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과 공명은 사회적 상상력의 가장 본질적인 특징이다. 한 예술가가 발신한 목소리에 다른 예술가들이 감응하고 자신의 상상력으로 펼쳐가는 연쇄 칼럼을 기획했다. 손병걸 시인의 글에 박지선 프로듀서, 이광준 문화도시 플레이 플랫폼 대표, 함돈균 문학평론가가 각각 감응하는 글을 보내왔다. 예술(교육)가는 어떻게 사회적 상상력을 촉발하고, 그것은 어디에서 비롯될까. 여러 갈래로 난 사회적 상상력의 실마리를 함께 찾아보자.
바람은 보이지 않아도 시원하게 분다
손병걸 시인
버려진 기타
언제부터였을까
켜켜이 쌓인 먼지를 헝겊으로 문지르고
녹슬고 해진 조임새를 닦은 뒤
간신히 조율을 마치고 부르는 노래
거친 벌판으로 달려가자, 젊음에 태양을 마시자
보석보다 찬란한 노래 한 소절이 끝나기도 전
팽팽히 당긴 기타 줄이 풀리고
무지개가 살고 있는 언덕이 묘연해진다
눈먼 걸음, 내 흰 지팡이 관절뼈 같은
삐걱대는 조임새만 고치면 될까
기타를 이곳저곳 두드리고 더듬어 보니
크고 작은 상처들이 즐비하다
한때는 팽팽히 빛나던 선율
이제는 스르르 풀려 버리는 엇박자
너와 나의 노래는 끝난 것일까
대뜸 너를 주워 온 쓰레기장이 떠오르지만
나는 너를 꼬옥 끌어안고 일어서지 못한다
내 눈동자에 스미지 않는 빛처럼
뒤틀리고 깨진 커다란 울림통에서
음정과 박자가 흐릿해지지만
우리의 불협화음이 아름다운 노래가 될 때까지
나는 너를 닮은 나를 버리지 못한다
언제부터였을까
켜켜이 쌓인 먼지를 헝겊으로 문지르고
녹슬고 해진 조임새를 닦은 뒤
간신히 조율을 마치고 부르는 노래
거친 벌판으로 달려가자, 젊음에 태양을 마시자
보석보다 찬란한 노래 한 소절이 끝나기도 전
팽팽히 당긴 기타 줄이 풀리고
무지개가 살고 있는 언덕이 묘연해진다
눈먼 걸음, 내 흰 지팡이 관절뼈 같은
삐걱대는 조임새만 고치면 될까
기타를 이곳저곳 두드리고 더듬어 보니
크고 작은 상처들이 즐비하다
한때는 팽팽히 빛나던 선율
이제는 스르르 풀려 버리는 엇박자
너와 나의 노래는 끝난 것일까
대뜸 너를 주워 온 쓰레기장이 떠오르지만
나는 너를 꼬옥 끌어안고 일어서지 못한다
내 눈동자에 스미지 않는 빛처럼
뒤틀리고 깨진 커다란 울림통에서
음정과 박자가 흐릿해지지만
우리의 불협화음이 아름다운 노래가 될 때까지
나는 너를 닮은 나를 버리지 못한다
갑자기 두 눈을 잃었다. 청천벽력이었다. 세상에서 쓰임이 끝난 것 같았다. 수시로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때마다 시를 썼다. 와중에 쓰레기장에 버려진 기타 한 대를 만났다. 학창 시절 멈춘 문학과 노래는 나를 다시금 예술의 길로 안내했다. 어찌어찌 불협화음의 시간이 바삐 흘러 지금은 ‘통기타 시인’으로 제법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보아야 보이느냐? 들어야 들리느냐? 느끼는 게지! 바람은 보이지 않아도 시원하게 불지 않느냐.”(도연명)
수많은 감각 중 강력한 감각이 시각이다. 누구나 쉽사리 부정할 수 없다. 나도 한때는 그랬다. 보아야 믿는 시절이 있었다. 중도 실명 뒤에도 한참을 더 그랬다. 그러나 감각의 무게는 다를 뿐이었다. 여러 감각은 저마다 다른 형식으로 아름다운 영력을 가지고 있었다.
