아니라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하고 삶의 행복을 추구해 가고자 하는 의지력이다. 만일 복지제도가 좋아져서 국민에게 월급을 주는 때가 온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무엇을 추구하며 살 게 될 것인가 하는 생각을 가끔 한다. 주당 52시간 넘게 일하면서도 빚을 내서 집 사고, 빚 갚느라 더 열심히 일하다가, 결국 삶의 여유가 생겼을 때는 죽음에 가까이 와 있는 삶. 사실 1년에 한 달도 쉬지 못하는 중노동이다. 자신의 삶이 분주하고 피폐한데 타인의 삶과 사회의 이면을 돌아볼 겨를이 있을까? 이제 삶을 바라보는 시선도 추구하는 가치도 바뀌어야 한다. 그렇게 변화하는 데에 교육이 기여하려면 예술교육을 중심으로 여러 교과목이 통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술은 무엇이건 품고 뒤섞어 어우러지게 할 수 있는 ‘샐러드볼’ 같은 특성을 지니고 있다. 교과목 통합을 통해 문제해결력과 사고의 주체성을 기르는 북유럽교육을 참고해 볼 만하다.
“예술가의 상투적 역할 내에서 창의성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내에서 예술가가 할 일을 찾아내고, 수행하는 데에 창의적 역량을 쏟는 예술가이고 싶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매우 공감이 가는 ‘작가관’이다. 최근에 창의적 역량을 투여해 얻은 성과가 있다면 이야기해달라.
본성적으로 사회 정의, 진실 찾기 등에 강한 끌림을 느낀다. 그래서인지 진실은 제 대본에 자주 나오는 단어이다. 베트남 여성 사망 사건을 10년째 추적하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진실을 대하거나 다루는 태도가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망자의 어머니가 찾고 있는 진실과 제가 찾고 있는 진실, 또 시민단체나 도움을 주시는 분들이 찾은 진실, 경찰에서 찾았던 것 모두 서로 달랐다. 자기 입장에서 필요한 진실만 받아들이고 그걸 이용만 하려 들뿐, 진실 그 자체의 무게나 가치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내가 찾으려는 진실은 무엇일까 하는 질문이 생기게 되었고, 그 결과 ‘인격화된 진실’이라고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제가 집요하게 추적한 것은 누구를 위해, 혹은 누구에 의해 이용되는 진실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체처럼 보호되고 존중되어야 하는 가치를 지니고 있는 진실 그 자체였던 것이다. 예술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예술에 재능이 있는 사람들의 창의성이 발휘되는 지점은 이런 각성에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앞으로 건강하게 작업을 유지하는 한 진실이라는 가치가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처럼 돋보일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다. 예술은 진실을 담아야 하잖나.
‘세상(사람)을 보는 따뜻하고, 평등하고, 섬세한 시선’이 박경주 작가로 하여금 샐러드 활동을 시작하게끔 했다면 앞으로의 활동은 진실의 가치를 바로 세우는 일에 집중될 것으로 기대된다. 여러 사정에 처한 사람들이 복잡하게 얽히는 세상으로 변해갈수록 당사자성을 실행하는 사회적 실천으로서의 예술 행위는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마지막으로 현재 가장 공을 들이고 있는 일이 있다면 말씀해달라.
12월에 서울혁신파크 내에 있는 세마창고에서 개인전을 한다. 14년 만에 여는 개인전인데, 10년 동안 추적했던 베트남 여성 사망 사건에 대한 기록을 가지고 3년째 다큐멘터리로 만들고 있다. 영화와 함께, 관련된 퍼포먼스, 설치작업을 가지고 전시를 해보려고 한다.
박경주
극단 샐러드 대표. 미술작가. 홍익대학교 판화과 학사, 독일 브라운슈바익 국립조형예술대학교 실험영화과 석사, 베를린 국립예술대학교 문맥예술과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이주노동자 방송국 설립자 및 대표, 다문화 방송국 샐러드TV 설립자 및 대표, 문화횡단주의 축제 뜨네프 총감독을 역임했다. 2009년 사회적기업 다문화 극단 샐러드를 설립하고 현재 대표, 작가, 연출가로 활동하고 있다. <마살라 뮤지컬> <하롱뚜뚜> <아리와 찌민> 등 다수의 뮤지컬 작품과 페이스북 라이브 스트리밍 <공소시효>(2018), 유튜브 라이브 스트리밍 <여수 처음 중간 끝 - 진실아 미안해>(2017) 등 생방송 실험극을 극본·연출·제작했다. 개인전 《이주여성의 삶》(2005), 그룹전 《클럽몬스터展》(2017) 등 전시활동도 꾸준히 하고 있다. 인터넷언론 특별상(2007), 다문화와 함께하는 올해의 여성문화인상 을주상(2009), 심청효행대상 다문화 도우미 대상, LG와 함께하는 동아 다문화상 사회공헌 단체상(2017)을 수상했다.
사진 _ 이재범 POV스튜디오 andy45a@naver.com
- 정원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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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아르떼365] 편집위원. 홍익대학교 서양화과(학사, 석사)를 졸업하고 독일 카셀종합대학교에서 조형예술(석사)을 전공했다. 《명사와 동사 사이의 아포리즘》 《展示展 혹은 轉市展》 《지독한 노동》 등 작품 활동과 함께 《북아현동에서 잃어버린 마르티스를 찾습니다》(2008) 총감독 등 다수의 예술프로젝트에 참여했다. 현재 추계예술대학교 판화과 교수로 재직하며 미술의 공공성을 강조하는 수업을 하고 있다.
wachju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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