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재생으로부터 새로움에 이르기까지

황순우 팔복예술공장 총괄기획자

황순우 건축가의 사무실에 들어서면서 가장 먼저 커다란 흑백 사진이 눈에 띄었다. 괭이부리마을을 사진과 글로 기록한 『골목과 한 칸』에서 본 작품 <난로>이다. 공간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건물이 갖고 있던 감정까지 느껴보고자 시작한 것이 사진작가로도 활동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세월이 변하였어도 이 동네에 흐르는 DNA는 무엇일까” 고민하며 작업했다는 말에서 건물과 장소, 시간을 읽고 보듬는 건축가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인천아트플랫폼을 비롯한 여러 도시재생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문화적 재생을 이끌어온 황순우 팔복예술공장 총괄기획자는 ‘지역 유휴공간의 문화예술교육 공간 활용’이 단지 버려진 공간을 예술로 채우는 것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기억과 관계의 회복으로부터 생각의 이식과 공명까지, 예술의 본질과 가치에 중심을 둔 장소를 만들고자 다양한 움직임을 일으키고 있었다.

오랫동안 문화적 도시재생과 유휴공간을 활용한 문화예술 공간 조성 사업에 참여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다. 총괄기획자로 계신 팔복예술공장 이야기를 먼저 듣고 싶다. 지난 2016년 문화재생사업을 통해 새로운 문화예술공간으로 개관한 팔복예술공장을 조성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신 지점은 무엇인가?
팔복예술공장은 한때 굴지의 카세트테이프 공장이었다. 그러나 1991년 폐업한 후 25년간 방치되고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힌 장소였다. 장소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과거 쏘렉스 공장을 다시 기억하게 하는 게 필요했다. 거기 근무했던 사람들, 팔복동에 살았던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아카이브한 내용을 발표하고 전시하니까 사람들이 팔복동을 기억하기 시작했다. 재생은 기억에서부터 온다고 본다. 1년 동안 공간을 설계하지 않고 기억을 재생시키는 작업, 참여하게 하는 작업, 예술가를 통해서 그 공간을 다시 새롭게 읽어내는 작업을 했다. 물리적인 것은 맨 마지막에 했다. 아무리 물리적인 재생을 해도 사람들이 찾지 않는 이유는 그런 것이다. 굉장히 많은 시간, 사람, 사건, 내용 속에서 만들어진 장소에서 그것이 사라졌는데 공간만 잘 만들어놓는다고 장소가 회복될까? 장소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되짚어보아야 한다. 이건 도시재생 하는 비법을 공개한 거다.(웃음)
건축과 공간 조성에 대한 것뿐 아니라 프로그램까지 총괄하고 계시다. 또한 조직과 행정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정부와 지자체의 지원을 끌어내고 계시다고 들었다. 총괄 기획자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
그동안 도시재생이나 공간재생을 하면서 느낀 것은, 그 속에 담겨있는 콘텐츠를 이해하고 어떻게 운영될 것인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공간이 멈춰 선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장소가 좋았었는데 이제 변두리가 되었거나 역할을 다했기 때문이다. 이것을 재생하더라도 언젠가는 또다시 빈 공간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지속가능하게 하려면 어떤 콘텐츠가 들어가서 어떻게 운영될 것인가 하는 접근이 중요하고, 그러려면 콘텐츠인 예술과 예술교육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또한 조직과 예산, 행정 시스템에 대한 이해가 맞물리지 않으면 안 된다.
개관 전 1년여 간 시범운영을 했다. 그렇게 하신 이유와 과정도 궁금하다.
첫 번째는 기억의 공유, 두 번째는 천 명의 얼굴과 마음, 세 번째는 예술의 힘이다. 저는 건축가이지만 이런 관점으로 프로그램을 기획해서 공간에 담고자 했다. 제일 먼저 인문학적 관점에서 장소를 아카이브를 했다. 어떤 장소였고 무슨 일이 있었고 기억을 갖고 끄집어내는 작업을 진행했다. 그다음에는 열 명씩 천 명이 될 때까지 어떤 공간을 만들지에 대하여 그리고, 생각하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예술가 열여덟 명이 빈 공간에서 장소를 해석해나가는 방법들을 찾았다. 이 세 가지를 통해서 얻은 것을 건축 프로세스로 가져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천명의 얼굴과 마음에서 실험, 창작, 소비, 생산, 커뮤니티, 교육, 놀이 같은 프로그램이 나왔고, 그 프로그램을 담는 그릇으로 공간을 만든 거다. 크게 두 가지인데, 예술창작과 예술교육이다. 그것을 담기 위해 전시실, 실험하는 랩실, 교육하는 스튜디오, 커뮤니티 하는 커피숍, 아카이브 자료실, 아트숍, 놀이터 같은 것을 만들었다. 공간을 만들어놓고 ‘이걸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좋은 공간을 함께 고민한 거다.