감각은 오감 외에도 수많은 감각이 존재한다. 그 모든 감각은 사전이나 관념 속에 갇혀있지 않다. 상황에 따라 적응하고 융합한다. 어느 감각도 예외일 수 없다. 새롭게 발달하는 것이 아니었다. 머물러 있는 것이었다. 무관심 속에서도 굳건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었다. 자신의 역할을 수행할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 다양한 감각이 머무는 곳이 신체이다. 그러므로 신체는 다른 말로 감각들의 총체이다. 그러나 닮은 듯 다른 것이 핵심이다. 이를테면 남녀노소가 다르다. 그 신체들이 각기 감각한 결과 또한 당연히 다르다. 사회적으로 더 파고들면 또 다른 신체적 감각의 영역이 있다. 장애와 비장애이다. 여기서 핵심은 다르다는 표현이다. 틀린 것이 아니다. 신체적 차별이 없는 감각들의 평등이 중요하다.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감각들은 서로 보완적이고 협력적이다. 그 결과로 발전하는 것이 사회적 신체이다. 그런 맥락에서 감각을 사회적 공동체로 이끄는 분야가 예술의 역할이었고 그 길을 맨 앞에서 걷고 있는 이들이 예술가이다.
예술은 독창적인 감각을 통해 새로운 메시지를 세상에 전파한다. 얼핏 들으면 대단히 복잡하게 생각할 수 있겠다. 그러나 어렵게 생각하지 않는다. 버려진 기타와 새로운 노래를 부르면 될 일이다. 그리하여 저마다 삶이 새로운 연주가 되면 될 일이다. 예술은 멀리 있지 않다. 주변부적 일상이 따스하게 품고 있다. 예술의 본질은 없음을 새롭게 만드는 발견만이 아니다. 간과한 있음에 대한 새로운 해석도 있다. 결국, 예술은 시대를 막론하여 세상의 무릎을 치게 하는 변화의 원천이어야 한다. 시각을 잃고 뒤늦게 알았다. 제자리를 지켜온 감각들에 대해 차별한 잘못을 알았다. 무심히 곳곳에서 일찍 버려지는 삶들을 알았다. 그러나 불협화음도 분명히 노래임을 알았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예술임을 알았다.
연결이 만들어내는 파장 그리고 변화의 원천
박지선 크리에이티브 프로듀서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누군가의 집에 머무는 중 소란한 소리에 창문을 열어보니, 사람들이 물에 휩쓸려가고 있었다. 뉴스는 갑작스러운 대홍수를 전했다. 잠시 후 사이렌이 울리고, 전쟁 발발 소식이 이어졌다. 잠에서 깬 나는 제일 먼저 핸드폰을 검색했다. 사실일 리는 없지만, 마음 한편이 무거웠다.
지난 2주 동안 나는 예술가들과 함께 아시아, 탈식민주의, 기후 위기를 주제로 워크숍을 진행했다. 아시아의 최신 뉴스를 모아 읽으며, 아시아의 지형을 살펴보는 것에서 출발했다. 파키스탄의 대홍수, 인도네시아와 네팔에서 불평등에 맞선 Z세대들의 시위, 미얀마의 지속되는 내전, 갈 곳 없는 로힝야 난민들의 삶. 무거운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아시아의 지도를 그리고, 그 안에 산맥과 강을 그려 넣으며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아 나갔다. 기후 위기 작업을 꾸준히 이어온 섬에 사는 한 배우에게 바다는 여전히 아름답다. 그러나 언젠가 집 앞 텃밭까지 물이 밀려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다. 그녀는 인도네시아 자바섬에서 매일 맹그로브 나무를 심는 한 여인의 삶을 만났다. 늘 “어디로 피해야 할까”를 고민하던 그녀는 이제 “어떻게 내 삶을 지킬 것인가”로 질문을 바꾸어 나가고 있다.
한국에서 여러 정체성을 안고 살아가는 모두는, 아시아에 사는 각자의 정체성을 함께 고민하며 관계를 엮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막연하고 멀게만 느껴지던 아시아가 점점 가까워졌다. 하나의 덩어리로만 보였던 무수한 재난과 사건이 점차 뚜렷해지면서 그 안의 개개인을 보기 시작했다.
우리는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 기후 위기와 전쟁이라는 거대한 재난 속에서 무력함에 현실을 미뤄두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로서 우리의 몸과 목소리에 저들의 삶을 어떻게 비출 수 있을까. 그들의 세상으로 겨우 한 발 옮겼을 뿐인데, 수많은 질문이 쏟아지고, 온몸의 감각이 아시아를 향하기 시작한다.
