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구스타보 두다멜(Gustavo Dudamel)의 LA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이하 ‘LA 필하모닉’)의 상임지휘자 취임은 ‘엘 시스테마(El Sistema)’를 세계에 더욱 알리는 계기가 됐다. 엘 시스테마는 베네수엘라의 빈민층 아이들을 위한 일종의 무상 음악교육 프로그램으로, 1975년 아브레우 박사가 만들었다. 빈민가의 아이들은 모여, 음악을 통해 현실 너머의 희망찬 세상이 있음을 느끼고 꿈꾸었다. ‘음악을 통한 협력’은 아브레우가 내건 핵심이었다. LA 필하모닉 상임 지휘자인 구스타보 두다멜(Gustavo Dudamel)도 그 속에서 성장했다. 2010년, 한국도 ‘꿈의 오케스트라’를 시작하여 오늘날 진행한 프로그램이 46개(2018 기준)에 이르렀다. 이 교육사업의 영문명은 ‘엘 시스테마 코리아(El Sistema Korea)’. 우리가 그들로부터 배우고 싶은 게 무엇인지를 느끼게 한다.
“엘 시스테마에서 배운 것은 음악을 통한 성공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였다는 두다멜은 엘 시스테마의 정신을 LA 필하모닉에서 잇고자 했다. 로스앤젤레스는 여러 인종이 뒤섞인 탓에 다양한 문화가 자리를 잡은 곳이지만, 그만큼 분열도 많다. 2007년, 당시 대표였던 데보라 보다(Deborah Borda)의 이해와 두다멜의 지도 아래 LA 필하모닉은 ‘YOLA’(Youth Orchestra Los Angeles, 이하 YOLA)라는 저소득층 청소년을 위한 오케스트라 교육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창단 100주년, 청소년들에게 미래를 내맡기다
지난 3월, 올해 100주년을 맞은 LA 필하모닉이 내한해 3일간 성대한 무대를 이어나갔다. 그들의 여정에 YOLA의 단원들도 동행하여 꿈의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함께했다. 3월 14일부터 진행된 YOLA와 꿈의 오케스트라의 음악캠프는 두다멜이 함께 한 16일 공개 리허설로 귀결되었다. LA 필하모닉의 교육파트를 맡고 있는 엘셰 키블러 베르마아스(Elsje Kibler Vermaas) 총괄, 필 니콜라스 브라보 디렉터(Phil Nicolas Bravo), 안젤리카 이본 코르테즈(Angelica Ivonne Cortez) 매니저는 YOLA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함께 하고 있는 핵심 멤버들이다. 이들은 YOLA를 통한 아이들의 성장이 곧 세상의 성숙이라며 말문을 열었다.
엘셰 키블러 베르마아스(이하 ‘엘셰’) : 방과 후 활동으로 80명에서 시작한 YOLA는 현재 1,200명의 학생이 참여하고 있다. 학생들에게 무료로 악기와 교육을 제공하지만, 우리가 강조하는 것은 그 누구에게나 참여의 기회를 제공하는 프로그램(access program)이다.
필 니콜라스 브라보(이하 ‘필’) : 미국에서 클래식 음악은 극소수만 누리는 ‘특권’이 되었다. 그렇지만 데보라 전 대표와 YOLA의 설계자들은 음악은 기본적인 ‘인권’임을 강조한다. 이것을 누릴 수 있도록 그들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안젤리카 이본 코르테즈(이하 ‘안젤리카’) : 우리에게 YOLA의 성장과 성공의 원인을 물어오는 경우가 많다. 대답은 학생들과의 ‘동반성장’이다. YOLA의 학생들과 오랜 시간 인연을 유지한다. 이번 한국 방문에 함께 한 악장은 12년 전부터 YOLA와 함께 하고 있다. 처음에는 그에게 기회를 ‘제공한다’는 생각만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로부터 우리도 ‘영향을 받고 있다’. 여러 학생의 가족과 맺고 있는 관계도 우리의 성장에 있어서 너무 소중하다.
“LA 필하모닉이 연주 외에 교육 프로그램을 열심히 한다는 점이 다른 오케스트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점”이라고 세 사람이 입을 모았다. LA 필하모닉은 YOLA 외에 소외지역과 학교 교실을 찾아가고, 리허설에 학생들을 초대하고, 4~11세를 위한 특별 프로그램도 진행 중이다. 그중 YOLA는 LA 필하모닉을 대표하는 정체성이 되었다. LA 필하모닉은 100주년을 기념하는 올해에 2020년 개관을 목표로 YOLA 상주 공연장의 첫 삽을 떴다. 쌓아온 역사와 전통을 치하하기보다 청소년들에게 미래를 맡긴 셈이다. LA 필하모닉이 현재 상주하는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의 건축가로 유명한 프랭크 게리(Frank Gehry)가 설계했다.
