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과 공명은 사회적 상상력의 가장 본질적인 특징이다. 한 예술가가 발신한 목소리에 다른 예술가들이 감응하고 자신의 상상력으로 펼쳐가는 연쇄 칼럼을 기획했다. 김월식 무늬만뮤지엄 관장의 글에 소수정 사운드 아티스트, 이안정 작가, 정창환 충북교사극단 딴짓 대표가 각각 감응하는 글을 보내왔다. 예술(교육)가는 어떻게 사회적 상상력을 촉발하고, 그것은 어디에서 비롯될까. 여러 갈래로 난 사회적 상상력의 실마리를 함께 찾아보자.
보편과 차이 중간, 뾰족한 삶의 장소
김월식 무늬만뮤지엄 관장
나이 오십 넘어 낳은 딸이 내년이면 초등학교에 들어간다. 아직도 아빠의 눈에는 아기처럼 보이고, 걸음걸이 하나하나 밥 먹는 것 하나하나가 불안하고 또 대견하다. 아빠의 눈에는 이 딸이 아직 온전하게 자기의 몸과 마음을 책임질 수 없어 보인다. 어린 딸을 한 명의 인간으로 마주하고 타자로서 인정하고 존중하려면 이런 불안과 책임에서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지만 실제 삶은 그것을 쉽게 허용하지 않는다.
아이가 조금 더 어렸을 때 이것저것 바닥에 있는 것을 주워 먹었다. ‘지지’라고 막으며 먹지 못하게 했지만 내 눈 밖에선 언제든지 자신의 마음대로 이것저것을 주워 먹었다. 아이가 더는 이 행동을 하지 않게 되었을 때는 이미 복통으로 응급실에 몇 번 다녀온 후다. 아이가 처음 자리에서 일어나 두 발로 걸을 때는 아직 다리에 힘이 없고 중심을 잡지 못했기 때문에 걸을 때마다 넘어졌다. 탁자에 부딪치기도 하고 바닥에 무릎을 찧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늙은 아빠는 너무 속이 상하고 맘이 아팠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은 아이가 극복해야 할 성장의 과정이었고 이런 배탈과 넘어짐을 극복한 딸은 이제 아무것이나 주워 먹지 않고 쉽게 넘어지지도 않는 개구쟁이가 되었다.
이른바 스스로 모든 것을 깨닫게 되는 언러닝(unlearning)의 과정에는 지난한 수행이 필요하고 그것을 묵묵하게 기다려주는 배려의 시간도 필요하다. 이때의 성찰이나 깨달음과 같은 순간은 어쩌다 갑자기 다가온 행운 같은 것이 아니다. 묵묵하게 실천하며 수없이 많은 실수와 오해를 함께 살아내는 과정인 것이다. 작가로서의 삶도 비슷하다. 흔한 말로 작가는 창의력이 남다르다고 하지만 편협하고 뾰족한 삶이 남다른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방식의 꾸준한 삶의 수행이 만들어낸 보편과의 차이가 진정성 있는 작가적 사고로 인정받는 것이다. 말하자면 창의력은 뾰족한 삶이고 보편과의 차이에 있는 미디엄(medium)인 것이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작품(作品)이라는 프러덕트(Product)적 결과물로만 예술을 판단하고 이해하기 때문에 작품까지 도달하게 된 지난하고 첨예했던 과정의 그 긴 서사를 잘 알 수 없다. 결과적 아름다움이란 이런 해석과 감동의 오류를 갖기 쉽다. 그래서 한 작가의 예술을 이해하고 감동한다는 것은 단순한 즉자적 감동이라기보다는 그 작업 속에서 그 작가의 인생과 삶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발견하고 두근거리며 불안한 마음으로 그 통로의 문을 열고 그 길로 들어서서 더듬거리며 작가를 향해 다가서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라는 장소(성)로부터 예술이라는 장소(성)로 이동하는 것이며 비로소 한 작가의 삶이 통째로 발견되는(하는) 사건의 시작이 되는 것이다. 물론 사건 이후에도 사건은 계속 이어진다. 하지만 첫 번째 문을 여는 순간이 제일 중요하다. 시작이 반인 것처럼. 하지만 작가들은 친절하게 그 통로의 문을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꼭꼭 숨겨 놓는 경우도 있다. 때문에 그 문을 찾기 위한 불편하고 귀찮은 행위가 싫어 대부분 예술의 잘난 체(?)를 외면하고 무시하기도 한다.
