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의 시작은 동네 한 바퀴
“이리로 가자!!”
“아니아니, 여기 찍고, 여기로 가야 토끼 모양이 되지 않을까?”
“오! 좋~아!!”
중앙 현관 앞에 4학년 아이들이 쪼그려 앉아 지도 위에 머리통을 맞대고 있다. 이번 시간의 미션은 학교 옆 마을 조산동을 ‘토끼 모양으로’ 한 바퀴 도는 것이다.
“자, 그럼 출발! 얘들아, 차 조심해서 같이 걸어가는 것, 알지?”
“네~~!!”
예술강사와 함께 삼삼오오 학교를 빠져 나온 아이들은 학교 앞 큰 건널목을 건너 아파트 단지를 지난다. 성규(가명)가 아파트를 가리키며 말한다.
“아, 저기 우리 집인데 놀다 가면 좋겠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마을 어귀에 들어서는 아이들을 맞이하는 매화나무에 꽃이 활짝 피었다. 아이들은 작년에 선배들이 만들어 놓은 마을 이야기 지도를 들고 마을 탐방을 시작한다. ‘무서운 개가 사는 집’을 지나 ‘마당에 꽃이 예쁜 집’ 앞에서 아이들이 함께 사진을 찍는다. 일종의 ‘미션’이다. 따뜻한 봄볕 아래 서 있는 아이들 얼굴에 핀 웃음꽃이 골목을 가득 채운다.
무슨 봉사활동 혹은 체험활동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엄연한 정규 수업 시간이다. 이 수업의 이름은 ‘동네 한 바퀴’. 매주 화요일 3~4교시 남원초등학교 4학년 전체가 참여하는 국어, 사회, 미술교과 통합예술교육 프로그램이다.
문화예술통합교육의 조건
불과 5년여 전까지만 해도 남원초등학교는 좋은 문화적 환경(국악의 성지, 춘향테마파크, 광한루, 교육문화회관, 수영장, 국립‧시립국악원 등)을 가지고 있음에도 도심공동화 현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학생 수는 계속 줄어들고 정서적,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이 많아지다 보니 소위 ‘기피 학교’가 된 것이다. 그런데 지난 2011년 혁신학교 선정으로 인해 열정과 능력을 가진 지역 교사들이 남원초등학교로 결집하게 되면서 학교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리고 같은 해 예술꽃씨앗학교로 지정되며 보다 적극적으로 변화를 모색할 수 있게 되었다.
아이들을 정서적으로 돕는 데에는 문화예술교육만한 게 없다고 생각했죠. 게다가 교육과정을 총체적으로 꾸려갈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어요. 일반적으로 학교 예술교육은 각각 분절되어 있어서 문화가 되기는 어렵거든요. 다행히 동료교사와 예술 강사들 사이에 기능 중심의 예술교육보다는 통합적 예술교육이 필요하고 아울러 삶에 대한 폭넓은 경험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어요. ‘예술꽃씨앗학교’ 사업은 그런 우리의 문제의식을 담아내기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예산도 예산이지만, 4년 간 지속적으로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었죠. ‘과정 중심’의 교육이 되려면 긴 호흡으로 가야 하니까요.
– 권영오 (남원초 교사, 예술꽃씨앗학교 담당)
기능 중심의 장르 예술교육은 한계가 많아요. 학교 문화예술교육이 시스템에서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습니다. 사회적 이야깃거리를 끌어안아서 그것을 어떻게 예술적으로 표현해 낼 것인가의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에게 이런 문화적 소양을 길러줘야 하는데 이건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죠.
– 최기춘 (남원초 예술강사, 전주 삼천문화의집 관장)
(왼쪽부터) 남원초등학교 권영오 교사, 김민지, 김성진, 최기춘 예술강사
무엇보다 남원초등학교 교사들과 예술강사들은 현장 예술교육의 문제점,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관점을 충분히 공감하고 있었다. 좋은 예술강사들을 어떻게 영입하시는지 물었더니, “관계로 풀어야 하는 것 같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홈페이지에 공고문 하나 달랑 올려서는 절대 좋은 강사와 연결될 수 없다”는 말도 따라온다. 담당교사 자신이 대학 때부터 국악과 문화예술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해 왔었기 때문에 이런 네트워크를 십분 발휘해 강사풀을 구성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옆에 있던 김성진 예술강사(문화예술교육연구소 보물상자 대표)가 한 마디 거든다.
“권영오 선생님께서 학교와 저희들 사이에서 그야말로 ‘가교’ 역할을 해 주셨죠. ‘마음껏 해도 된다. 내가 책임지겠다.’ 뭐 그런 정신? (웃음) 예술강사들은 수업하면서 교사와 부딪히는 경우도 많거든요.”
학교의 전폭적인 지지, 담당 교사의 기획력과 네트워크 역량이 학교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는 데 큰 역할을 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제대로 된 문화예술통합교육을 이끌기 위해 꼭 필요한 몇 가지 조건도 발견할 수 있었다.
첫째, 좋은 학교를 만들어 보고픈 열정과 기획력이 있는 교사, 둘째,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관점을 함께 공유하고 실현할 수 있는 예술 강사, 셋째, 지역의 문화적 인프라. 이 세 가지 조건을 등에 업고 지난 4년간 예술꽃의 씨앗을 뿌린 남원초등학교는 올해부터는 ‘예술꽃새싹학교’로 선정되었다. 2011년 당시 287명이었던 학생 수는 2014년 현재 426명으로 늘었다. 이제 남원초등학교는 ‘기피학교’이기는 커녕 명실 공히 ‘가고 싶은 학교’가 된 것이다.
