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新) 덴마크인들의 문화 갈등

글_고민정(아르떼 덴마크 통신원)


어느 사회나 부조리한 단면을 지니고 있음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관광객같이 잠깐 방문하여 도시를 둘러보는 손님의 시선에서 표피를 걷어내면 오롯이 망막에 맺히는 모습들, 즉 객(客)이 객 역할을 벗어나 주인의 역할에 도전을 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보이는 장애들. 물론 어느 쪽이 더 진실에 가깝다고 감히 말할 수 없다. 진실이 있기나 한 걸까. 이번 글에서 나는 덴마크라는 하나의 ‘국가’ 테두리 안에서 수많은 다양한 문화를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내볼까 한다.

새로운 덴마크인?
2004년 덴마크 국립 박물관은 수년간 준비 끝에 새롭게 상설전시 <1660-2000 덴마크의 이야기들(Stories of Denmark)> 전을 열었다. 덴마크의 사회 모습이 어떻게 변화를 겪어왔는지, 다양한 사람들이 어떻게 삶을 살았는지를 당시 사람들이 사용했던 물건들로 보여준 전시였다. 전시장에서 울려 퍼진 음악은 물건들이 전해주는 이야기와 더불어 이국적인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연대기별로 진행되어 있는 이 전시의 마지막 부분은 신(新) 덴마크인(New Danes)에 대한 묘사로 가득했다.


덴마크 국립 박물관의 ‘1660-2000 덴마크의 이야기들’ 전시 장면.

신 덴마크인은 구(舊) 덴마크인의 반대 개념으로 생겨났다. 덴마크는 불과 수십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거의 동일한 문화와 언어를 지닌 사회였다. 그런데 1970년대부터 노동력의 부족을 메우기 위해서 제 3세계에서 이민을 받는 정책을 채택했다. 또한 지구촌 각지에서 지역 분쟁으로 난민이 된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정책을 취하기도 했다. 사실 덴마크는 19세기에 여타 유럽 제국이 경쟁적으로 식민지 정책을 취하는 흐름에 동참하여 당시 그린란드와 아프리카 일부, 심지어 인도 일부까지 식민지로 만들었다. 식민지 경영의 역사가 낳은 후손들은 사회통합 정책에도 불구하고, 고유한 문화와 가치, 전통을 지키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복합적인 상황 속에서 등장한 이들이 신 덴마크인 이다.
이 전시에서는 다음처럼 신 덴마크인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었다.‘세계화의 영향으로 신 덴마크인은 덴마크에 더욱 많아졌다. 특히 이들은 보다 나은 삶을 찾아서 사회복지가 잘 되어 살기 좋다는 덴마크로 이주해 왔다. 그러나 외국인 성을 가지고 일자리를 얻기란 힘이 들고 이는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이들을 단지 ‘이민자나 외국인’으로 쉽게 분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자의든 타의든 이곳으로 흘러 들어오게 된 사람들, 그래서 덴마크 사람도 원래 문화권의 사람도 아닌 사람들. 혹은 동시에 덴마크와 모국에서 주는 정체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여느 유럽국가에서처럼 덴마크에서도 쉽게 만나볼 수 있다.

스밀라가 이야기해주는 것
지난 1992년 출간되어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페터 회의 소설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에 등장하는 스밀라 역시 신 덴마크인의 한 예라 할 수 있다. 이 소설은 눈처럼 차갑지만 또한 내적인 신념을 위해서 몸을 사리지 않는 주인공 스밀라의 모험 이야기이지만, 어머니로부터 그린란드의 혈통을 이은 신 덴마크인(스밀라)의 구 덴마크인 사회와의 미묘한 갈등 양상이 잘 표현된 작품이기도 하다.

나는 패배자에게는 약하다. 환자, 외국인, 반에서 가장 뚱뚱한 아이, 아무도 함께 춤을 추고 싶지 않는 사람들. 나는 그들을 보면 가슴이 뛴다. 어쩐 일인지 나 역시 영원히 그들 가운데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71쪽)

의학 실험용으로 억울한 죽음을 당한 그린란드 소년 이자이아의 의문사를 파헤쳐 나가는 스밀라는 그들을 ‘패배자’라 일컫는다. 주류의 기준에서 볼 때 권력층의 하위계층인 약자들이다. 이 약자들은 최근 덴마크에서 사회문제를 일으키는 주범이라는 오해를 사고 있다.

덴마크의 그린란드인
스밀라가 종횡무진 하던 크리스천스하운 지역이 바로 내가 지내던 아파트였음을 알게 된 것은 코펜하겐에 도착하고 나서도 한참 후의 일이었다. 크리스천스하운은 코펜하겐 시 동쪽에 있는 섬이다. 이 섬에는 궁정을 사수하기 위해 17세기에 이미 포구가 설계되었고, 그 후로는 동인도 회사의 세계무역 전진항으로 창고 건물들이 즐비하게 들어섰다. 덴마크 해군기지도 이 섬에 있고 1970년대에 무정부 사회를 표방, 각지에서 몰려든 히피 예술가들의 집단 거주지인 크리스챠니아도 지척이다.