문화예술교육은 이런 문과 통로로 인도해주는 안내자이자 매개의 영역이다. 때로는 통으로 예술가의 삶을 번역하는 번역자의 역할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에는 많은 맹점이 있고, 스스로 ‘문화예술교육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이 점에 대해 자기 질문과 해답을 찾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 과정을 통과한 교육철학과 신념 그리고 그를 통한 예술교육자로서의 자기 삶의 태도가 수행처럼 지속되었을 때 비로소 예술강사는 예술가의 작업으로 가는 매개의 장소(성), 미디엄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특별하게 대단한 것도 위대한 것도 아니다. 그저 우리가 다 아는 삶의 방식이다. 수없이 많은 실수와 오해를 통해 앎에 다가서는 방법이다. 그래서 이 ‘문화예술교육 매개’라는 장소적 미디엄은 이해와 오해, 실수와 사건이 마구 일어나면서 스스로 자신의 내일의 삶의 장소로 이동하게 되는 일종의 정류장 같은 장소(성)이다.
수없이 많은 사람이 이 장소(성)에 머물며 또다시 떠나게 될 장소의 방향과 속도를 확인하고 또 다른 환승의 기회를 맞는다. 여기에서 잠시 길을 잃고 헤매다가 당황스러운 경험을 갖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과정일 수도 있다. 자기 삶의 방향을 찾아가는 과정은 늘 그런 것이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앎에 다가가는 과정이다. 문화예술교육과 매개의 장소(성)는 그런 영토이고 그런 사건이 축적되는 두께의 미디엄이다. 확실한 것은 문화예술교육은 그런 앎의 과정을 축약시켜 과정을 삭제하는 서비스업이 아니다. 그리고 앎의 정답을 미리 알려주는 캠페인이나 주장하는 프로파간다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 또 이 글을 쓰면서 별소리를 다 한다.
불안과 두근거림 속에서 너를 기다리며 나를 본다
소수정 사운드 아티스트
연예인 강호동이 한 말이 있다. “인생에는 성공과 실패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성공과 과정이 있는 것이다.” 이 문장은 예술가의 삶을 대변한다. 어쩌면 성공은 없을 수도 있겠다. 작품을 열심히 만들었는데도 완성된 결과물이 아니라 끝없는 과정만 이어진다고 느낄 때가 많다.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 “온전히 만족한다”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이 과연 있을까. 늘 잡념에 흔들리고, 순간적인 상상에 웃음을 지었다가, 그 사소한 상상이 작품으로 흘러가곤 한다. 설명하기 어려운 이 작은 순간들이야말로 내가 예술가로 살아가게 하는 원천이다.
김월식 관장의 글에서 “실수와 시행착오를 통해 스스로 깨닫는 과정이 필요하다”라는 말은 내가 걸어온 작업의 순간과 예술교육 현장을 떠올리게 한다. 예술이든 교육이든, 우리는 흔히 결과를 향해 달려가지만, 사실 중요한 것은 예술을 통해 사회로 나아가고 그 과정에서 겪는 낯섦과 익숙해짐, 불신과 믿음 속에서 발견되는 배움이다. 특히 “문화예술교육은 내일의 삶의 장소로 가는 정류장”이라는 표현은 내가 경험한 현장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결과는 언제나 즉각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예술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그 순간에, 불시에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이렇듯 ‘사회적 상상력’은 서로를 기다리고 마주하는 순간에 드러나는 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철학가 장-뤽 낭시의 저서 『무위의 공동체』에서 말하듯 강제가 아닌 열림 속에서 우리는 타인을 만나고, 그 만남 속에서 자기 자신을 새롭게 인식한다. 공동체는 만들어져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생성되는 사건으로서 존재한다. 공동체는 외존(外存)하며 타자와 세계 속으로 나아가며 드러나며 발견하게 된다. 나의 작업과 문화예술교육 또한 그러하다. 음악과 소리, 파장의 움직임과 상호작용을 통해 관객과 참여자의 작은 경험은 서로의 이야기와 공명하며 확장되고, 예술은 이 과정에서 다리이자 매개가 되어 개인의 감각을 공동체적 울림으로 바꾸어낸다.