마을, 살아 움직이는 배움터
따뜻한 봄 햇살을 받으며 골목을 걷다 보니 하나 둘 아이들의 흔적이 눈에 들어온다. 전봇대에 그린 그림, 나무로 만든 문패, 돌맹이 아트…. 오래된 담벼락 그림이 햇볕과 비로 색이 바라고, 몇 개 유실된 돌맹이가 있었지만, 아이들의 흔적은 오롯이 남아 있었다.
“결국 지역, 지역 사람들과 만나야겠더라고요.”
2012년부터 남원초등학교는 본격적인 지역 연계 통합예술교육인 마을 프로젝트 ‘동네 한 바퀴’(4학년)와 ‘시장에 가면’(6학년)을 진행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아이들은 추상적인 ‘마을’이 아닌 내 삶 속의 ‘마을’을, 그리고 ‘마을’ 속에 있는 ‘우리’의 삶과 만난다. 살아서 펄떡이는 그곳을 배움터로 삼아, 그 속에서 느끼고 경험한 것을 다양한 예술로 담아낸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학교는 지역과 소통하며 지역민들의 생활에 스며드는 새로운 문화를 창출해 내고 있다.
‘동네 한 바퀴’의 경우 1학기에는 동네를 탐색하고 동네에 얽힌 이야기를 발견해 내어 이야기 지도를 만드는 수업을, 2학기에는 아이들이 원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2013년도에는 마을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2014년도에는 ‘마을 잔치’를 기획하여 학급별로 하루 카페 운영, 공연 보여드리기, 우편함 리폼하기 등의 활동을 하였다.
어르신 분들이 잘해주셔서 너무 감사하였다. 그리고 어르신들이 정말 착하셨다. 마을 주민들께 음료수를 드릴 수 있어서 행복했다. 마을 주민 분들과 이야기하고 웃고 떠들 수 있는 게 행복했다. 마을 어르신들과 함께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밖에 나가서 어르신들과 함께 해서 재미있었다.
– 4-2 장대경 (2014 남원초 어깨동무 문화제 <씨앗들이 영그는 예술놀이터> 중)
시장 프로젝트를 위해서는 남원 춘향골 공설시장(현재 문화관광형시장 육성사업의 지원을 받고 있다)과 연계한다. 아이들은 1년 동안 ‘시장을 읽고’(남원문화원, 남원시청, 시장번영회 강연 듣기) ‘시장에서 놀고’(시장 지도 만들기, 시장 물건으로 예술작품 만들기, 노점상 예술간판 만들기, 타일 벽화 등) ‘시장과 함께’한다.(시장 홍보 뮤직비디오 만들기, 스토리북 제작, 어깨동무 문화제 등)
살아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배운다는 거예요. 저희도 시장을 중심으로 한 지역문화를 어떻게 만드느냐 하는 과제가 있기 때문에 학교의 가치와 이슈와도 부합하는 지점이 있습니다. 시장 입장에서 학생들과 하는 프로젝트는 하나의 상징적인 사건이 되는 거죠. 아이들이 자신들의 삶의 터전에서 살아 있는 이야기들을 많이 만나는 것 또한 중요하고요. 장기적으로는 지역에서 아이들이 자기 비전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 소영식 (남원 춘향골 공설시장 문화관광형시장 육성사업단장)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 온 마을이 필요하다고 했던가. 남원초등학교의 문화예술통합교육은 지역의 공동체, 지역의 사람들이 자기 삶의 터전에서 함께 다음세대를 키워낼 수 있고, 키워내야 한다는 것을, 아울러 학교가 그 거점이 되어 각각의 공동체와 터전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아닌가 싶다.
배움은 어디 먼 곳에 있는 게 아니다.
- 예술꽃씨앗학교는
- 전교생 400명 이하의 소규모 학교에 최대 4년간 전교생의 문화예술교육을 지원하는 사업이다.
선정된 학교에는 전문 예술강사 활용, 교육기자재 구입, 예술 현장 관람 등을 위한 예산이 최대 연 8천만 원까지 지원된다. 학교는 국악 관현악, 미술, 연극, 통합예술교육 등 자율적으로 분야를 선택해 특색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학생들은 문화예술 활동을 통해 문화적 감수성과 창의성, 표현력과 협동심을 함께 키운다. 또한 농산어촌, 도심 속 취약지역 등 문화소외지역의 학교들을 중점적으로 선정하는데, 학교와 지역사회 연계 차원에서 학부모 강좌와 재능나눔 활동 등을 통해 지역 공동체에도 활력을 불어넣게 된다. 현재 전국에 총47개 학교가 예술꽃의 씨앗을 심고 새싹을 가꾸고자 노력하고 있다.
- 이은진_ 칼럼니스트
- 지역, 교육 및 육아, 커뮤니티 언저리에서 끄적거리고 싶은 사람. 지리산 자락 경남 함양에서 커피를 내리며 산다.
svjin96@gmail.com
남원의 성공사례…강원도에도 의지 있는 선생님들과 예술강사가 있겠죠?….이런 활동이 춘천에서도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