2018년 유휴공간 활용 문화예술교육센터 지원사업 ‘꿈꾸는 예술터’도 진행 중이다. 꿈꾸는 예술터가 ‘예술교육이 아닌 예술 하는 곳’이라고 하신 표현이 눈에 띄었다. 팔복예술공장과 어떤 시너지를 예상하시는가?
예전에는 예술교육에서 공간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팔복예술공장에 오는 아이들을 보면서 장소만 바꿔도 아이들의 생각이 달라진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냥 예술작품이 있고 예술가가 있는 장소로 바꿨을 뿐인데 아이들이 예술가처럼 행동하더라. 그동안 예술교육 공간은 대개 획일화된 교실 형태였다. 메이지 유신 때 만들어진 교실 시스템이 지금도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이것이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배워온 감각의 상황이다. 저 교실만, 놀이터만 바꿔도…… 그 속에서 해방시켜주고 싶었다. 팔복예술공장은 비일상적인 공간이다. 큰 건물, 어마어마하게 높은 천장, 굴뚝같은 것이 있으니 아이들이 여기 오기만 해도 (그림을) 그리고 싶고, 뒹굴고 싶고, 그 자체가 변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공간은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고 열어놓는다.
‘예술 하는 곳’이라는 것은 어떤 결과를 내고 발표하는 곳이 아니라 예술을 동사적 의미에서 행위로 보는 것이다. 명사적 단어가 아니라 ‘행하다’라는 관점에서 보고 싶었다. 책상 하나만 갖다 놓으면 책을 읽고 기타를 치고 어마어마한 상상을 한다. 이런 것을 하고 싶어서 일상으로부터 분리를 시키자 했다. 학교에서 할 수도 있지만, 이곳으로 오도록 고집했다. 여기서는 일상에서 분리시켜 예술의 본질, 생각에 다가가게 하면 좋겠다.
다양한 예술 경험을 통해 감각을 깨우고 문화예술교육자들의 새로운 발상을 촉진하는 2018 아르떼 아카데미 ‘창의적 예술교육 프로젝트’를 팔복예술공장에서 진행했다. 공간이 달라지면 아이들의 생각과 행동이 달라진다고 하셨다. 예술가와 아이들에게 공간은 어떤 의미일까?
이런 공간이 예술가에게도 필요하지만, 아이들에게 정말 필요하다. 예술교육을 통해 예술가를 만들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진짜 예술가가 될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예술이 가진 속성과 힘을 통해서 새롭게 생각을 이식하면서 자기 인생을 계속 새롭게 바꿔나가는 거다. 예술교육을 받고 예술을 경험하고 체험하는 곳이 학교 갖고 될까? 학교를 그렇게 짓던가.(웃음) 그래서 예술공장에서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성남 꿈꾸는 예술터에서는 학교를 리모델링하면서 고민이 많을 것 같더라. 아예 옥상에 구멍을 뻥 뚫어서 비가 새게 하든가, 떠드는 도서관을 만들거나, 화장실을 전시장으로 바꾸는 등 학교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을 해보시라고 조언했다. 새로운 상상을 하게 해야 아이들이 질문을 한다. 똑같은 방, 똑같은 아파트, 똑같은 교실에서 자라면 뭘 물어보겠나. 다양한 것이 있어야 질문이 생기지. 그래서 공간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특별한 공간에서 벌어지는 예술교육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프로그램을 기획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지점은 무엇인가?
이대영 현대자동차 큐레이터가 특강을 한 적이 있는데, ‘아트 씽킹(art thinking)’을 ‘퀘스천(question)’이라고 얘기했다. 예술은 사회에 대한 물음이고 예술가는 그것을 파헤친다. 난민에 대해, 독재자에 대해, 나에 대해 묻고 파헤치는 것이다. 그런데 잘못 가르칠 때가 많다. ‘디자인 씽킹(design thinking)’을 갖게 하고 계속 ‘솔루션(solution)’을 요청하면서 결과물을 내고 해결하라고 하는 거다. 건축도 어떻게 보면 디자인 씽킹의 논리이다. 에너지를 줄여야하고, 편리해야 하고, 감각적이어야 하는 목적성을 갖는다. 그러나 예술은 그렇지 않다. 계속 물어보면서 사회가 질문을 갖게 하는 거다. 핀란드 예술교육에서는 인종차별, 난민, 전쟁에 대한 것을 주제로 한다. 질문을 가르친다. 난민 문제는 일자리, 자본주의에 대한 생각을 묻는 것이고, 초등학생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주제에 대해 얘기한다. 이것이 예술가가 생각하는 방식이다.

