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문화예술교육 정책이 본격적인 제도적 틀을 갖추고 첫발을 내디딘 이후, 지난 20여 년의 시간은 일정한 한계가 있었음에도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심상 자체를 크게 변화시켰다.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성취는 단연코 문화예술교육의 패러다임을 전통적인 기능 중심 예술교육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빚어내는 ‘과정’으로서의 문화예술교육으로 전환해 냈다는 것에 있다. 과거 중산층 이상의 시민을 대상으로 한 교양으로서의 예술교육이나 전문예술인을 기르기 위한 기능적 훈련에 머물렀던 예술교육이, 2000년대 중반 문화예술교육 정책이 본격화되고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이하 진흥원)이 출범하면서 모든 시민이 평등하게 누려야 할 보편적 권리로 강조되었다. 이는 단순한 양적 확대를 넘어 문화예술이 삶의 질을 어떻게 고양할 수 있는지에 대한 철학적 전환을 동반한 것이었다.
이러한 개념적 전환은 지속적인 현장 생태계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예술가와 기획자, 교육자들이 현장에서 만나 새로운 교육적 실험을 도모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으며, 학교라는 전통적인 공교육 공간뿐만 아니라 지역의 문화재단·도서관·미술관 등 사회 곳곳의 다양한 문화시설에서도 당연한 역할로 확장되었다. 이제 문화예술교육은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 일상 속 가장 가까운 곳에서 마주할 수 있는 보편적 제도이다. 진흥원 20년이 쌓아 올린 이 성취는 분명히 인정되어야 하며 단단한 자산임이 틀림없다.
다만 오늘 우리가 다시 질문을 시작해야 하는 까닭은 이 성취에 결함이 있어서라기보다, 문화예술교육을 둘러싼 물음 자체가 전 세계적으로 겪고 있는 사회적 변화, 복지사회 담론과 민주주의의 위기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한때 더 많은 보호, 더 많은 접근, 더 많은 제도로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는 신념은 매우 강력했지만, 막상 눈 앞에 펼쳐진 세계는 제도적 확장만으로는 고립과 불안, 혐오와 불평등, 공동체의 해체를 충분히 막아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하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 필요한 성찰은 성취를 부정하는 비판이 아니라, 그 성취 위에서 복지사회가 놓치기 쉬운 관계의 질과 감각의 회복,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힘을 문화예술교육이 어떻게 다시 사유할 것인가를 묻는 일이다.
고립의 시대가 던지는 서늘한 환기와 증명의 한계
우리가 우선 돌아봐야 할 지점은 문화예술교육이 그토록 강조해 온 ‘지향’, 즉 과정 중심의 전환이 지니는 효용에 관한 것이다. 지난 20여 년간 문화예술교육은 비록 굴곡이 있었지만 과정 중심 문화예술교육으로 사람의 관계를 변화시키는 데 주목해왔다. 오늘날의 20대와 30대는 이러한 문화예술교육이 제도적으로 확산한 환경 속에서 성장한 세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오늘날 이 세대 안에서 고립과 단절, 그리고 날 선 혐오의 언어가 더욱 짙어지고 있다. 물론 이것이 단지 문화예술교육의 문제로만 치환될 수는 없다. 세계적 경제 위기 등 많은 사회적 변수가 강력하게 작동해왔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상황은 단지 한 세대의 문제로 축소될 수 없으며, 제도와 보호의 확장만으로는 삶의 균열을 봉합할 수 없다는 복지사회 담론의 세계적 위기와도 연결된다. 관계를 배우고 다름을 이해하는 경험이 문화예술교육에서 꾸준히 시도되어 왔음에도, 어째서 청년들의 일상은 여전히 파편화되고 서로를 향한 장벽은 높아만 지는가. 우리는 여기서 “그럼에도, 왜?”라는 뼈아픈 물음을 피할 수 없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과정으로서의 문화예술교육’이 사회적 관계를 실제로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경로와 과정을 좀 더 정교하게 점검하고 성과로 제시되어야 하는 문제에 봉착한다. 그동안은 좋은 프로그램을 얼마나 “많이” 공급했는지, 만남의 횟수와 참여자의 숫자가 얼마나 “많이” 늘었는지라는 양적 성과에 기대어 문화예술교육의 가치를 증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사실 이런 문제는 한국만의 특수한 문제가 아니다. 세계적으로도 문화예술교육은 물론 문화정책과 사회정책 전반에서 예산 당국이 측정 가능하고 비교 가능한 숫자를 요구하는 경향이 강하며, 문화예술교육 역시 그 압력 속에 놓여왔다. 참여자 수, 수업 시수, 만족도 수치처럼 빠르게 제시할 수 있는 지표가 반복해서 앞세워지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다만 문제를 단순히 어느 한 기관이 숫자만 선호하기 때문이라고 환원할 수는 없다. 예산 당국 또한 그러한 양적 지표만으로는 삶의 변화와 관계의 회복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는 한계를 잘 알고 있다. 더 어려운 지점은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지표와 설명 언어에 대해 아직 사회적 합의가 매우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질적 변화, 관계의 변화, 감각의 변화, 민주적 역량의 변화 같은 것을 공적으로 설명하고 합의 가능한 언어로 만드는 일이 매우 어렵기 때문에, 제도는 끝내 다시 양적 지표로 회귀하곤 한다.
