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화가가 된 지금까지도 엄정순을 따라 다니는 질문이 있다.본다는 게 뭘까?화가로서 아주 본질적인 이 질문은 그녀가 하는 모든 미술 작업의 화두가 되고, 시각장애아동들과 함께하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 프로젝트로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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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게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굉장한 행운아’라고 생각하는 엄정순 작가. 그러면서 자신이 발견한 자신의 재능은 ‘남들과 다르게 보는 시선’이라고 말한다.
“어릴 때 저는 소위 말하는 ‘4차원’이었어요. 예를 들면 우리집에 안 쓰던 수도 꼭지가 있었거든요. 가끔 그것을 틀면 녹물이 나와요. 그런데 가만히 그 녹물을 보고 있으면 황토빛 색깔이 점점 흐려지면서 오렌지빛이 감돌거든요. 그 순간 제 눈에 그것이 오렌지 주스처럼 보이는 거지요. 논리적인 머리로는 녹물인줄 알면서도 또 하나의 머리로는 오렌지 주스가 나오는구나 생각하는 거죠. ‘진짜 오렌지 주스가 나오는 수도 꼭지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이 발전하다 보면 친구들에게 말할 때는 ‘우리집 수도 꼭지에서는 오렌지주스가 나와.’라고 말하는 것이죠. 그때부터 저는 거짓말쟁이, 또는 이상한 아이가 되어 어른들에게 혼이 나곤 했지요. 이런 식으로 저의 생각을 계속 거부당하고 야단을 맞다 보니 ‘내 생각은 틀린 것’이 됐고 그것이 고민과 상처가 됐죠. ‘그럼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보는 거지?’ 그런 억압받던 기억들을 미술 작업으로 풀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그것을 ‘끌림’이라고 생각해요. 지금에 와서는 ‘남들이 틀렸다는 시선’이 ‘내가 보는 방식’이란 걸 아는 거죠. 이것은 창의성과도 깊은 연관이 있는데요, 작가는 그런 것들이 필요한 사람들이잖아요. 이런 재능은 한참 뒤에 깨달은 것들이죠.”
엄정순 작가의 이런 남다른 시선은 [장님 코끼리 만지기] 프로젝트를 탄생 시켰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
[장님 코끼리 만지기] 프로젝트는 엄정순 작가가 기획하고 진행하고 있는 맹학교 학생(아이)들과 함께 하는 미술 프로그램이다. 3년째 접어들고 있는 이 프로그램은 전국 12개 맹학교 투어를 계획하고 있으며 아시아 투어도 가질 예정이다. 앞으로 10년을 바라보는 장기 프로젝트인 셈이다. 프로그램 내용은 코끼리에 대한 사전교육, 코끼리 만지기, 코끼리 만들기의 과정으로 이루어 진다. 단지 손끝의 기억만으로 보이지 않은 것을 표현한다는 차원에서 새롭고, 창조적인 작업이라고 엄정순 작가는 설명한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는 불교 우화에서 출발해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시각장애에 대한 편견을 되짚어 보며 ‘과연 본다는 의미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것은 엄정순 작가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고민이기도 하다.
“저는 두 가지 작업을 하는 작가에요. 하나는 아뜰리에에서 그리는 작업이고 또 하나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 등 커뮤니티 아트라는 형식을 통해 공통체와 아트 프로그램을 하는 작가이죠. 처음에는 갈등도 참 많았어요. 개인 작업과 공동 작업에 밸런스를 맞추기 어려웠기 때문이었죠. 공동 작업을 시작한 이후 10년이 지났을 때 비로소 인정하게 되었죠. 나는 두 가지 방식의 작업을 하고 있는 작가라고요. 미술계에서는 시각장애인들과 작업을 하는 것을 사회봉사자로 보는 경향도 있어요. 일종의 ‘외도’라고 오해하죠. 하지만 저의 내면의 작업과 공동체 작업은 형태는 다르나 한 뿌리에서 나왔다고 생각해요. 그 뿌리는 ‘본다는 게 뭘까?’라는 질문인데요, 그 질문 때문에 시각장애아동과 만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어요. 표현하는 틀이 하나 더 생긴 것뿐이에요.”
극과 극이 충돌하면서 생기는 새로움
아이들에게 상상력을 키워주기 위해 엄정순 작가는 질문을 많이 한다고 한다.
“자원봉사자로 맹학교에 3년 동안 살았어요. 아이들과 제가 서로 알기 위해서는 질문이라는 방식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죠.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아이들이기 때문에 오히려 ‘사랑이 뭐야?’, ‘친구가 뭐야’ 등 굉장히 추상적인 질문도 가능했어요. 어른들처럼 생각에 지식을 더하지 않고 순수한 자기 생각을 말해 주거든요. 그런 대화가 통한다는 것이 저에겐 매우 희망적이었죠. 반대로 아이들이 하는 질문도 아주 상상을 초월해요. 예를 들면 어릴 때부터 안 보였기 때문에 아예 이미지가 없는 아이가 있었어요. 그 아이가 제게 이렇게 물었죠. ‘선생님, 제가 보기엔 사람들 얼굴이 똑같은 것 같은데 왜 누구는 예쁘다고 하고 누구는 밉다고 해요? 왜 그래요?’ 그 아이 때문에 무척 당황했던 기억이 있어요. 보이는 아이라면 절대 할 수 없는 질문이죠. 이것은 시력이 있는 우리에겐 철학적인 질문으로 와 닿고 아이들에게는 창의성을 발휘하는 계기가 되곤 하지요.”
이런 과정 속에서 엄정순 작가는 오히려 아이들에게 배운 것이 참 많다고 한다. 작가로서의 자신을 성숙 시키고 영감을 주었다고 한다.
“안 보이는 아이들과 작업하면서 작가로서 궁금했던 것을 해소하는 느낌이에요. ‘미술에서 소외된 아이들과 미술의 세계로 들어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라는 역발상은 신선함과 창의력을 낳았죠. 미술과 시각 장애는 ‘극과 극’인 것 같지만 본질적인 것은 같아서 대립되는 요소들이 충돌하며 굉장히 새로운 것이 나와요. 미술이 원래 이런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 이런 계속된 호기심과 열정이 애들한테도 도움이 됐죠. 새로운 프로그램을 만들어내니까요. 미술은 곧 시각이란 우리사회의 편견 속에서 안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미술에서 소외 되었던 아이들에게 작으나마 우리와 동등한 미술교육의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합니다. 이런 기회로 시각장애인도 자신의 재능을 찾고 예술가로서 독립적인 사회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미술은 오감으로 하는 거니까요. 시각장애인과 무얼 한다고 하면 만지고 듣는 것만 생각하는데요, 정작 그들은 이렇게 말해요. ‘안 보인다고 제발 만지라고 강요하지 마세요! 우리에게도 일반인에게 하는 것처럼 전문적으로 성의있게 설명을 잘 해주면 다 알 수 있다고요!’ 이런 귀한 경험들이 쌓여 ‘예술이 인간의 삶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나?’라는 고민을 작가로서 계속 하게 하죠. 그런 점에 감사해요. 저는 예술을 위한 예술을 하는 자폐적인 작가였거든요. 하지만 시각 장애아동들과의 만남은 그 자체로도 어마어마한 공부가 됐죠.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개인적인 작품도 본질적으로 달라졌어요.”
창의성이란, 아주 본질적인 질문을 본질에 충실하면서도 재미있게 풀어보려는 노력이라고 말하는 엄정순 작가. 이 끊임없고도 성실한 질문은 그녀의 모든 작업을 새롭게 할 것이다.
글_ 황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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