팔복예술공장
그동안 여러 도시재생 사업에 참여하셨다. 도시재생이 잘 이뤄진 곳과 그렇지 못한 곳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이다. 사람과 공동체를 중요하게 다루기 위해서는 초기에 엄청난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시간이 아니라 돈을 중요하게 여기고, 짧은 시간에 엄청난 돈을 넣어서 성과를 내려고 한다. 그런데 인천아트플랫폼은 10년 걸렸다. 돈은 없었지만 계속 만들어 가면서 시간 속에서 형성되었다. 또 하나는 그 속에 들어가는 행위이다. 운영에 대한 목표를 갖고 지속가능한 시스템을 설계해야 한다. 그래서 2004년 인천아트플랫폼을 하면서 플랫폼 구조를 설계했다. 우리는 플랫폼을 다양한 것을 올려놓는 ‘예술 놀이터’라고 생각했다. 소유하는 공간이 아니라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공유의 공간을 만들다 보니 거리(street)가 되었다. 시간적인 것도 공유되었는데, 120년 된 건물과 새로 지어진 건물까지, 도시의 살아온 모습이 드러나는 구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팔복예술공장도 어떻게 하면 지속가능하게 작동할 수 있을지 운영과 프로그램 부분도 포함된 시스템 설계를 먼저 했다.
마지막으로, 사람을 중심에 둬야 한다. 돈은 많은데 일할 사람은 없어서 용역을 주고 끝내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훌륭하게 재생하려면 프로그래머, 기록자, 기획자, 코디네이터 등 한 팀이 들어가서 사람들과 서로 부딪치며 생각을 디자인해야 한다. 결국 도시재생은 사람이 하는 거다. 예술가에게 필요한 것, 시민에게 필요한 것을 해야 한다. 그것 말고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사람과 공동체, 장소성에 대한 것은 그 속에서 각 파트의 역할과 생태계를 만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술교육도 가르칠 사람과 배울 사람, 생태계가 만들어지지 않으면 안 되잖나.
그러한 생태계 속에서 예술가, 예술교육자의 역할은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팔복예술공장에 오면 공중전화부스 안에서 스마트폰을 든 원숭이를 볼 수 있다. 1950년대 일본 교토대학교에서 영장류 실험을 했는데, 고지마 섬 원숭이들에게 고구마에 묻은 흙을 물에 씻어 먹는 법을 가르쳤더니 젊은 암컷 원숭이가 제일 먼저 따라했다. 100번째 원숭이가 씻어 먹으니까 그 섬 모든 원숭이가 씻어 먹는 것이 원칙이 되었고, 다른 섬으로까지 전파되었다고 한다. 이것을 ‘사회적 공명현상’이라고 한다. 고구마를 씻어 먹는 게 혁신이고 변환하는 것이잖나. 그래서 개관 기획전을 《트랜스폼(transform)》이라고 했다. 전주에 혁신과 변화가 일어나려면 예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 첫 번째 원숭이가 팔복예술공장이라는 은유적 표현이다. 이제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공중전화부스는 팔복예술공장의 껍데기다. 그러나 그 속에 있는 원숭이는 여전히 혁신하면서 새로운 공간을 만든다.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예술이고, 예술 행위다. 예술 행위는 창작이나 교육이 똑같다. 그냥 예술 하는 곳이라는 생각으로 만들고 있고, 그런 철학을 담고 싶었다.
저는 종종 예술가는 이 사회의 ‘종자(種子)’와 같은 역할이라고 설명한다. 농사지을 때 씨감자가 있다. 아무리 배고프더라도 씨감자는 먹지 않는다. 예술가를 지원하지 않고 무시하고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회의 종자를 먹고 있는 거다. 잘 보존하고 파종하고 풍성하게 자라게 하고 전파해야 한다.
예술교육자와 예술가가 공간을 대하는 관점은 어떠해야 할까? 마지막으로 [아르떼365] 주요 독자층인 예술교육자와 예술가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부탁드린다.
2016 시범운영 프로그램 오픈 및 전시행사로 《장소의 탐색》 전시를 할 때 작가들에게 팔복예술공장 아카이브 책자를 배부했더니, 몇 사람은 그걸 베이스로 작품을 하더라. 장소를 기반으로 과거와 현대를 잇고, 사건과 생각 등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동네의 역사 속에서 관계를 만들기도 하고 내 생각을 내놓기도 한다. 그게 살아있는 예술교육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장소성을 매개로 얼마든지 더 많은 작업을 할 수 있다. 공장이, 파출소가, 터미널이 예술가가 쓰는 공간이 되는 거다.
황순우

황순우

건축가. (주)건축사사무소 바인 대표이사. 주요작품으로 국립경진정서장애학교, 돌체소극장, 하나비젼교회, 효성중앙교회, 인천서구성모병원, 연평도 피폭전시장, 인천 한국근대문학관 등이 있다. 삼산동 마을 만들기, 개항장 원도심 활성화 도시재생 총괄기획으로 활동했고, 인천아트플랫폼 기획 및 설계, 운영 준비에 참여했다. 현재 전주 팔복예술공장 총괄기획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이와 연계해 폐공장 1개 동을 예술교육 공간으로 재단장 하는 ‘2018년 유휴공간 활용 문화예술교육센터 지원사업 – 꿈꾸는 예술터’도 맡고 있다. 인천아트플랫폼으로 건축가협회상, 인천 한국근대문학관으로 한국건축문화대전 우수상을 수상했다.
사진_이재범(pov스튜디오)
공간 사진 제공_팔복예술공장
남은정
남은정 _ 프로젝트 궁리 기획자
https://www.facebook.com/archive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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