사운드 아티스트로서 다른 분야의 예술가들과 협업할 때, 우리가 처음 하는 일은 대개 같이 울리는 것, 즉 잡담이다. 특별한 주제도 없이 흘러가는 대화 속에서 엉뚱하게 튀어나온 말 한마디가 작업의 씨앗이 된다. 웃으며 던진 말이 어느 순간 작품의 주제가 되고, 나와 그의 삶을 예술로 이어주는 다리가 되었다. 창작은 늘 불완전하고, 기록할 수 없는 수많은 아이디어와 감각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그 불완전함이야말로 예술을 가능하게 하고,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 된다. 예술교육의 현장 또한 다르지 않다. 3년째 진행 중인 ‘모두작곡가’ 프로그램에서 나는 은둔고립 청년들과 함께 작곡을 해오고 있다. 첫 온라인 수업 때는 아무도 얼굴을 보여주지도 않고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당황스럽기는 처음이었다. 그러나 점차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생각을 솔직하게 말하고, 서로를 존중하는 방법을 배워나갔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귀담아듣는 시간을 견디고 내 작품이 존중받는 경험을 통해 오히려 그 안에서 그들만의 새로운 관계와 상상력이 움트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나는 문화예술교육이 참여자들의 인생에서 지나가는 하나의 정류장일 거라고 생각한다. 정류장은 늘 잠시 머무는 곳이지만, 때로는 방향을 바꾸는 환승의 공간이 되기도 하고, 놓치기도 하고, 거꾸로 타기도 하고, 낯섦을 마주하는 장소가 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자기 이야기를 꺼내놓고,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다시 각자의 길로 떠난다. 때로는 길을 잃고 방황하기도 하지만, 그 기다림과 머묾의 시간 속에서 서로의 삶이 스치고 얽히며, 새로운 상상력이 자라난다.
코로나 이후 우리는 모두 단절과 고립을 경험했다. 이런 시대에 예술은 더욱 중요한 ‘환승역’이 된다. 사회적 상상력은 추상적 구호에서 자라지 않는다. 그것은 타인의 목소리를 듣고, 낯선 관계를 받아들이며, 불완전한 과정을 함께 버티는 자리에서 발생한다. 그렇기에 문화예술교육은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함께 공존한다는 것, 함께 울린다는 것, 함께 공명한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들의 연속이다. 그러나 나는 동시에 나의 한계도 안다. 예술교육자가 정류장을 마련할 수는 있지만, 그 정류장에서 어떤 길을 선택할지는 결국 참여자 각자의 몫이다. 때로는 아무도 환승하지 않고 떠나기도 한다. 어쩌면 그 정류장을 지나갔다는 것조차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빈자리조차 상상력을 자극하는 흔적이 된다. 예술교육자는 완성을 도와주는 사람이 아닌, 가능성의 자리를 만들어주는 존재일 뿐이다.
사회적 상상력은 먼 곳에 있지 않다. 그것은 불완전하고 불안정한 삶의 순간에서, 우리가 웃고 질문하고 실수하는 그 자리에서 싹튼다. 김월식 관장이 던진 질문을 다시 받아 적는다. 사회적 상상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예술과 교육이라는 매개를 통해, 타자와 마주하며 나를 발견하고, 내일의 삶의 장소로 향하는 정류장에서 비로소 자라나는 것이 아닐까.
일상에 잠재된 낯섦: 예술이 촉발하는 사회적 상상력
이안정 교사·작가·교육학 박사
김월식 관장의 글에서 논의하는 ‘사회적 상상력’은 피상적 공상이나 일시적 정서 반응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예술작품의 심층적 감상과 예술적 행위에의 능동적 개입을 통해 감각의 지평과 상상의 범위를 확장하는 과정이며, 그 확장은 개별 주체의 내면적 변화를 넘어 타자와 공동체를 향한 윤리적·사회적 지향으로 나아가 더 나은 미래를 기획할 수 있게 하는 창조적 잠재력이다. 이러한 개념은 필연적으로 예술가, 예술교육가에게 본질적인 성찰의 과제를 제기한다. “변화의 발화점은 어떠한 조건 속에서 마련되는가? 그리고 그 변화는 예술의 어떤 본질적 속성과 미학적 힘에서 기원하는가?”