또다시 강화에 와 있다. 이번 2주는 ‘소멸’에 대한 리서치를 한다. 강화의 예술가들과, 이탈리아·싱가포르·일본·말레이시아에서 온 동료 예술가들과 함께하고 있다. 강화의 농부와 상인을 만나고, 철책 너머 북한 땅을 바라보고, 갯벌에서 작은 생명체들을 만나고, 종아리까지 빠지는 갯벌 위를 달리며, 섬의 풍경을 온몸으로 감각하고 있다. 싱가포르에서 온 동료는 플라우 우빈(Pulau Ubin)이라는 작은 섬의 원주민과 오랫동안 작업해 왔다. 그는 점점 강화도와 플라우 우빈의 사람과 장소가 연결된다고 말한다. 아시아에 처음 온 이탈리아 동료는 아무도 수용하지 않지만 동시에 모두를 품고 있는 듯한 강화의 장소성을 남부 이탈리아의 고향과 연결한다.
2주 동안 쌓인 아시아와의 연결 감각이 확장되며 수많은 대화가 오갔다. 사는 곳은 다르지만 우리는 이미 복잡하게 얽힌 공통의 미래를 공유하고 있었다. 우리가 직면한 동시대의 삶과 이야기를 어떻게 연결하고 확장해 나갈 수 있을까. 세계의 동쪽 끝 작은 섬에 사는 우리의 손짓과 몸짓이 작은 파장을 일으켜 동료들에게 닿는다면, 그리고 그 파장이 다시 이어진다면 — 손병걸 시인의 말처럼, 예술은 세상의 무릎을 치게 하는 변화의 원천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손병걸 시인의 시에서 떠오른 제주 상상
이광준 문화도시 플레이 플랫폼 대표·전 서귀포시 문화도시센터장
대도시적 일상으로 자극적인 빛, 소음, 냄새, 맛, 거리감에 익숙해지다 보면 감각은 서서히 무뎌진다. 도시 탈출해서 제주도에서 만나는 오름과 바다와 곶자왈은 언제나 신선하고 경이롭다. 제주에 머무는 시간이 점점 늘어날수록 도시 공간에서 둔탁해진 신체 감각들이 조금씩 열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범섬 앞바다 윤슬이 일으키는 빛의 파편, 동박새 소리와 망장포에서 멍하니 듣는 파도 소리, 온 마을을 덮은 오월 감귤꽃의 진한 향기, 제주의 봄을 말린 고사리의 은은한 쌉쌀함, 해조류가 팔에 감기는 촉감이 느껴진다. 제주의 자연과 경관은 내 신체 감각을 깨우고 회복하게 한다.
도시에서 온 여행자들에게 신선하고 영감을 주는 마을 풍경이지만 오랫동안 살아온 주민들에게는 무감각하고 때론 무료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도시에서는 막연히 가졌던 공동체에 대한 이데아도 실제 마을에서 살다 보면 현실은 너무도 다름을 알게 된다. 전통 유지와 변화 수용이 잘 이루어지는 마을은 소수이고 대부분 형식화된 전통 의례와 동원형 행사가 마을에서 반복된다. 매년 반복되는 일상에 대해 청년들은 점점 피로해하고 지루해한다. 지역에서 마을회와 노인회, 청년회, 부녀회의 자생 조직은 나이, 성별 중심으로 작동하기에 귀촌자, 이주자, 여성, 미혼 청년은 기존 공동체 진입에 실패한다. ‘같음’의 소속만 인정하고 낯선 이들을 오랫동안 낯설게 남겨 두는 마을의 경우 동질성을 위해 배타성이 더 강화된다. 그럴수록 마을 주민들이 ‘나’와 ‘우리’의 편익을 넘어서 세대, 이주, 계층, 젠더의 삶을 상상해보는 능력은 약해진다. 그리고 공동체에 속하지 못한 주민들의 고립은 개인의 몫으로, 외로움으로 남는다. 다양한 삶의 방식에 대한 상상력이 사라진 지역은 대도시적 삶의 대안이 되기가 어렵다.
배제가 일상화된 곳에서 소외감과 외로움은 ‘도시 못지않게’ 심각하다. 소외된 이들에게 마을 민주주의란 관객석에서 보는 관전 스포츠일 뿐이다. 기존 관행과 관습이 유지 반복돼서 숨 쉴 곳 없는 원도심 동네와 읍면 농어촌 마을은 청년 유출이 지속된다. 신규 주민 유입과 정착도 실패한다. 결국 대도시와 산업도시로 인구는 더 쏠리고 지역 소멸, 청년 유출, 공동체 활력 상실은 증폭되게 된다.
지역에서 살면서 정치나 정책보다 인문적 예술적 활동이 변화를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지금과 다르게도 될 수 있다는 상상력을 갖게 하는 예술과 예술교육은 여러 마을의 변화를 만들어냈다. 인문적 읽기와 생활 예술 활동이 주는 각성의 순간이 마음을 풍요롭게 하고, 그곳에서 살고자 하는 의지를 불어넣고, 다른 모임과 활동을 만들어낸다.
