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극단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가 제작한 청소년극 프로그램북은 일반적인 공연의 그것과는 그 구성이 다르다. 대부분의 공연이 관객의 이해를 돕기 위한 글과 자료로 프로그램북을 구성한다면, 이들은 제한된 지면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내용 외에 제작과정에서 청소년들과 함께 진행한 프로그램을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내용을 보면 프로그램도 다양하다. 연습을 참관하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해당 공연이 다루고 있는 테마에 대한 리서치, 토론, 다양한 형식의 발표 등이 진행된다. 리허설 참관이나 공연 관람도 단지 공연에 대한 이러저러한 의견을 제안하는 방식이 아니라 ‘이야기판’ 등 청소년들을 위한 별도의 프로그램으로 진행된다. 이 프로그램북만으로도 국립극단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가 공연을 제작하는 과정에서부터 어린이청소년에 대한 이해와 어린이청소년극과 그에 연계된 활동에 대한 다양한 개념을 검토하고 새로운 접근들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국립극단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의 활동을 보면 공연제작의 비중이 적지 않지만, 제작과정에서부터 청소년 예술교육에 대한 다양한 시도들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창작과 교육의 연계, 아니 서로 독립된 혹은 분리된 영역을 접합시키는 문제가 아니라, 창작의 과정에서 어린이청소년 예술 활동의 다양한 계기와 가능성, 프로그램에서 지향까지를 시도하고 기록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좀 더 정확할 것 같다.
국립극단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는 국공립예술단체에서는 유일하게 대상을 특정하여 설치된 기구이다. 유홍영 소장은 2010년 국립극단이 재출범하면서 설치된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 창립 때 부소장으로 합류한 이후 지금까지 연구소를 이끌어 왔다. 마임이스트이자 교육극단 대표를 지낸 수십 년간의 현장 활동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예술교육과 어린이청소년극에 대해 일찍부터 관심을 가졌다.
마임도 그렇고 어린이극도 그렇고, 중요하고 필요한 일인데 아무도 하지 않아서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극단 목화 창단멤버로 참여했는데, 극단 생활이라는 것이 대표나 연출이 작품을 안 하면 배우들은 마냥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배우들끼리 연습을 하자, 극작가가 없으니까 마임을 하자, 그러면서 거리공연도 하고 아이들도 만났다. 아르바이트일 때도 있었고 봉사활동도 있었는데, 작은 공연이지만 아이들을 만날 때 성취감이 컸다. 큰 공연들도 있었다. 당시에는 5월 5일 어린이날 국립극장 대극장에서 뮤지컬 <노예와 사자>(1988) 같은 공연이 올랐다. 공영방송사가 제작하니까 1회 공연인데도 대극장 제작비를 제외하고도 수익이 났다. 80년대를 거쳐 90년대까지도 바탕골소극장, 파랑새극장 등 대학로 극장들이 ‘오전에는 아동극, 오후에는 성인극’으로 유지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어린이극이 전문분야라는 인식이 없었다. 내가 계속 어린이극을 하니까, 선배가 “너 왜 그러냐.” 하고 걱정하는 말을 했었다.
극단 사다리는 최초의 교육극단이었던 것으로 안다.
1988년 극단 사다리를 창단하면서 교육극단이라는 정체성을 명확히 했다. 창단은 88년이지만 그전부터 활동이 있었다. 10년 이상 현장에서 열심히 작업했던 사람들이 모여서 독특한 공연을 만들었다. 공부도 많이 했다. 그때 최영애 선생(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 전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장)과 연극놀이 워크숍을 했는데 우리가 고민하던 창조적인 작업에 굉장히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창작방법론으로 연극놀이를 접한 건가?
연극놀이를 교육이다, 혹은 창작방법론이다 라는 식으로 어떤 한 측면으로 수용했다는 것이 아니다. 나중에 사다리연극놀이연구소가 분리되지만, 극단 사다리에서는 창작과 교육이 항상 같이 있었다. 아이들을 많이 만나려고 했다. 공연만이 아니라 연극놀이 등으로 아이들을 계속 만났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위해 만드는 공연과는 다른, 과정과 방법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 극단 사다리 활동을 하면서 교육과 창작이 널뛰듯이 일어나면서 만들어지는 균형, 거기에서 독특한 작업이 일어나는 것을 확인했다. 그래서 다른 팀들에게 워크숍도 많이 했다. 우리의 경험을 공유하고 싶었다.
