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통솔의 대상이었던 친구들이 이제는 자기들끼리 수업시간을 채우고 있었다. 특별한 활동이 아닌 그들의 이야기로 말이다. 활동가로서의 목적을 다 제쳐두고서라도,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게 즐거웠다. 사회적 페르소나 따위는 만들지 않는 그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자신들을 표현하고 있었다. 일주일에 몇 시간을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있는데, 어찌 정이 안 들 수 있겠는가. 사운드를 채취하겠다던 애초 목적은 그들에게도 의미 있는 시간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따듯한 마음으로 변했다. 게다가, 알 수 없는 특이한 소리보다 그들의 이야기는 훨씬 생생한 사운드였다.”
김장원 _ 프로듀서 (2014년 ‘자폐힙합’ 프로그램 참여 활동가)
지난 해, 31명의 예술가는 ‘활동가’라는 이름으로 11개의 장애인복지시설에서 특별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들은 ‘예술교육’을 매개로 장애인과 예술가의 새로운 만남을 시도했다. 흔히 가르침을 ‘준다’는 수직적인 교육 방식에서 벗어나 장애인과 예술가 간의 수평적 교류를 전제로, 예술가는 장애인 참여자가 문화예술적 경험을 얻을 수 있게 도와줄 뿐 아니라 참여자의 변화를 목격하고 기록하는 역할자로서, 그야말로 해당 프로젝트를 적극적으로 수행하는 활동가로 참여했다. 이를테면 새로운 관계 모색을 통해 장애인과 예술가 간의 또 다른 가능성을 싹틔울 수 있는 다양한 접점을 찾아본다는 의미였던 셈이다.
2013년부터 시작된 ‘복지기관 문화예술교육 지원사업-활동가 파견사업’은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과 한국장애인복지기관협회가 공동으로 주관하는 사업으로, 장애인의 문화예술교육 수요를 발굴하고, 참여자가 좀 더 적극적으로 문화예술에 대한 욕구를 표현하고 충족시킬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 왔다. 따라서 참여자들을 대상화하여 정해진 프로그램을 순차적으로 진행하는 교육 방식과는 달리, 장애인과 예술가의 만남이 참여자와 활동가의 상호간의 살아있는 문화예술적 경험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지원한다는 것이 사업의 주된 내용이다.
자폐힙합
그간 이 사업을 통해 진행된 프로젝트는 그 사례 하나하나가 모두 다르다. 프로젝트마다 각기 다른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예술가들이 모여 새로운 방식의 협업을 구사하는 동시에 참여자 각각의 개성과 요구에 최대한 부응할 수 있게끔 되어 있다. 참여자를 고려한 맞춤형 프로그램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데 극복해야할 난관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참여자와 활동가의 깊이 있는 만남이 전제가 되어야 하는데 한정된 시간 안에 서로의 눈높이를 맞추고 소통의 장벽을 허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에서 예술가 스스로가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 지도 관건이었다. 하지만 참여자와 대등하고 자유로운 만남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과정들을 많은 활동가들은 참을성 있게, 슬기롭게 모색해 나갔다. 프로젝트가 시작되기에 앞서 워크숍을 진행했고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동안 ‘쌀롱’을 열어 활동가 중심으로 프로그램의 방향성과 진행상의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노하우를 공유해 나갔다. 다양하면서도 실질적인 장애인 지원사업의 새로운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이러한 노력과 과정을 2014년에 진행된 프로젝트 가운데 세 명의 활동가의 소감을 통해 살펴본다.
* 본 내용은 활동가들과 서면 인터뷰로 진행한 내용입니다.
