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웹진 [아르떼 365] 편집위원회의에서 주요하게 논의한 것은 공간을 구획하는 새의 조망보다는 땅에 무늬를 내며 기어가는 벌레의 포월(匍越)에 있었다. 사람들은 주저 없이 안석희 마을온예술협동조합 이사를 추천했다. 다양한 지역에서 터의 무늬를 몸소 새겨온 그는 신촌에선 꽃다지를, 구로와 부산에선 노리단을, 성북에선 마을온예술을, 도봉에선 평화문화진지를 이끌며 문화예술현장의 시대적 진화를 개척한 최적의 인물이었다.
터의 고유한 무늬, 지역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문화예술교육을 발굴하는 것이 최근 우리의 주 관심사다. 선생님께선 다양한 지역에서 선구적인 프로그램을 이끌어 왔다.
지역마다 터의 무늬가 다른 것은 당연하다. 고유의 정체성을 풍성하게 드러내는 것이 문화예술교육의 역할이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휘발시키는 반작용이 일어나기도 한다. 평준화나 몰개성을 조장하는 대중매체와 사회의 압력 탓이다. 모든 프로그램 기획엔 DNA처럼 이런 평준화의 유혹이 새겨져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선 관, 지역 유지, 기업가, 활동가, 청소년 등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경청하는 것이 중요하다.
구로와 부산에서 진행되었던 노리단의 같고도 다른 모습이 궁금하다.
구로에서 시작된 노리단을 부산에서 새로이 뿌리내렸을 때, 항구도시에 맞는 악기와 프로그램, 공연 형태를 개발하려 노력했다. 교육과 공연, 악기 제작이 한데 어우러지는 노리단의 정체성은 유지하되 부산의 역사와 지리적 특징, 사회적 성향을 파고들며 지역민과 유대를 만들어 갔다. 산업폐기물이나 생활용품을 활용해 악기를 제작했는데 서울과 부산의 서로 다른 조건과 환경이 반영되었다.
도봉구에선 평화문화진지 운영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한국전 당시 대전차 방호시설이었던 곳을 문화예술 창작공간으로 탈바꿈해 그 의미가 깊다. 평화라는 화두로 어떤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가.
‘플레이 피스(Play Peace)’는 가족 단위 놀이 프로그램으로 특히 주민들의 호응이 좋았다. 너른 잔디밭에서 아이들이 부모들과 함께 놀이대장, 브라질리언 퍼커션인 바투카다 등 여러 놀이를 진행하며 도봉에 새로운 문화적 표현양식을 소개하고 공간에 어울리는 놀이 문화를 만드는 목적이 있었다. 다만 아쉬운 점도 있었다.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부모들이 놀이의 공동 기획자가 되길 바랐는데, 섬세한 기획으로 욕구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내 아이가 어떻게 놀 때 즐거워할까, 집으로 돌아가서 내가 아이와 어떻게 놀아주면 좋을까를 궁금해하기를 기대했지만 거기까지 나아가진 못했다. 부모 역시 문화예술교육의 주체가 되어 아이들의 역동을 나누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저 보고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직접 겪고 만나는 비대면을 극복하는 공동체 활동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로 들린다.
평화에 대한 화두는 몸의 발견으로부터 자연스레 연결되었다. 갑상선 기능 항진증을 겪으며 알렉산더 테크닉(Alexander Technique)을 접했다. 내 몸을 관찰하며 스스로 발견하는 과정에 흥미를 느꼈다. 몸의 긴장 즉 비틀어진 좌우의 불균형을 스스로 바로잡아 평화에 이르는 바디워크에 심취한 것이다. 이 작업이 평화문화진지에서 진행되었던 ‘평화로운 몸, 두 가지 길-알렉산더 테크닉과 파쿠르’ 프로그램으로 이어졌다.