예술은 익숙함에 안주한 우리의 지각을 깨우며 일상에 잠재된 낯섦을 드러낸다. 일상에서 ‘자명하다’고 믿었던 세계의 결과 틈을 비틀고 확장하는 것이다. 이 글이 주목하는 사회적 상상력은 ‘나’의 경계를 넘어 ‘우리’의 지평으로 이동하게 하는 전환의 힘이다. 문학 속 한 문장은 세계에 대한 내적 지도와 인식 지형을 재구성하는 창조적 사건이다. 그 문장은 종이 위에 머물지 않고 독자의 심연으로 스며들어 잠들어 있던 감각과 사유를 일깨운다. 이 순간 세계는 낯선 빛을 띠며 변모하고 거리의 표정과 창밖의 하늘은 새로운 계절처럼 다가오며 망각 속에 묻혀 있던 기억이 현재로 소환된다. 이러한 ‘인식의 재편’은 곧 사회적 상상력이 움트는 지점이다.
사회학자 C. 라이트 밀스는 사회적 상상력을 “개인의 경험과 사회 구조를 연결하여 이해하는 능력”으로 정의했으며, 맥신 그린은 여기에 예술을 통한 감수성을 더해 “타인의 삶을 공감하며 아직 도래하지 않은 가능성을 그려내는 힘”으로 확장했다. 맥신 그린이 말하는 ‘깨어있음(wide-awakeness)’은 무심히 흘러가는 일상에서 ‘다르게 볼 수 있는 가능성’을 포착하는 능동적 태도이다. 이러한 태도는 문학, 음악, 연극, 미술 등 예술의 장에서 가장 선명하게 발현되며 예술적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타인의 시선으로 세계를 응시하게 하고 그 감각을 사회적·윤리적 실천으로 이끄는 다리가 된다. 예를 들어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광주의 비극을 역사적 서사가 아니라 한 개인의 목소리와 상흔을 통해 체험하게 함으로써 역사와 현재를 연결한다. 김수영의 시 「풀」은 눌려도 다시 일어서는 생명력을 통해 억압과 저항의 의미를 재발견하게 한다. 이와 같은 예술적 체험은 “이후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실천적 질문을 생성한다.
예술적 경험은 정서적 울림에 머물러서는 그 힘을 온전히 발휘할 수 없다. 그 울림이 구체적인 행동으로 변환될 때 예술은 비로소 사회를 진동시키는 살아 있는 호흡이 된다. 작품 속 인물의 감정과 서사가 동시대의 사회문제와 교차하는 순간 관객과 학습자는 더 이상 ‘관망하는 자’가 아니라 ‘응답하는 자’로 변모한다. 이들의 시선은 세계를 새롭게 재배치하며 발걸음은 변화를 향한 첫 궤적을 그린다. 이 과정에서 예술이 품고 있던 사회적 잠재력은 가장 선명하고 강력하게 드러난다. 맥신 그린은 “상상력이 없는 삶은 닫힌 삶”이라고 말한다. 즉, 상상력은 단지 내면에서 끝나는 환상이 아니다. 그것은 반드시 ‘실천(praxis)’으로 이어져야 하며 현실 세계 속에서 변화를 만들어내는 힘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실천이란 깨달음을 행동으로 전환하여 사회와 타인의 삶 속에 구체적인 변화를 심는 과정이다. 예술가와 예술교육가는 이 경계 앞에서 가장 섬세하고 정교한 열쇠를 쥔 사람들이다. 결국 예술은 상상을 고립된 사유 속에 가두지 않고 삶 속에 심어 윤리와 연대의 꽃을 피우며 공동의 미래를 열매 맺게 한다. 이렇게 상상력은 사유를 넘어 사회적·윤리적 변화를 이끄는 실천의 힘이 된다.
