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첨단 기술이 일상을 파고들어 인간의 삶을 광범위하게 변화시키고 있는 지금, 문화예술교육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를 논의하기 위해 2018 문화예술교육 국제심포지엄이 마련되었다. 이를 위해 한국을 방문한 리차드 윌리엄 앨런(Richard William Allen) 교수를 만났다. 앨런 교수는 현재 홍콩시티대학교 창의미디어대학 학과장이자 인터렉티브미디어센터(Center for Applied Computing and Interactive Media, ACIM) 부소장을 맡고 있으며, 1998년부터 2016년까지 뉴욕대학교 영화학과 교수를 역임한 저명한 영화학자이기도 하다. 협업에 유독 관심이 많았기에 예술가와 다른 분야의 전문가 간의 협업을 통한 새로운 도전을 위해 홍콩에 가게 되었다는 그와 함께 새로운 시대에 문화예술교육이 유념해야 할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명한 영화학자이시고 오랫동안 뉴욕대학교 영화과에 재직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다. 홍콩으로 가시게 된 이유를 조금 더 자세히 듣고 싶다. 창의미디어대학은 기존에 계셨던 영화분야에서는 좀 더 확장된 영역이 아닐까 생각된다.
저는 영화이론가이며, 히치콕 전문가이다. 현재는 인도 영화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25년간 뉴욕대학교 예술대학에서 일하며 많은 예술가, 영화인과 교류해 왔다. 예술가와의 협업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고, 이런 관심으로 홍콩에도 가게 된 것이다. 새로운 미디어에 대해 공부해보고 싶기도 했다. 영화의 미래가 뉴미디어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현재 홍콩시티대학교 창의미디어대학(SCM) 학과장, 홍콩시티대학교 ACIM센터 부소장을 겸하고 계신다. 창의미디어대학의 교육과정을 살펴보았는데, 총 세 개의 학부 과정 중 특히 예술&과학 뉴미디어학과(Bachelor of Arts & Science in New Media, BAS) 과정이 예술과 과학의 융합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무척 흥미로웠다. 이 과정의 목표와 세부 내용 소개를 부탁드린다.
이 과정은 우리 대학의 헥터 로드리게즈(Hector Rodriguez) 박사가 설계한 것이다. 핵심은 과학자의 실천과 뉴미디어, 현대예술, 실험예술 등 예술가의 실천이 어떤 면에서 유사한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예술가의 행위 자체가 실험의 과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뉴미디어 자체가 실험의 재료일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뉴미디어에는 컴퓨터, 연산 등 과학에 기반한 요소가 포함되는데, 이런 부분을 어떻게 예술과 융합하고 교육과정으로 만들어내는가가 가장 핵심적인 고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커리큘럼을 설계할 때 고려한 몇 가지 원칙이 있었는데, 첫 번째는 예술가와 과학자 간 상호작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과학자는 예술의 과정을 경험하고 예술가는 실험실 환경 등과 같은 과학의 현장을 겪으면서 아주 상세한 이론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과학지식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자석이 있다고 하면, 자성의 원리를 이해하고 예술창작에 응용할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원칙은 예술가가 과학을 번역해서 대중과 커뮤니케이션하도록 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학을 하나의 매체로 삼아 창의적인 커뮤니케이션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하고자 했다. 마지막 원칙은 협업이 필수라고 보고 어떤 방식으로 협업하게 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각기 다른 전문성을 가진 학생들이 팀을 짜서 하는 방식이라 상호 협업을 많이 강조했다.
그런 면에서 매우 성공적이었던 프로젝트 사례를 하나 소개하고 싶다. ‘극한의 환경(Extreme Environment)’이라는 프로젝트였는데 사막이나 섬 등 극한 환경에 보내진 학생들이 그곳에서 각종 데이터를 수집하고 수치적 통계 작업을 하는 과학자들을 만나 이것을 배워 오는 것이다. 홍콩으로 돌아온 뒤에는 이런 과학적 데이터를 ‘번역’해서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는 예술의 형태로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과학적 데이터에 대한 예술적 반응이 어떻게 표현되는가, 이를 통해 일반 대중과 어떻게 소통할 수 있는가를 실험한 프로그램이었다. 이런 과정으로 만들어진 것이 과연 예술이냐 하는 궁금증을 가질 수도 있는데, 사실 학생들이 만들어낸 것은 예술의 정의에 대단히 도전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과정이 중요하지 이게 전통적인 의미의 예술이냐 아니냐 하는 논란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는다.