필 : 세계 정상급 오케스트라가 연주 외에 교육 프로그램에 굉장한 자원과 에너지를 쏟는 것은 보기 드문 경우다. LA 필하모닉은 YOLA를 위해 세계 곳곳의 음악가들을 초청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세계 일류의 단원들이 공연마다 YOLA의 학생들을 초대하고 거리낌 없이 소통하기도 한다. 이러한 관계 구축과 소통에서 오는 동료의식이 YOLA만의 특별함이다. 이러한 관계가 10여 년 넘게 지속되다 보니 학생들은 생각지도 못한 가능성을 음악을 통해 발견하기도 한다.
관계와 소통, 그리고 실패를 가르친다
음악을 통한 ‘관계’와 ‘소통’은 YOLA의 지향점이다. 이번 내한처럼 아이들은 국경을 넘을 때 “처음에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으로 대화를 시도”(안젤리카)하고, “어느 나라에서든지 도시·시골 출신 학생들의 차이점”(필)이 보이지만, 합주 수업을 거치면 음악이란 만국 공통어라는 것을 체감하게 된다고 한다. 엘 시스테마 류의 음악교육을 진행하는 각국의 교사들도 만나면 “뛰어난 학생에 대한 집중인지, 아니면 함께 성장하는 분위기에 집중해야 할지”(안젤리카)에 대한 진지한 생각을 주고받으며 동료의식을 키운다고 한다. 이야기를 듣던 중 필자가 던진 질문에 세 사람은 YOLA의 교육 철학과 지향점을 뚜렷이 드러냈다. ‘공연 준비과정의 분위기는 너무 좋았으나, 공연이 엉망이 되었다면 어떤 기분이 드는가?’라는 질문이었다.
필 : 오케스트라이기에 좋은 연주를 선보이고자 하는 욕심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YOLA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하기 때문에 ‘결과’보다 ‘과정’을 중요시한다. 공연 매니저도 YOLA의 공연이라면 무대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중요시한다. 물론 연주가 좋지 못한 경우도 종종 있다. 하지만 그것을 통해 학생들이 ‘다음’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배우게 한다. 이러한 자세는 수학 문제를 풀 적에도, 가족과의 관계를 개선할 때에도 도움이 된다. 학생들은 실패와, 이를 극복하기 위한 본인이 노력이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지를 체험하는 중이다.
엘셰 : 스탠포드대학교 스파크(Stanford SPARQ)와 LA 필하모닉이 공동으로 YOLA 학생들을 대상으로 오케스트라 교육의 효과 연구를 진행한 적이 있다. 결과는 ‘학생들이 실패를 대하는 자세(Failure Mindset)를 배우게 되었다’며, 실패가 우리 삶에 일부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안젤리카 : 그래서 우리는 ‘실패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려 한다. 중요한 건 실패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다음에 대한 고민과 실천이다. 예전에 YOLA의 런던 투어에 참여하지 못해 마음고생이 심했던 학생이 있었다. 하지만 그를 둘러싸고 YOLA의 교사와 가족, 스태프들이 응원했다. 현재 그는 YOLA의 프로덕션 어시스트로 활약하고 있다.
엘셰 : 결국 ‘실패’는 YOLA의 또 다른 목표다. 그것을 극복하고 뭔가를 성취했을 때에 누리는 기쁨들이 음악을 넘어 삶의 곳곳에 적용될 수 있도록, 우리는 열심히 그 기회를 제공 중이다.
YOLA의 안팎을 둘러싼 협력의 생태계
관계와 소통, 실패. 여기에 YOLA가 내세우는 협동심은 현재 실현 중이다. 협동심은 오케스트라 수업 시간 외에도 YOLA의 안팎을 둘러싸며 생태계를 형성해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세 사람이 자부심을 느끼는 때도 이러한 생태계가 원활히 돌아갈 때다. ‘YOLA’라는 협동의 생태계에서 성장한 이들은 어디를 가든 또다시 협동의 생태계를 이끄는 주체가 되기도 한다. 실패를 배운 선배들은 실패를 목전에 둔 후배들에게 손을 내밀기도 한다.