거침없이 표출된 작은 파편들
프로젝트 ‘김밥노래방’
임지영 _ 미디어 아티스트
참여자 중 글 쓰는 것을 즐기던 분이 있었는데 ‘김밥노래방’은 그 분의 글에 자주 등장한 문구였다. 그 글을 읽어보면 전체 글이 하나의 맥락을 가지고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문장이나 단어들이 끊어져 다른 얘기들을 하고 있었는데, 글쓴이의 기분이랄까 느낌, 생각의 흐름 같은 걸 느낄 수 있었다. 어떤 의미나 목적을 두지 않은, 그 상태에서 워크숍의 흐름을 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또 엉뚱하다 느껴지는 단어의 조합이 재미있었다. 프로젝트 이름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이 프로젝트의 가장 큰 전제조건 중 하나는 워크숍 참여자들이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셋을 만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세 명의 활동가는 그림과 소리를 만들 수 있는 매체들을 중심으로 워크숍 계획을 세웠다. 참여자가 우리 셋 중에서도 누구와 함께 작업을 하는지에 따라 느낌이 다른 작업들이 나왔고, 또 당연히 매체마다도 각기 다른 표현들이 나왔다. 참여자의 선호도도 다르다. 이런 과정에서 어떤 것들이 표출되었다고 정확하게 말하긴 힘들지만 진행과정 내내 느꼈던 건 자신과 닮은 어떤 것들이 나온다는 것이다. “아, 이분은 이렇구나.” 하며 상대를 알아가는 과정 속에서 참여자의 흥미를 유발하는 조그만 무언가를 제시했을 때 작업은 무궁무진하게 뻗어 나갔다. 예를 들어 복잡한 선으로 그려진 고양이 그림을 보여드렸는데 참여자들은 그것을 따라 그리며 변형시켰다. 축구공의 육각형모양으로 이루어진 고양이, 럭비공 모양의 거북이, 볼링핀과 볼링공으로 이루어진 조랑말, 당구공으로 이루어진 곰, 농구공으로 이루어진 토끼 등등 거침없이 그려나가는 것이다. 놀랍고 신기했다. 참여자들은 모두 자기색깔이 분명한데 그것을 표출시킬 수 있는 기회가 없었던 것 같다.
한편 프로젝트 기간 중 쌀롱을 통해 관련자들이 모여 진행상황을 얘기하고 서로 도움이 되는 얘기들을 교환하는 시간이 있었다. 활동가와 기획가, 각 기관 담당자들이 모이는 이 자리에 정작 참여자인 장애인은 참석하지 못했다. 우리가 만난 참여자가 지적장애를 가졌기에 소통이 수월치 않아 그런 것인데, 참여자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나 가족의 얘기를 들을 수 있는 자리가 이어진다면 워크숍 활동가와 관계자들에게 좀 더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프로젝트 ‘김밥노래방’
활동가 : 공혜진, 임지영, 세르 지미
장르 : 미술 및 사운드아트
참여시설 : 주간보호시설 -영락주간보호시설
가장 생생한 사운드
프로젝트 ‘자폐힙합’
김장원 _ 프로듀서
참여자들은 기본적으로 입을 열지 않았고, 그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온전히 우리의 손에 달려있었다.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그들 또한 3시간 동안 가만히 있을법한 환경이었다. 그들의 입을 열고 이야기를 끌어낼 ‘인터뷰’라는 규칙을 가져왔다. 다행히도 주어진 활동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참여자들의 태도 덕분에 우리도 힘을 얻었다. 그렇게 우리는 매주 인터뷰를 반복했다. 좋아하는 동물을 묻는 첫 질문은 점차 미래에 갖고 싶은 직업을 물을 만큼 발전해 나갔다.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스스로 돌아보게 만드는 경험을 형식적으로 제공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한 친구는 골몰히 생각하더니 바리스타가 되고 싶다고 대답했다.
세상에 없던 것을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컸다. 프로젝트가 끝난 지금도 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무언가 새로운 걸 내놓고 싶은 것은 창작자로서의 본분이니까. 하지만, 단순히 충격을 주는 형태가 아닌 그들의 거짓 없는 이야기가 담긴 결과물을 만들게 되어 너무 기쁘다. 처음엔 작품을 우리의 통제 하에 있는 도구로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물을 다듬을수록 우리는 겸손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과 함께한 시간과 경험은 우리만의 것이 아니었고, 그들의 생생한 말소리 속에서 우리를 내세울수록 결과물은 힘을 잃어갔기 때문이다. 주위의 몇몇 친구들에게 음악을 미리 들려주었다. 한 친구는 사람의 말 한마디가 주는 소중함을 느꼈다고, 한 선생님은 이 대화에서는 평화가 느껴진다고 하셨다. 또 다른 친구는 상대적 약자의 모습을 매체로 만든 행위에 감동했다고 했다.