그러나 오늘의 질문은 거기서 멈출 수 없다. 기존의 제도가 놓치기 쉬운 관계의 질, 감각의 회복,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힘, 민주적 공존의 역량을 문화예술교육이 어떻게 길러낼 수 있는지 묻지 않는다면, 우리는 여전히 성과를 말하면서도 현실의 균열 앞에서는 고개를 갸우뚱하는 딜레마를 벗어나기 힘들다. 사회적 유대의 붕괴라는 시대적 위기 앞에서, 이제 우리는 양적 성과와 질적 성과의 새로운 균형을 모색하고 양적 성과를 질적 변화로 연결하는 구조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계몽을 넘어 자율의 주체로
문화예술교육이 공공정책으로 자리 잡으면서 그 가치를 외부 세계, 특히 정책 결정권자를 설득하기 위해 종종 문화예술교육의 ‘사회적 기능’을 앞세우곤 했다. 그러나 이런 도구적 기능성을 강조하면 강조할수록, 시민은 예술을 통해 교정되어야 할 수동적 대상, 즉 가르쳐야 할 대상으로 전락하게 된다. 문화예술의 본원적 속성은 누군가를 특정한 방향으로 이끄는 계몽이 아니라, 사람의 내면 깊은 곳에 스스로 사고하고 창조할 수 있는 ‘자율의 씨앗’을 심는 일에 가까웠다. 이 물음은 오늘날 민주주의의 위기 국면에서 더욱 절실해진다. 혐오와 배제의 언어, 극단적 양극화, 공론장의 약화, 타인의 고통에 대한 무감각, 시민적 상상력의 쇠퇴가 민주주의를 조금씩 잠식하고 있는 현실에서, 문화예술교육 정책은 지금의 문화예술교육이 대상화된 시민을 향한 세련된 계몽인지, 아니면 서로 다른 존재들이 한 사회 안에서 함께 말하고 듣고 감각하며 견딜 수 있도록 돕는 주체 형성의 토대인지를 집요하게 물어야 한다.
이러한 주체의 위기는 결국 행정과 현장의 거리라는 현실적인 문제로 귀결된다. 정책의 목표가 촘촘해지고 행정의 관리가 정교해질수록 현장의 자율성은 좁아진다. 문화예술교육은 본질적으로 예측 불가능한 만남과 우연한 화학작용 속에서 피어나는 활동이다. 따라서 현장에는 무언가를 가득 채워 넣어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날 ‘비워둘 자유’와, 시행착오를 두려워하지 않고 과감히 시도할 수 있는 ‘실패할 자유’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것은 단순한 운영의 여백이 아니라, 서로 다른 존재들이 안전하게 말하고 듣고, 때로는 충돌하고도 다시 공존을 연습할 수 있게 하는 민주주의의 문화적 토대를 가꾸는 여백이기도 하다.