성북의 ‘마을온예술’은 문화예술을 통해 마을과 교육 현장을 연결한다. 특히 기능이나 장르에 고립되지 않은 통합예술교육을 지향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여러 장르의 예술강사가 이 협동조합의 구성원이다. 과학기술과 연극, 패션과 웹툰 등 서로 다른 분야가 짝을 이루면서 협력적인 파트너십을 개척하고 있다. 자기 장르에 고립되다 보면 기술을 익히는 단계별 교육과정에 매몰되기에 십상이다. 경계를 넘나드는 교류를 통해 아예 새로운 시각으로 자유로운 감각을 일깨우는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미디어나 과학기술을 활용하여 개발한 통합예술교육 프로그램도 여럿이다. 왜 예술교육과 문화예술교육이 따로 분리되었냐는 문제의식은 이미 진부해진 지 오래다. 예술가를 양성하는데 방점을 둔 예술교육과 예술을 통해 개인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데 방점을 둔 문화예술교육은 서로 다른 것이지만 근본적으로 예술을 통해 인간 본연의 자유로움으로 나아가는 것은 같다. 그러니 인식과 제도, 관행에 갇히지 말고 다양한 교류를 만들고자 예술과 교육, 그리고 마을이 서로 순환하는 생태계를 만들어나가는 중이다.
현재 활동하고 있는 성북과 도봉은 어떻게 다른 혹은 어떻게 고유한 문화예술의 정체성을 갖고 있는가.
성북과 도봉은 예전엔 하나의 지역이었다. 성북구에서 도봉이, 도봉에서 강북과 도봉이 차츰차츰 분구의 역사를 거친 것이다. 노원은 아파트 단지가 중심인 인구과밀 지역이다. 교육열과 생활 수준이 높은 중산층이 문화를 이끌어간다. 목동과는 또 다른 아파트촌 문화가 있어 주민들의 의식과 성향이 다르다. 성북은 극과 극의 대비를 이룬다. 성북동의 부촌과 작은 집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그 외 지역으로 나뉘는데, 흥미로운 것은 연극인 주민의 비중이 서울에서 가장 높은 곳이라는 점이다. 혜화동 대학로의 높은 임대료 때문에 연습실을 갖지 못한 연극인들이 성북에 대거 유입되었다. 이 연극인들의 지적이고 개방적, 진취적 성향이 마을 문화에 스며들었다. 고려대, 국민대, 성신여대, 한국예술종합학교 등 여러 대학문화도 합세해 민도가 높다. 좋은 인적 자원을 갖춘 셈이다.
강북은 전통의 공간이다. 수유를 중심으로 재야 지식인들이 기반을 닦아 반골 정신의 문화가 형성되었다. 강원룡 목사가 이끌었던 아카데미 하우스는 한명숙 전 총리 같은 활동가들을 양성했다. 국립 4.19 민주묘지와 같은 상징적 공간이 민주화 운동의 오랜 전통을 대변한다. 도봉은 내가 오랫동안 살아온 곳이다. 전통의 강북과 본디 한 지역이었지만 주민의 의식과 성향은 썩 다르다. 베드타운(Bed town)으로 일터와 거주지가 일치하지 않은 주민들이 많다. 성북처럼 여러 대학이 있는 것이 아니라 덕성여대만 딱 하나 있다. 그러니 문화적으로 낙후된 감이 없지 않다. 도봉은 창동·상계 신경제 구상으로 창동에 이런저런 일들이 생기고 있다. 이렇듯 자치구별로 역사의 흐름이 고유하다. 사람들이 어떻게 모여들었고, 어떻게 주택단지가 개발되었으며, 그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문화가 얼마나 튼튼히 뿌리내렸는지 주목해볼 만하다.
이렇게 고유한 터의 문화를 문화예술교육으로 풀어내려면?
대중음악에도 지역색을 드러낸 바이브(Vibe)가 있지 않던가. 시애틀 그런지(Seattle grunge)나 리버풀 사운드(Liverpool Sound)처럼 지역의 고유성을 발현한 음악들 말이다. 이런 바이브들이 풍성하게 생기려면 그 자리에 묵묵히 뭉개 앉아 살아낸 사람들의 존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렇게 의미 있는 인적 자원들을 발굴하고 지원하되 이들의 고유성이 다치지 않도록 주목해야 한다.
청년 예술가들의 일자리를 위한 정책사업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 얼마 전엔 도봉구 창동의 청년 뮤지션들에게 그와 관련한 멘토링을 진행했다고 들었다. 어떤 도움과 영감을 주었는가.