여섯 개의 트랙으로 완성된 음악들을 작게나마 앨범의 형태로 마무리하는 지금, 어떻게 하면 그들에게도 좋은 선물이 될까 고민하며 작업하고 있다.
프로젝트 ‘자폐힙합’
활동가 : 김장원, 한지헌
장르 : 공간연출 및 사운드아트
참여시설 : 직업재활센터 – 성모자애복지관
이 기분 좋은 청량감!
프로젝트 ‘직물을 기반으로 한 예술 활동’
나하나_ 패브릭 디자이너
작년 봄부터 일주일에 한 번씩 홀트일산복지타운에서 친구가 진행하는 미디어반 수업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거기서 참여자들과 함께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이 재미있다고 느끼던 차에 이 프로젝트를 제안 받게 되었다. 처음부터 프로젝트를 통해 대단한 걸 성취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일주일에 두 번씩 우리가 하는 작업으로 그분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프로젝트를 통한 어떤 결과보다는 미디어반 사람들을 만날 때 느꼈던 ‘청량감’ 같은 걸 기대했던 것 같다. 만나면 항상 웃고 기분이 좋아지고 집에 돌아갈 때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그런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기대했던 바대로 바바라방에서 바느질을 하고 돌아가는 길은 항상 마음이 가벼웠다. 하지만 처음엔 아무래도 신체가 불편한 분들이 많아 언니들(참여자)이 바느질을 가능할지 걱정도 있었는데, 의외로 손이 불편해도 바느질을 좋아하고 잘 하시는 분들도 있었다.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바느질의 매력은 공을 들인 만큼 눈에 보이는 결과가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바느질하는 행위 자체로 복잡했던 생각이 정리되고 차분해질 때가 있다. 쓸모 있는 물건을 만들 때나 쓸모는 없지만 예쁜 색 실로 자수를 할 때나 마찬가지로 원단위로 바늘이 지나간 길을 보면서 가끔 ‘이렇게 예쁜 걸 내가 만들다니’라고 생각할 때가 있는데, 언니들도 종종 바느질을 하다가 잠시 멈춰서 본인이 한 작업을 보고 손뼉을 치거나 “따봉”을 외치며 좋아하는 모습을 봤다. 아마도 내가 바느질을 하며 느꼈던 희열을 언니들도 그 순간에 느낀 것이 아닐까.
프로젝트 ‘직물을 기반으로 한 예술 활동’
활동가 : 최선희, 나하나
장르 : 전통 공예 및 디자인
참여시설 : 거주시설(종합복지타운) – 홀트일산복지타운
- 2014 복지기관 문화예술교육 지원사업 ‘활동가 파견사업’은
-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과 한국장애인복지관협회가 주관하는 복지기관 문화예술교육 지원사업이다. 활동가 파견사업은 장애인 일상에 내재된 문화예술에 대한 욕구를 분석하고 끌어내어 장애인이 새로운 자극을 경험할 수 있도록 돕는 것으로 예술가는 이 과정에서 기획자, 진행자, 기록자의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장애인과 수평적 관계 형성, 기존의 수직적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의 한계를 극복하고 관계를 만들어가는 새로운 형태의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이다. 2013년 시범사업으로 5개 프로젝트를 진행하였으며, 2014년에는 11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 2014 복지기관 문화예술교육 지원사업 활동가 파견사업 사례집 [PDF 보기]
– 2014 복지기관 문화예술교육 지원사업 활동가 파견사업 작품집 [PDF 보기]
- 염혜원 _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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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을 공부했고 월간 [한국연극], 국립오페라단, 예술경영지원센터에서 일했으며, 현재 자유기고가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나오시마 삼인삼색』(웅진리빙하우스)이 있고, 『연극 속의 청소년극, 청소년극 속의 연극』(국립극단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 등을 기획·편집했다.
장애인과 통하는 예술활동 사례는 통합교육현장에서 유익한 자료 발견!!, 감사함을 전합니다.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의 뜻깊은 프로젝트 추진에 갈채를 보냅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다양한 현장의 사례와 교육론을 전파하는 아르떼365가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