요즘 들어 예술교육이 활성화되고 있지만, 여전히 창작과 교육은 별개의 영역으로 인식되고 있다. 당시 극단 사다리의 활동은 두 축이 같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많은 체험 프로그램에 연극놀이가 포함되어 있지만, 그 안에서 예술도, 교육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예술교육을 하는 사람은 예술가로서 아이들을 만나는 게 아니라 몇 가지 프로그램을 익히고 바로 교육 현장에 투입된다. 예술교육이 일자리 정책과 연결되면서 오는 폐해다. 그렇다고 안정적인 일자리도 아니다. 또 확산의 과정에서 교육이 사업이 되어 있는 것도 문제다. 교육의 효과, 교육의 성과는 긴 시간의 관찰을 통해 확인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게 사업이 되어버리니 짧은 시간에 성과를 내야하고 그걸 두고 평가한다. 예술교육의 성과는 그 순간 아이들이 즐거워한다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긴 안목으로 봐야 한다.
어린이청소년 예술교육이나 체험 프로그램의 확산이 갖는 긍정성도 있다.
연극의 놀이성, 플레이(play)라는 개념이 확장되는 토양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긍정적이다. 그런데 놀이성이 지금 이 순간 일어나는 자신의 삶 속에서 발견되고 개발되어야 하는데 개념이나 관찰 없이 프로그램 몇 개 익혀서 아이들을 즐겁게 하는 것으로 변질되는 것을 염려하는 것이다. 우리의 연극문화가 남의 것을 빌려 오는 것에서 시작되고 여전히 그러한 문화 안에 있는 것처럼, 연극교육, 예술교육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놀이성을 많이 가지고 있는데, 제대로 못 하고 있는 거다.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생래적인 요소를 개발하고 미래의 예술가들이 함께 확장시킬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 마을문화, 가족의 놀이 등을 어떻게 연극과 접목시키느냐를 고민한다. 그래서 나는 ‘놀이연극’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연극놀이’와 ‘놀이연극’은 어떻게 다른가?
연극놀이는 연극적인 요소를 활용한 놀이라면 놀이연극은 놀이를 통해 연극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무엇이 수식하는 것이고 무엇이 본래의 개념이냐의 차이다. 놀이연극은 놀이를 통해 연극의 완성도를 높이고자 하는 거다.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는 예술교육 등 다른 부분보다 공연제작이 중심인 것처럼 보인다.
밖에서 드러나는 것은 그렇지만 과정은 그렇지 않다. 공연제작 과정에서 예술가와 청소년의 만남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작업에 참여하는 예술가에게 늘 던지는 질문이 ‘청소년을 아는가?’ 이다. 우리 모두 청소년기를 겪었지만, 그렇다고 지금 현재의 청소년을 아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제작과정에 청소년을 계속 참여하게 한다. 그 과정에서 예술가들도 영향을 받고 또 청소년들도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고, 자기 말에 영향을 받아서 작품이 만들어지는 경험을 한다. 그런 과정이 실제 있었고 연구기록도 남아 있다. 공연제작 외에도 ‘청소년예술가탐색전’, ‘한여름밤의 작은극장’ 등도 진행하고 있다.
프로그램북을 볼 때 제작과정에 청소년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한편 청소년 프로그램이 청소년극의 리얼리티를 위한 것인가,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청소년들은 제작을 도와주는 사람들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청소년들도 과정에서 주체로서 보고 느끼고 행하는 것이 있을 것 같은데, 그게 뭔지 궁금하다.
지금처럼 공연제작 중심으로 운영된다면 그렇게 비칠 수 있다. 공연제작 과정의 한 프로그램처럼 보이니까. 각각의 프로그램으로 의도나 성과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각각의 프로그램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려면 무엇보다 이런 프로그램들이 상시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가 처음 출발할 때 국립어린이청소년극단을 목표로 했던 이유다. 그동안 국공립예술단체들이 어린이청소년극 제작을 안 했던 건 아니다. 지금도 서울시극단 등에서 어린이청소년극을 올린다. 하지만 우리가 국립극단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로 별도의 기구를 운영한다고 했을 때는 무엇을 해야 할까. 좋은 공연을 만드는 것이 다인가. 그럼 좋은 공연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나는 좋은 공연을 위해서도 상시적으로 다양한 청소년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청소년예술가탐색전’은 매년 다양한 분야에서 주목 받는 젊은 예술가들이 함께 참여하여 청소년의 예술언어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창작의 동력을 얻고, 미래지향적인 청소년극의 모델도 개발하는 프로그램이다. 이런 작업을 많이 해서 좋은 작품이 나오는 것이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공연과 좋은 교육 프로그램은 별개가 아니다. 국공립예술단체로서 정말 해야 할 일은 그런 시스템을 만드는 거다. 이러한 사례와 노력에 대한 기록과 연구에 힘을 쏟는 것도 마찬가지다. 극단은 물론이고 지금 여러 연극단체가 있지만, 사업이 아닌 기록이나 연구를 할 수 있는 여력이 없다. 우리가 무엇을 해왔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기록하고 연구하는 것도 중요한 작업이다.