이곳에는 현재 덴마크에서 가장 비싼 땅과 가장 싼 땅이 공존하며, 고소득층 여피족, 히피족, 그리고 그린란드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다. 광장에는 그린란드인들이 고기를 잡는 모습을 담은 큼직한 동상 두 개가 놓여 있다. 이 광장에는 해뜰 무렵부터 해질녘까지 한 무리 걸인들이 술에 취해서 노래를 부르고 또 술을 마신다. 이들은 소설 속 소년 이자이아의 엄마처럼 정부에서 나오는 생활보조금을 죄다 술 사먹는 데 쓰는 알콜 중독자들이며, 또한 한때 그린란드에서 유년을 보냈던 사람들이다. 나는 눈매나 외양이 한국 사람과 비슷한 그 노인들을 보면서 묘한 마음이 들었다. 동화정책은 실패했고 이들은 거리를 배회하고 있다. 광활한 눈 위를 질주하던 사람들이 좁은 공간에 갇혀 지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동상에 얼어붙어 있는 고기잡이 그린란드인과 살아있는 알콜 중독자 그린란드인들은 대비를 이룬다. 그러나 이런 모습들과 소설 속 1.5세 그린란드인 스밀라, 이자이아, 이자이아의 엄마만으로 그린란드 사람들 전체를 통틀어 하나로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크리스천스하운 광장의 그린란드인 동상과 덴마크 국립 박물관의 그린란드실 전시

‘다름’에 대처하는 덴마크의 자세
예의 덴마크 국립 박물관의 민족지학 전시실에는 그린란드에서 수집한 소장품들이 마치 과학 표본처럼 다닥다닥 전시되어 있다. 마치 영원한 그린란드의 상징이라도 되는 듯이 수십 년 전의 오래된 물품을 통해서 관람객들은 그린란드 문화를 배운다. 박물관에 재현된 그린란드의 이미지는 영원하게 이국적이고, 낙후된 생활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이미지는 서구의 시선이 낳은 산물이다. 이 전시의 연구와 설치작업에 그린란드인이 적극적으로 개입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이다.
누가 한 문화에 대해서 가장 잘 말할 수 있을까. 그린란드 탐험 전통을 따르는 인류학자인가, 1.5세 스밀라인가, 아니면 잃어버린 명예를 복권하려는 그린란드의 후예들인가. 그저 평온하게 물건들이 박제되어 있는, 흔하고 흔한 전시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최근에 접하게 되는 일련의 사건들과 함께 이 변치 않는 박물관의 민족지학 전시실을 보면 여러 가지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다. 우선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던 ‘타자’에 대한 차별이 공공연하게 표출되고 있는 덴마크의 정치현실을 들 수가 있다. 공영 라디오 방송의 팝음악 프로그램에서 음악 사이에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우파 정당의 정치 캠페인, 마치 상품의 광고물처럼 길거리에 붙어있는 문구는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의견에 영향을 주고 있는 듯하다. “덴마크 전체 범죄의 82%는 외국인이 저지르는 것입니다. 그들을 본국으로 추방해야 합니다.”

버스 정류장에 붙은 우파 정당의 인종차별적 광고.

최근에는 덴마크의 유력 일간지인 <율란드 포스튼(Jyllands Posten)>이 다문화 사회에서의 예술 영역과 표현의 문제에 대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율란드 포스튼>지는 12명의 만화가들에게 이슬람교의 성인 모하메드의 이미지를 그려달라는 청탁을 했고 이를 지면에 게재했다. 일부 만화가들은 과격한 테러분자로 모하메드를 표현했는데, 이것은 절대로 성인의 이미지가 제작될 수 없다는 이슬람 불문율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이에 수천 명이 시위를 벌이는 등 이슬람권의 불평이 거세게 이어졌고, 만화가들은 신변에 위협을 받았다. 역으로 이슬람 교도들의 저항으로 인해 구 덴마크에서부터 이어 오던 민주 전통이 가로막혔다는 반대 여론이 강하게 제기됐다. 이는 정치적으로 극단적인 집단들에게 빌미를 제공해 직 간접적으로 다수의 외국인, 신 덴마크 인들이 피해를 입는 상황을 낳았다.

문화예술교육으로 상생을 꿈꾼다
물론 덴마크의 각 코무운(Kommune)들은 외국인과 신 덴마크 인들이 한 사회 구성원으로서 더 많은 혜택을 받고 주변인이 아닌 주인의 권리를 누리도록 사회 통합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긴 하다. 그 예로 로스킬데(Roskilde) 코무운은 400,000 크로네(약 7천 2백만원)를 들여 음악, 미술, 스포츠 등 여러 가지 예술 활동을 통해 각종 계층의 어린이들이 자연스럽게 융화하도록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저소득 이민자들과 학생들이 주로 거주하는 코펜하겐의 뇌뢰브로 지역의 한 교회 목사는 교회에서 이슬람식 예배를 볼 수 있게 하자고 주장하여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으로 타 종교간, 인종간의 골은 매우 깊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가시적인 정책이나 예산집행은 이뤄지지 않는 것 같다. 이는 덴마크 사회의 분위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일례로 소외계층에 대한 동등한 사회복지 혜택에 많은 비용이 들것이라는 전망에 반응한 일부 인종 단체들의 과격한 행동을 대중매체에서 확대보도하고 있다. 이럴수록 서로의 문화를 존중하며 상생하는 문화 프로그램의 역할이 중요하다.

우리는 스스로 세계에서 가장 단일한 혈통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수많은 이주 노동자들을 비롯한 타 민족 타문화의 유입은 현재 덴마크와 비슷한 상황이다. 데마크의 상황을 살펴보면서 느끼는 것은 타문화를 보는 눈에 관한 것이다. 나와 외양과 문화가 다른 이방인들을 색안경을 쓰고 보지 않게 도와주는 다문화 학습 프로젝트가 더욱 더 활성화되어 우리 문화뿐만 아니라 타 문화도 존중되는 분위기가 확산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