열심히 하지 않으면 수가 없으니 열심히 해야 한다고 말했지만(웃음) 청년들의 고생이 눈에 밟히더라. 4차 산업혁명의 격랑에서 살아남는 것은 테크놀로지 아니면 문화 아니던가. 청년실업이 이 혁명과 연계되다 보니 예술계에서도 일자리를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들이 성행하고 있다. 그런데 너무 근시안적이라 문제다. 청년실업 문제를 정책으로 풀어가기 위한 노력을 폄하하는 건 아니지만 프로젝트성 일자리를 만들더라도 이 일이 실제 청년들에게 어떤 도움이 될 지 고민이 더 필요하고 특히 실행에서 적절하게 지원되도록 설계하거나 실행그룹을 잘 선정하면 좋겠다.
어떻게 하면 이런 정책들이 단기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까.
최악의 경우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견디면서 돈을 받는 습관을 길러주는 것이다. 지원사업에 매달리다 보면 정작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망각할 때가 많다. 청년들이 스스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발견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객체화나 대상화하는 지원은 나쁜 지원이다. 청년들을 의미 없는 일로 분리시키기 때문이다. 어떤 정책을 뜯어보다 보면 설계자조차 제대로 이해하고 있을까 의심쩍을 때가 많다. 어떻게 정책을 설계해야 제대로 닿을지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죄다 고생한다. 실행력과 안목을 가진 사람을 찾아내야 한다. 관을 무작정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섬세하고 집요한 접근이 필요하다.
곧 창동에 들어선다는 K-POP 전문 공연장도 마찬가지다. 한국엔 아직 아레나형 공연장이 없지 않던가. 그러니 규모가 큰 대중음악 공연들이 늘 체육관이나 운동장에서 열렸다. 이제는 창동에 ‘서울 아레나’ 건립을 본격 추진하면서 현재 민간 사업자를 공모하는 중이다. 제대로 성사되려면 실제적인 실행력과 안목을 가진 사람들을 치열하게 찾아내야 한다. 사업을 던지기만 하고 눈먼 돈으로 엄한 얘기만 지껄여선 안 된다. 그럴수록 지역주민들은 소외되지 않던가. 어떤 곳은 잭팟을 터뜨리고 어디는 여전히 배고픈 불합리한 구조가 중복되지 않으려면 지역에 대한 세심한 정보와 인력이 필요하다.
현장에서 부대껴 뒹굴게 하는 삶의 동력이 있다면 무엇인가.
가능하면 덜 부끄럽고 덜 민망하고자 노력한다. 예전에는 ‘나는 잘하고 있어’란 강박에 시달렸다. 안 그런 척하느라, 그런 척 애쓰느라 힘들었다. 누군가를 행복하게 만들고 싶다는 환상이 있었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누군가 불행하지 않도록 덜 창피했으면 좋겠다는 다짐으로 바뀌었다. 어떤 일이든 잘 되고 누구나 행복하게 만들겠다는 적극적인 다짐보다 어떤 일이든 큰 무리 없고, 함께 한 사람들이 덜 힘들게 라는 마음가짐으로 바뀌었다.
안석희
성북문화예술교육가협동조합 마을온예술 이사. 평화문화진지 운영위원.
작곡가, 음반 디렉터로 활동하다 2004년 하자센터에서 노리단을 인큐베이팅할 때 창단멤버로 합류하며 인생의 큰 터닝을 경험했다. 2011년 부산노리단을 거쳐 지역에서 문화예술을 바탕으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작곡가, 음반 디렉터로 활동하다 2004년 하자센터에서 노리단을 인큐베이팅할 때 창단멤버로 합류하며 인생의 큰 터닝을 경험했다. 2011년 부산노리단을 거쳐 지역에서 문화예술을 바탕으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사진_이재범 POV스튜디오 andy45a@naver.com
장소 협조_ 호박이넝쿨책
장소 협조_ 호박이넝쿨책
- 조은아
- 웹진 [아르떼365] 편집위원.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기악과 및 독일 하노버음대, 파리 고등사범음악원, 말메종음악원을 졸업했으며, 서울시향 토크 콘서트, KBS 교향악단 실내악 시리즈 진행, JTBC ‘차이나는 클라스’ 강연, KBS 클래식FM ‘실황연주&라디오 피아노 레슨’ 해설 및 연주 등 음악을 바탕으로 한 인문학 강연과 음악 해설을 하고 있다. 현재 더겐발스 뮤직 소사이어티 멤버,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예술감독,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로 재직 중이다.
echopian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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