마을 창고와 유휴 공간이 예술 작업장이고 연습실로 만들고 주민들이 일상에서 예술 활동을 하는 게 중요하다. 통해 보면 새로운 삶의 방식들이 나올 수 있다. 일상을 채우는 예술 활동을 통해서 고독감에서 벗어나 교류와 활동을 만든다. 어르신과 청년들이 자연에 대한 감각을 회복하고 신체 감각을 열게 된다. 색다른 방식으로 자연을 만나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품어져 나온 상상력으로 새로운 삶의 방식에 대한 제안과 기획이 일어난다. 그러다 보면 지역의 동네와 마을은 가장 안전한 치매 마을이자 마을 어르신-청년 공동 주거의 장소가 될 수 있다. 삶의 방식에 대한 다양한 상상력이 분출해 제주의 전통 ‘마을 목장’이 동물복지와 사회적농업 커먼즈(시민자산)가 되고 제주의 전통 ‘어촌계와 해녀 문화’가 기후 경제를 만드는 미래를 상상해 본다.
예술적 카타르시스와 사회적 상상력
함돈균 문학평론가·인문학자
인류 역사상, 적어도 서양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문학비평서이자 예술론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텍스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에 관하여(시학. Peri poietikes. Περὶ ποιητικῆς)』이다. 정보와 지식은 발전하지만, 직관과 지혜가 반드시 발전한다고만 할 수 없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여기에서 해석한 시, 특히 드라마(비극)에 대한 해석론은 지금도 차용되고 상기할 만한 문학적·예술적 사유의 보고라 할 만하다.
이 문학론·예술론이 최초로 제기한 이론 중에 ‘카타르시스(katharsis)’라는 게 있다. 내가 어릴 적 초등학교 때 [동아전과] 참고서에서 처음 본 이 이론을 문학비평가로서 인문고전을 강의하는 관점에서 보면, 참으로 단순하기 이를 데 없이 파편적 정보로 설명되었던 듯하다. 예술작품을 통해, 특히 서사가 있는 문학작품(드라마)을 읽거나 볼 때 독자나 관객이 느끼는 ‘배설적 쾌감’, 어떤 설명하기 어려운 감각 정도로 설명한 ‘카타르시스’는, 그러나 인간과 세상을 이해하게 하는 데에 문학이 얼마나 엄청난 효능감을 가졌는지를 보여주는 ‘지적’ 장치이자 예술의 내적 프로세스다.
결론적으로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카타르시스가 발생시키는 ‘감각’의 핵심이 삶에 대한 ‘지적 이해’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다. 『시에 관하여』가 주로 다루고 있는 희랍(그리스) 고전 비극은 인간-사회에서 발생하는 ‘죄’의 문제를 탐구하고 있다. 기원전 5세기에 발명된 희랍 고전비극의 시대는 전통적이고 신화적이며 자연발생적인 사회가 ‘폴리스(polis)’라는 정치적(사회적) 공동체로 발전하며, ‘국가’라는 문명화된 사회체가 정교하게 디자인되던 시대였다. 이 시기에 희랍의 선두 주자였던 아테네에는 국가공동체에 필요한 법과 법률적 권한을 지니는 최초의 민회, 법원 등이 만들어졌다. 이에 따라 법의 기준이 되는 정의, 선악, 도덕 등의 문제는 법에 앞서 철학적으로 탐구될 필요가 있었으며, 이 철학적 탐색은 인간의 구체적 삶의 상황을 놓고 이해되고 해석되며 판단될 필요가 있었다. 희랍 고전비극은 이런 시대에 윤리적 질문과 새로운 정의의 기준 등을 제시하는 시민교육의 텍스트였다. 그래서 그 공연은 도시국가 최대의 시민축제에서 밀도 있고 열광적이지만 진지하게 상연되었다. ‘코레고이(khoregoi)’라 불리는 드라마의 후원자가 대부분 유력한 사회적·정치적 지도자였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희랍 고전비극이 탐구하는 ‘죄’ 역시 그래서 아주 깊은 차원에서 ‘사회적’ 함의를 띠고 있다. 희랍 고전비극은 인간의 죄를 ‘하마르티아(hamartia)’라는 관점에서 탐구한다. 하마르티아란 희랍어로 ‘죄’란 뜻인데, 본래 의미는 ‘잘못 날아간 화살’을 뜻한다. 의도하지 않은 화살이 과녁을 빗겨나 타인을 맞혀 죽였다면, 우리는 그에게 ‘죄’를 물을 수 있을 것인가? 현대의 법정이라면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정도로 치부될 수 있겠지만, 희랍 고전비극의 작가들은 여기에 ‘깊은 죄’가 있다고 보았다. 세상에서 발생하는 많은 ‘우연해 보이는’ 비극에는 아주 섬세하게 따져보면 필연적 이유가 숨어 있다는 것이다. 비극 작가들은 그 죄의 핵심에 ‘휘브리스(hybris)’ 즉, 오만이 숨어있다고 보았다. 이들이 생각한 오만이란 유한한 인간이 마치 무한한 신처럼 되려는 욕망,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무지를 뜻한다. 소크라테스가 평생 간직했던 좌우명인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이 바로 ‘휘브리스’와 관련된 말이다.