사회적 상상력은 거대 담론이나 장엄한 무대 위에서만 발현되는 것이 아니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읽은 짧은 시 한 편, 골목길의 벽화 앞에 선 짧은 순간, 오래된 시집 속에서 우연히 만난 한 구절에서도 시작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울림을 소멸시키지 않고 ‘나’와 ‘우리’를 재연결하는 일이다. 책장을 넘기는 행위는 사소해 보이지만 그것은 자아를 재구성하고 공동체의 윤리적 지평을 확장하는 문학적 사건이다. 모든 변혁은 한 문장, 한 이미지, 한 장면이 열어놓은 세계 속에서 싹튼다. 사회적 상상력은 예술의 본질적 속성—낯섦이 불러오는 각성, 울림이 파생하는 공감 그리고 공감이 이끄는 전환—에서 비롯된다. 예술가와 예술교육가는 이 힘을 활성화하는 매개자이자 촉매로서 개인의 변화가 사회적 변혁으로 확장되는 경로를 열어간다. 이 글이 말하듯, 더 나은 내일은 바로 이러한 상상력에서 기원한다. 그리고 그 내일은 지금, 우리 앞에 놓인 한 문장, 한 작품, 한 예술적 경험 속에서 이미 움트고 있다.
“오늘, 너의 삶을 내 마음에 그려 넣는 이 상상—그 한 줄이 내일의 문을 연다.”
함께 만드는 삶의 무대: 연극이 우리를 잇는 방식
정창환 충북교사극단 딴짓 대표·가흥초등학교 교사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때때로 멈춰 서서 자신과 타인을 깊이 이해하고, 나아가 사회의 복잡한 문제들을 통찰할 시간을 갈망한다. 김월식 관장의 글에서 예술의 본질이 ‘결과물’이 아닌 ‘과정’에 있음을, 그리고 예술교육이 삶의 방향을 확인하고 새롭게 이동하게 하는 ‘정류장’과 같은 ‘장소’라는 사유에 깊은 공감을 표한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연극이라는 예술 형식이 품고 있는 특별한 힘을 떠올리게 된다. 미술가의 시선으로 바라본 예술적 여정이 다소 정적인 언어로 표현되었다면, 나처럼 교육연극을 하는 사람에게 예술은 훨씬 더 역동적이고, 뜨겁고, 때로는 혼란스러우면서도 그 자체로 압도적인 드라마*이니까.
* 드라마의 정의는 학자마다 다르지만, 필자는 ‘사람들이 같은 시간과 장소에서 마치 다른 존재가 된 것처럼 상상하고 행동할 때 공유되는 직접경험’이라고 본다.
* 드라마의 정의는 학자마다 다르지만, 필자는 ‘사람들이 같은 시간과 장소에서 마치 다른 존재가 된 것처럼 상상하고 행동할 때 공유되는 직접경험’이라고 본다.
연극은 결코 완결되지 않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과정이다. 아이들과 함께 장면을 만들어갈 때를 떠올려보면, 대사는 틀리고 동작은 삐걱거리며, 예상치 못한 웃음과 불편한 침묵이 불쑥 끼어들곤 한다. 그러나 바로 그 불완전하고 허술한 순간 속에서 자기 자신을 직면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김월식 관장이 언급했듯이 완벽하게 짜인 정답을 추구하기보다 실패와 흔들림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언러닝(unlearning)’의 과정이 바로 이 무대에서 시작된다. 연극은 참여자들이 기존의 역할을 잠시 벗어던지고, 끊임없이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우리나라의 마지막 황새에 얽힌 이야기를 드라마로 경험한 적이 있다.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관성저수지에 우리나라의 마지막 황새가 살고 있었다. 아이들은 모두 황새가 되어 먹이를 먹고, 잠을 자고, 새끼를 키웠다. 그러다가 사냥꾼이 쏜 총에 맞아 생을 마감한다. 이 짧은 시간 동안 아이들은 자신과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보며, 그 존재가 느끼는 감정과 처한 상황을 상상하고 몸으로 살아보았다. 이것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었다. 다른 존재의 삶을 몸으로 살아보는 훈련이자 감각의 확장이며, 나아가 개인의 문제에 깊이 공감하고 이해하는 과정이었다. 이처럼 연극은 참여자들이 ‘비동시성(non-simultaneity)’의 경험을 통해 현재의 내가 과거 또는 미래의 존재가 되어보는 것을 가능하게 하며, 시공간을 초월한 공감 능력을 키운다.