예술이라는 것은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깨는 시도에서 탄생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예술로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이 같은 시도가 계속되다 보면 하나의 예술 장르로 자리 잡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예술가가 과학을 번역해서 대중과 커뮤니케이션하도록 해야 한다는 말씀이 그런 면에서 인상적이다. 그렇다면 예술과 기술의 협업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는 현재의 상황에서 예술가에게 필요한 자세와 역량은 어떤 것일지 궁금해진다.
이 질문은 결국 예술가란 누구냐 하는 질문인 것 같다. 제가 가장 잘 아는 게 영화산업이니까 미국 영화산업에 국한해서 먼저 이야기해 보겠다. 미국의 영화산업은 기술, 과학, 혁신 같은 것들을 상당히 중시하고 많은 가치를 둔다. 그렇기에 창작자와 기술자가 항상 협업을 해 왔고, 이러한 미국 영화산업을 다른 나라에서 많이 모방하고 있는 현실이다. 미국 영화산업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많은 노력을 통해 기술적 노하우와 역량을 쌓고, 이를 통해 영화적 스펙트럼을 최대치까지 끌어올리는 과정을 밟아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꼭 최첨단 기술이 있어야만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기술의 혁신을 받아들임으로써 영화의 미적 혁신이 함께 따라온다고 할 수 있다. 기술과 예술의 협업을 이야기할 때 영화는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다. 예술가가 스스로 편안하게 느끼는 방식으로 기술을 활용할 수 있다면 좋겠다.
영국 팝아트의 대가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는 최신 기술을 접목한 다양한 시도를 통해 예술의 범위를 확장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최근에는 아이패드와 앱을 활용해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리는 프로젝트를 했는데, 흥미로운 것은 작품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사람들이 직접 보게 하는 것이었다. 한 번의 스트로크와 터치로 어떤 결과가 만들어지는지 직접 보게 하는 거다. 이건 아주 단순한 기술을 사용한 것이다. 즉, 뭔가 어마어마한 걸 배우라는 게 아니고 쉬운 기술부터 시작해서 자신의 예술활동의 영역을 넓혀가자는 것이다. VR용 고글 같은 것도 사용할 수 있다. 물론, VR 고글은 상당한 첨단 기술인 것은 맞지만 이것을 사용해서 예술가가 엄청난 가상현실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단순한 애니메이션용 캐릭터나 배경을 만들어보는 것처럼 쉬운 것부터 시작하면 되는 것이다. 복잡한 기술과 도구라 하더라도 단순한 것부터 창의적인 사용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예술가마다 처음 진입하는 접점이 다를 텐데, 무엇이 되었든 그 접점을 찾아내는 게 중요하고, 그 뒤에 관심이 계속 간다면 좀 더 배워보면 된다.
4차 산업혁명이니 뉴미디어니 하는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는 시대에 예술가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바로 어려워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웃음)
많은 사람들이 기술이 어렵다고 생각하는데, 예술가에게는 창의력과 상상력의 문제가 더 중요한 것 같다. 그리고 그걸 실행하는 건 조금 다른 문제인 것이고. 아주 복잡한 어떤 설계가 필요하다면 본인이 직접 배워서 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전문가를 활용하는 게 더 좋다. 기술 활용의 방식은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 학교의 모리스 베나윤(Maurice Benayoun) 교수가 한 작업 중 ‘뇌의 마음 상상(Brain Mind Imagination)’이라는 프로젝트가 있는데, 단순한 장치에 뇌파를 연결해서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이들이 여기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본 뒤 3D프린터로 출력해 주는 것이었다. 이런 작업에서 예술가는 원하는 것을 설계하고, 실제 기술의 구현은 전문 기술자의 손에 맡기면 된다. 즉, 예술가가 기획자의 역할을 해야 하는 시대인 것이다. 모든 것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작업했던 기존 예술가와는 개념이 좀 달라진 거다.
지금까지의 대화에서 가장 중요하게 언급한 단어가 바로 ‘협업(collaboration)’이었다. 이번 심포지엄에서 강조하고 싶으신 부분 역시 협업일 것 같다.
키워드는 협업이 맞다. 특히 협업이라는 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걸 강조하고 싶다. 탑다운(top-down) 방식으로 누가 시킨다고 되는 게 아니고 오히려 자연스럽게 상호보완을 위해 이루어지는 게 맞는다고 본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동의 목표를 확실히 설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과학자는 예술을 이해해야 하고, 예술가도 과학의 가치를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협업의 형태는 무척 다양하고 그래서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예술의 형태가 다르면 협업의 형태도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협업이 중요하다고 해서 교육과정에 ‘협업’이라는 과목이 있지는 않다. 하지만 협업을 할 수 있는 사고방식이나 태도, 상호 이해를 위한 이론적 배경 등을 가르칠 필요는 있다. 그래야만 뉴미디어의 시대에 예술과 과학의 협업이 가능해질 테니까.