물론 문화예술교육이 민주주의를 구원한다고 곧바로 말할 수는 없다. 다만 민주주의의 위기를 건너기 위한 긴 고민 속에서 문화예술교육이 맡을 수 있는 몫이 무엇인지, 바로 그 가능성을 실험할 수 있으려면 행정은 현장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감독자가 아니라, 현장이 마음껏 실패하고 그 실패 위에서 새로운 예술적 행위를 모색할 수 있도록 든든한 바람막이가 되어주는 조력자의 역할 정립이 필요하다. 행정이 현재의 제도를 지키는 데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제도의 한계를 넘어 현장의 자유를 지켜내는 역할을 고민해야 한다.
정체성을 다시 묻는 일, 문화예술교육의 새로운 필요
이제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문화예술교육의 정체성을 다시 쓰는 일이다. 문화예술교육은 복지의 보완재인가, 교육의 창의성을 위한 장치인가, 지역사회의 결속을 위한 플랫폼인가, 혹은 예술 자체를 새롭게 사회 안에 배치하는 실천인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이 모호할수록 문화예술교육은 어느 곳에서나 필요하다는, 그럴듯하지만 방향이 불명확한 목표 설정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 그래서 이제는 사업의 확장 못지않게 문화예술교육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며, 무엇을 끝까지 지켜야 하는가를 분명히 되물어야 한다.
특히 공공 문화예술교육이 담지(擔持)해야 할 가치는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더 분명히 말할 필요가 있다. 더 많은 사람에게 접근 기회를 보장하고 공적 자원을 정당하게 배분하려는 보편성의 가치, 사람과 지역과 상황의 차이를 존중하며 획일화를 경계하려는 개별성의 가치, 그리고 예술적 실험과 참여자의 주체성을 보장하려는 자율성의 가치는 모두 공공 문화예술교육에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가치들이다. 다만 문제는 이 가치들이 제도의 틀 안에서 언제나 조화롭게만 공존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공공 제도가 안정성과 형평성, 관리 가능성을 중시할수록 보편성은 강화되지만, 개별성과 자율성은 쉽게 축소되거나 표준화의 언어로 흡수되기 쉽다. 그렇다면 다음의 과제는 이 셋 중 하나를 선택하는 일이 아니라, 이 긴장과 충돌을 어떻게 공적으로 다루고 사회적으로 설득할 것인가를 묻는 일이어야 한다.
문화예술교육은 예술을 활용하는 교육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교육의 형식을 빌려 예술적 사건을 발생시키는 장이어야 하는가. 이 물음 속에서 우리는 문화예술교육 자체가 하나의 예술적 행위가 될 가능성을 다시 본다. 누군가를 일정한 목표로 이끄는 수업이 아니라, 서로의 감각과 언어를 흔들며 아직 없던 관계를 생성하는 실천으로서의 문화예술교육 말이다. 그 가능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때만, 우리는 사업의 성과를 넘어 문화예술교육의 존재 이유를 더 깊고 넓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보편성, 개별성, 자율성의 긴장은 더 이상 추상적인 원칙의 문제가 아니라 현장의 설계와 평가, 지원 방식 전체를 다시 보게 만드는 실제의 문제가 된다. 모두에게 열려 있으려는 공공성은 어떻게 각자의 속도와 맥락을 지워버리지 않을 수 있는가. 형평을 위한 기준은 어떻게 예술적 모험의 여지를 남겨둘 수 있는가. 문화예술교육의 정체성은 아마 하나의 깔끔한 정의 속에서가 아니라, 이러한 충돌을 끝내 회피하지 않고 감당하려는 태도 속에서 더 분명해질 것이다.
*이 글은 2026년 5월 19일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KACES홀에서 열린 <2026 유네스코 문화예술교육 주간> 문화예술교육 포럼 ‘전환을 위한 질문’의 발제문에 바탕을 두었다.

- 염신규
- (사)한국문화정책연구소 소장, 인천대학교 문화대학원 겸임교수. 20세기에는 초보 영화 청년으로 영화를 만드는 일을 잠시 하다가 문화예술 정책과 문화기획 분야로 전업하여 20년이 조금 넘게 일해 왔다. 문화와 예술 분야에서 공공성과 자율성 관점으로 미세한 변화의 틈새를 찾고 있다.
axel3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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