‘한여름밤의 작은극장’(1~2인극 작품개발 워크숍을 통해 예술가로서 어린이청소년극 배우의 창작역량을 강화하고, 지역과 학교, 문화기관으로 찾아가는 현장공연을 활성화하는 프로그램 – 편집자 주)도 벌써 4회를 맞았다. 배우 창작 워크숍에서 시작되어서 지금은 독립 예술가 네트워크도 만들어지고, 축제 등에서 공연도 활발하다.
배우 창작 워크숍은 이런저런 이유로 경력이 단절되는 배우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에 시작했다. 스스로 꿈을 포기하지 않으면 이룰 수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나 역시 스스로 기회를 기다리지 않고 만들었다. 길에서 마임을 하면서 배우로서 자신감을 얻었다. 그리고 함께 모여서 하니까 힘도 생겼다. 하고 있어야 한다. 배우는 액터(actor), 행동하는 사람이다. 나는 그 말을 좋아한다. 물론 환경이 척박해도 뛰어난 사람들은 살아남는다. 그런데 중요한 건 좋은 토양을 만드는 거다. 지금보다 더 많은 어린이청소년극, 어린이청소년을 위한 예술경험의 장이 방방곡곡, 낙엽 사이사이, 구석구석, 더 넓게 퍼져가야 한다. 농사짓는 마음으로 그렇게 하면 관객과 참여자들도 달라지고 작품도 달라진다. 그런 시스템이 없으면 예술가들은 자꾸 시장으로 내몰린다. 관객들도 소비자로만 남는다. 그래서는 깊은 작업이 안 이루어진다.
오늘 이야기를 들으면서 창작과 교육이 왜 별개가 아닌지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그리고 국공립예술단체가 예술계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오랜 시간 관찰하면서 토양을 일구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생태적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화전민(火田民) 농사는 우리 스스로 후배들의 재산을 뺏는 거다.
마지막 질문이다. 국공립예술단체에서 문화예술교육이 좀 더 활발해지려면 어떤 지원과 협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나.
긴 안목, 지속성을 어떻게 견지하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특별한 방법이 없다. 어떤 일이 필요한 일이고, 필요한 일이 진행되고 있다면 그것을 지속할 수 있도록 제도나 정책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하던 일을 두고 새로운 사업을 만들고 혹은 그때그때 평가가 달라져서는 지속성이 생길 수 없다. 꼭 당부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기록이다. 작품제작과 교육, 참여활동에 대한 현장 기록을 했으면 좋겠다. 좋은 기록을 만들고 그걸 현장에서 읽을 수 있도록 소통할 수 있는 노력을 했으면 좋겠다.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에서 만든 자료집도 현장에까지 가 닿을 길이 협소하다. 내가 직접 들고 다니면서 필요한 사람들을 만나면 전해준다. 이런 기록이 잘 모아지고, 널리 공유될 수 있는 장이 마련되어야 한다. 기록하고, 잘하는 것이 계속 유지되면, 물길이 생긴다. 물길이 생기려면 샘이 많아야 하는데, 예술가들에게는 스스로 샘이 되라고 한다. 샘이 많아져서 물길이 생기면 관리, 치수(治水)가 필요하다. 이때 예술행정이 필요한 거다. 지금은 치수한다는 사람은 많지만 샘이 턱없이 부족하다.
유홍영
현 국립극단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장. 한국마임협의회 회장과 극단 사다리 예술감독을 역임했다. 놀이와 마임, 연극놀이의 양식을 공연에 도입한 연출로 <이중섭 그림 속 이야기>, <꼬방 꼬방> 등 어린이뿐 아니라 남녀노소 모두가 함께 즐길 수 있는 가족극 형식의 작품을 만들어왔다. 한국을 대표하는 마임이스트로서 독특한 오브제와 가면, 한국적 질감이 담긴 작품으로 공연 활동도 꾸준히 하고 있다. 독일, 미국, 싱가포르, 호주, 일본 등 다수의 해외 초청 공연을 했으며, 서울어린이연극제 연출상(1995), 히서 연극상(2000), 서울공연예술제 특별상(2001)을 수상 한 바 있다.
사진 _ 마루스튜디오
- 김소연
- 연극평론가. [컬처뉴스], [weekly@예술경영] 편집장을 지냈다. 경기문화재단 <커뮤니티와 아트> 콜로키움을 기획하고 편집했다. 무대가 어떻게 세상과 소통할 것인가에 대한 관심으로 글을 쓰고 잡지를 만든다.
kdoong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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