엘셰 : ‘릴리’라는 학생은 가족의 지원과 관심을 많이 받았다. 이제 17살밖에 안 되었는데 가족의 허락하에 집의 창고를 스튜디오로 개조해 동네 친구들에게 음악을 가르쳐주고 있다. 그의 가족 중 음악가는 한명도 없다. 릴리는 내게 최고의 음악가이다. 그의 성장을 보며 YOLA의 교사로서 자부심을 느낀다. 릴리는 현재 생물학을 전공하고자 준비 중이다.
필 : 아이들이 부딪히고 적응하며 문제를 해결하려는 일상의 소소한 모습들을 볼 때 자부심을 느낀다. 작은 경험을 지닌 형과 언니들이 어린 후배들을 돌봐줄 때도 그렇다. 별거 아닌데, 이런 작은 순간들이 모여 성장의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선순환이 되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다.
안젤리카 : 도움과 지원의 선순환은 늘 아름다운 법이다. 바순을 공부하는 ‘잉글리드’라는 학생은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데 YOLA 출신의 선배가 도움을 주겠노라며 자원했다. 그 소식을 들은 잉글리드가 너무 신났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엘셰 : YOLA는 소외 계층을 대상으로 하다 보니 자녀의 대학 진학에 대한 경험이 전무한 가정이 대부분이다. 어떻게 보면 음악교육을 누릴 수 없는 사람들이 공정한 기회를 부여받아 부와 경제력을 지닌 이들과 대등한 위치에 선 셈이다. 이것만으로도 자부심을 느낄 때도 많다.
안젤리카 : YOLA 출신들은 이곳을 떠나도 보이지 않는 선순환 구조에 들어와 있다. 그들끼리 정기적인 모임을 갖기도 하고, 거기서 나온 의견과 개선점을 보내오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그들의 존재와 성장을 느낀다. 협력의 정신을 강조한 YOLA는 결국 안팎의 협력을 통해 성장하고 있는 셈이다.
2019년 현재 국내에 46개의 ‘꿈의 오케스트라’가 진행 중이다. 엘 시스테마의 영향을 받은 YOLA와 꿈의 오케스트라 모두 협동과 소통을 중요시한다. 이를 위해 관계자들이 소통하는 포럼과 심포지엄도 부지런히 진행하며 정보를 교류하고 있다. 그때마다 나오는 질문이 있다. “클래식 음악은 어렵다. 협동심을 길러야 하는 데에 목적을 둔다면 반드시 어려운 클래식 음악으로 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이다. 그들을 대신해 마지막 질문으로 던져보았다.
안젤리카 : 스탠포드대학교의 연구 결과를 보면, 협동 정신을 기를 때 축구처럼 학생들이 좋아하는 매개체를 활용한 경우와 어렵게 느껴지는 클래식 음악을 활용한 경우가 뇌의 발달에 서로 다른 영향을 준다고 한다. 소통 방식과 접근법도 다르고 경쟁의 모습도 다르고. 대중음악은 마음 맞는 또래끼리 방 안에서, 혹은 혼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하지만 오케스트라에는 많은 수의 인원이 참여하고 모르는 이들과도 함께 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협력과 협동이라는 점에서 더 적합하지 않을까. 혼자만의 연주이면서도 결국에는 전체에 대한 책임도 져야 하니까.
엘셰 키블러 베르마아스
LA 필하모닉의 교육담당자로 활동(2006~2009)했으며, 콘서트헤보우(2010), 하트포드 심포니(2010~2011) 등을 거쳐 2011년부터 LA 필하모닉과 협력한 바드칼리지 롱이음악학교 교육프로그램 및 MAT 예술 석사과정 디렉터로 활동했다. 2017년부터 현재까지 LA 필하모닉의 교육파트를 총괄하고 있다.
필 니콜라스 브라보
LA 필하모닉 소셜 이노베이션 협력 디렉터이다. YOLA가 진행되는 4개 지역(EXPO Center, HOLA, LACHSA, Camino Nuevo)을 아우르는 청소년 육성 프로그램을 총괄하고 있다.
안젤리카 이본 코르테즈
YOLA와 관련된 아이디어를 현장에서 직접 구현·실행하는 실질적인 매니저로, LA를 비롯해 미국 전역에서 진행되는 YOLA 관련 프로그램을 관장한다. YOLA의 교육을 담당하는 인력과 프로그램을 관리하기도 한다.
사진 _ 이재범(pov스튜디오) andy45a@naver.com
- 송현민
- 음악평론가. 월간 [객석] 기획실장. 음악 듣고, 글 쓰고, 음악 하는 사람 만나며 책상과 객석을 오고간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공부했고, ‘한반도의 르네상스’를 주장했던 음악평론가 박용구론으로 제13회 객석예술평론상을 수상했다.
bstsong@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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