다양한 인물의 경험과 감정, 움직임, 오브제 등을 이용해 즉흥극을 만드는 행위는 먼저 개인의 내면을 깊이 흔들어 깨운다. 익숙한 리듬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고, 낯선 언어와 몸짓 속에서 자기 안의 숨겨진 가능성을 다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변화는 곧바로 사회적 울림으로 이어진다. 무대 위에서 한 아이가 학교폭력을 연기하며 눈물을 흘릴 때, 다른 아이는 그 아픔에 공감하며 자신 혹은 주변 친구의 비슷한 경험을 떠올릴 수 있다. 바로 여기에서 맥신 그린과 C. 라이트 밀스가 말한 ‘사회적 상상력’이 발현된다. 연극이라는 안전한 무대 위에서 우리는 특정한 한 아이가 겪는 개인의 문제가 사실은 교육 시스템의 부재, 사회적 불평등, 혹은 소통 단절과 같은 더 큰 사회적 구조와 시스템의 결과일 수 있다는 ‘공적인 이슈’로 확장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즉, 연극은 개인이 겪는 어려움을 단순히 ‘나만의 문제’로 가두지 않고, 무대 위에서 이를 가시화하고 다양한 관점으로 탐구함으로써 ‘우리 모두의 문제’로 인식하게 만든다. 한 아이의 즉흥적인 대사에 다른 아이의 표정을 흔들리고, 그 장면을 지켜본 누군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연극이 끝난 후에 진솔한 대화를 통해 서로의 경험과 감정을 공유한다. 작은 예술적 순간이 강력한 파문처럼 퍼져나가면서, 우리는 서로의 삶을 새롭게 이해하고, 더 나아가 우리가 함께 만들어갈 사회의 모습을 다르게 상상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가와 예술교육가는 무엇을 해야 할까? 중요한 것은 명확한 정답을 제시하거나 안전한 길을 미리 알려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실패해도 괜찮고, 서툴러도 괜찮으며, 때로는 우스꽝스러워 보여도 괜찮은, 그래서 두려움 없이 안전하게 흔들릴 수 있는 ‘탐색의 공간’을 열어주는 일이다. 드라마 리더는 아이들이 서로의 거울이 되어 타인의 감정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자신의 깊은 이야기를 두려움 없이 내어놓을 수 있도록 돕는 진정한 ‘조력자이자 촉매제’의 역할을 해야 한다. 예술교육가는 단순히 기술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아이들의 가장 원초적인 표현 욕구를 존중하고, 미완성된 생각들이 기꺼이 예술의 형식을 빌려 사회적 의미를 탐색할 수 있도록 지지하는 ‘영혼의 설계자’와 같다.
결국 이러한 변화는 예술의 본질에서 비롯된다. 예술은 완결된 산물이 아니라 미완의 과정이며, 삶을 다시 질문하고 끊임없이 탐색하게 만드는 살아있는 힘이다. 연극 무대는 완벽한 결과물을 완성하기 위한 장소가 아니다. 그곳은 끊임없이 다시 살아보고 다른 가능성을 실험하며, 개인의 문제를 사회적 이슈로 확장하는 ‘공동의 작업실’이자 ‘변화의 용광로’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서로의 삶을 엮어가며 깊은 상호 주관성을 형성하고, 더 넓은 감각을 얻으며 더 나은 사회를 상상할 힘을 얻는다.
연극은 단순히 무대를 꾸미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나와 타인의 삶을 촘촘히 연결하는 다리이자, 사회 전체를 새롭게 상상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강력한 훈련이다. 대사를 읊고, 행동하며, 다른 사람의 상호작용을 통해 장면을 만들어가는 모든 과정이 작은 씨앗처럼 자라나, 우리 사회에 진정한 공감과 연결을 만들어내고 내일의 풍경을 바꾸는 힘이 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예술교육은 바로 이 과정을 묵묵히 지켜주고 확장하는 든든한 작업실로서, 그 소중한 씨앗에 끊임없이 물을 주는 역할을 해낼 것이다.