새로운 기술환경에서 예술가와 과학자 간 협업, 이를 가능하게하기 위해 예술가에게 기획의 역량과 마인드 등이 무척 중요하다는 말씀으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학교와 사회에서 시민을 대상으로 활동하는 예술교육자에게도 이러한 협업의 마인드가 필요할 텐데, 예술교육자에게 특히 더 요구되는 자세나 역량이 있을까?
예술에 있어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새로운 기술의 등장이 예술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보면, 20세기 현대예술의 등장 이후 새롭게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예술의 중요한 형태로 등장하게 되었다. 뉴미디어적인 방식으로 예술에 접근하고 있고, 예술체험도 굉장히 다른 방식으로 바뀌고 있다. 예술교육 역시 과거와 같은 전형적인 방식이어서는 안 되는 상황인 것이다.
예술교육자는 두 가지 유형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전통적 방식의 예술교육자이다. 예술의 역사나 어떤 기술적인 것들을 가르쳐온 분들인데, 이들의 역할은 상당히 중요하다. 일반인이나 아이들과 소통하는 게 중요한데 이런 분들이 디지털 기술을 활용할 수 있게 되면 디지털 기술이 큰 역할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예술작품을 디지털방식으로 불러와서 감상하는 디지털 박물관이나, 디지털 아카이브 활용, 가상 투어 등이 있을 수 있다. 전통적 방식으로 예술교육을 하는 분들은 새로운 도구를 적극적으로 배워 대중과 커뮤니케이션하는 방식을 습득해야 한다.
두 번째로 예술활동을 통해 사람들과 교감하는 것을 가르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서로 소통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이런 교육자들은 창의적인 참여와 놀이를 통한 상호 소통에 주력할 것이다. 홍콩시티대학교의 제프리 쇼(Jeffrey Shaw) 교수의 경우, 미디어아트 작가였고, 증강현실(AR)을 거의 최초로 예술작업에 활용한 분인데, 디지털기술 외에도 풍선이나 거울 같은 단순한 사물을 활용하기도 했다. 이런 단순한 것들을 활용해 사람들이 상호작용할 수 있도록 해 준다면 그걸로 족하다고 생각한다.
현대사회에서는 후자와 같은 방식의 예술교육의 역할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면에서는 이제 예술가와 예술교육자의 구분이 거의 불필요한 것도 같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문화예술교육자와 [아르떼365] 독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처음 홍콩행을 결심했을 때 교수진이 상당히 다양한 국적을 가진 분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믹스컬처(mix culture) 요소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한국의 문화예술교육자들께 국내에서의 협업도 중요하지만 국제 협업에 대해서도 고민해 주시길 특별히 부탁하고 싶다. 예술이라는 것은 문화 간 소통을 위한 보편적 언어이니까.
리차드 윌리엄 앨런(Richard William Allen)
영화학자, 히치콕 전문가, 철학자, 작가이며 2016년부터 현재까지 홍콩시티대학교 창의미디어학부 학과장으로 재직 중이다. 학부 재학 당시 철학과 정치학을 전공했으며,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 영감을 받아 옥스퍼드 대학 필름소사이어티를 구성해 활동했다. 이후 영국으로 넘어가 영화학을 전공하고 미국 UCLA에서 영화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 후 뉴욕대학교에서 25년간 부교수, 교수로 재직했다. 현재 홍콩시티대학교에서 미디어아트 등 기술을 통한 예술의 표현, 영상학과 영화 이론, 영화의 철학적 접근, 영화와 종교 분야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히치콕의 로맨틱 아이러니(Hitchcock’s Romantic Irony)』(2007, 콜롬비아대학출판), 『비트겐슈타인, 이론, 그리고 예술(Wittgenstein, Theory and the Arts)』(2001, 루틀리지출판) 등이 있다.
사진 _ 이재범(pov스튜디오)
- 허경
- 현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서울프린지페스티벌을 통해 문화판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후 한국독립영화협회와 서울독립영화제, 인디다큐페스티발, 부산국제영화제,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등 다양한 영화제에서 일했고, 독립영화전용관 인디플러스 프로그래머를 맡기도 했다. 가장 최근에는 문화디자인자리에서 문화정책 연구와 문화 관련 교육프로그램 운영에 참여하기도 했다.
jeols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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