김월식
무늬만뮤지엄 관장, 무늬만커뮤니티 디렉터. 다사리문화기획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서사의 이면》(2002), 《근육의 생각》(2015) 등 네 차례 개인전을 열었고, 《총체적 난극》(2013), 《수작, 먹고 사는 기예술》(2017) 등 다양한 전시와 프로젝트를 기획・총괄했다.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경기문화재단 등 여러 기관에서 문화예술교육 콘텐츠 기획에 참여했으며, 문화예술 특강, 심의, 컨설팅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2023년 무늬만뮤지엄을 열고 다양한 프로젝트와 전시를 이어오고 있다.
페이스북 @wolsik.kim.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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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정
사운드 아티스트이자 작곡가로, ‘존재, 공존, 공명, 경계’라는 주제를 다루며, 청각과 시각의 개념적 교차를 탐구한다. 소리와 빛의 전환, 감각의 확장을 통해 새로운 공감과 인식에 대해 성찰한다. 디즈니플러스, 넷플릭스 등 다수의 영상 음악 작업을 넘어, 독일·미국·한국을 비롯한 국내외 무대에서 XR과 이머시브 사운드를 결합한 오디오-비주얼 전시를 이어가고 있다. 대학에서는 예술가로 살아가는 여러 방법과 문화예술교육에 대해 가르치고 있으며 2015년부터 예술기업 ‘소리로’를 이끌며 남녀노소와 함께하는 참여형 예술교육을 기획 운영하고 있다. 사소한 소리가 서로의 삶을 잇는 상상력의 씨앗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며 활동 중이다.
soriro2015@gmail.com
인스타그램 @sumo895
soriro201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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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정
교육학 박사(국어교육)이자 작가, 문학평론가, 시인, 강연가, AI디지털미래교육연구소 부대표로 인천 중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문학적 사유로 직조한 변증법적 초상, 존재의 결을 따라 흐르는 언어와 현실의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며 다수의 저서와 논문을 통해 연구와 창작의 길을 꾸준히 걸어가고 있다. 저서로는 시집 『열두 달이 느린 하루라도 괜찮아!』(2020), 『7일을 지우고 하루 더 그리는 그대』(2021), 에세이 『불안해서 열심히 산다는 그대에게』 (2022), 『이번 생에는 철들고 싶지 않습니다』(2023), 학술 교육 연구서 『맥신 그린의 예술교육 철학과 심미적 체험 기반 문학 수업 연구』 (2025) 등이 있다.
lee3314@daum.net
lee3314@daum.net

정창환
충청북도 충주시 가흥초등학교 교사이자 충북교사극단 딴짓 대표. 전국교사연극모임 사무국장. <이야기 도깨비가 들려주는 여우누이 이야기> <토끼전> <도깨비와 순삼이> 등 우리 옛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들어 연출가, 배우, 무대감독 등 여러 역할을 해가며 공연을 올리고 있다. 딴짓이 공동창작한 연극 <도깨비와 이순삼>은 동화 『요괴 봉인 해결사』(2023)로 출판되었다.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예술꽃 씨앗학교’ 컨설턴트, 인도네시아 ODA 강사, 충북문화재단 ‘헬로우아트랩’ 퍼실리테이터 등 학교문화예술교육 활성화를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시골의 작은 학교에서 여러 예술을 접목한 수업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skyflower9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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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협하고 뾰족한 삶을 향하는 정류장에서
사회적 상상력은 어디에서 오는가①
공감이 가네요
편협하고 뾰족한 삶을 향하는 정류장에서
사회적 상상력은 어디에서 오는가①
기대만점이네요
작가의 글을 읽으며 예술과 교육은 결과보다 과정 속에 진정한 의미가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실수와 시행착오조차 배움이 되고 문화예술교육은 그 길을 함께 걸어가는 안내자라는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