희랍 고전비극에서 발생하는 사건은 대체로 가족사적인 비극이 많지만, 사건이 놓여 있는 맥락은 전쟁, 내전(내란), 정치적 암투나 분란 등 사회적 맥락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령 희랍 고전비극 작가들의 중요한 소재 중 하나인 트로이 전쟁을 다룬 아이스퀼로스의 <오레스테이아 3부작>이나 에우리피데스의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 같은 작품에서 전쟁터에 출정하는 아버지 아가멤논은 딸을 죽이고, 전쟁에서는 승리했으나 승전보를 올리며 돌아온 날, 복수심을 품고 있던 부인에게 죽임을 당한다. 당시 사람들이기 보기에 전쟁을 위해 딸을 희생제의의 제물로 삼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었지만, 신의 눈으로 보기에(작가의 관점에서) 이것은 인간이 신의 권한을 넘보는 선 넘는 행위였다.
그런데 비극 작가들은 이것을 개인의 일탈을 넘어 좀 더 보편적인 인간 조건에 대한 이해로 확장한다. 이는 아가멤논 개인의 오만한 일탈 행위처럼 보이지만, 더 깊이 통찰해 보면, 대의(다수, 국가)를 위해 소수(개인)가 희생하는 일은 있을 수 있다는, 역사 이래 거의 모든 사회인이 지닌 ‘상식’이라는 이름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이 된다. 다시 말해 ‘아가멤논의 죄는 나의 죄’이기도 하며 ‘사회’의 죄이기도 한 것이다. 카타르시스란 바로 이 순간의 지적 전율을 뜻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카타르시스에서 발생한다고 해석했던 두 가지 내적 감각(감정)인 ‘공포(phobos)’와 ‘연민(eleos)’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지적 전율이다.
‘아, 아가멤논의 집안에 무서운 일이 일어났구나. 아, 내가 바로 아가멤논이구나!’
‘아, 아가멤논의 집안에 무서운 일이 일어났구나. 아, 내가 바로 아가멤논이구나!’
진정한 사회적 상상력이란 어떤 새로운 공상이나 타인을 동정하는 일이 아니라, 세상의 죄에 나 자신 역시 가담하고 있다는 ‘하마르티아’에 대한 각성에서 발생한다. 왜 2024년 12월에 계엄이 발생했는가. 괴물이 된 대통령만이 죄인인가. 문학은 그의 망상에 절제하지 못하는 폭력적 힘을 부추기고 추종하는 세상의 죄가 함께 있다고 말한다. 독재자의 출현은 독재자를 나타나게 하는 사회적 에너지를 전제한다.

손병걸
2005년 부산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시집 『푸른 신호등』(문학마루), 『나는 열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애지), 『통증을 켜다』(삶이 보이는 창), 『나는 한 점의 궁극을 딛고 산다』(걷는사람)가 있고, 산문집 『열 개의 눈동자를 가진 어둠의 감시자 손병걸』(솟대문학), 『내 커피의 농도는 30도』(작가마을) 등을 발간했다. 기업체, 교도소, 노숙인 쉼터, 초중고대학교에서 여러 강연과 음악 공연을 했고, 사단법인 인천민예총 이사와 인천작가회의 회장을 거쳐 현재 인터넷언론 [뉴스 아이즈](news eyes) 편집인으로 활동 중이다.
thsqudrjf@hanmail.net
thsqudrjf@hanmail.net

박지선
한때 축제를 기획했고, 공연예술 작품의 해외 교류, 국제 공동제작 등 국제교류를 활발하게 하기도 했다. 아시아의 동료들과 아시아 프로듀서 플랫폼(APP)을 만들어 동시대 예술과 프로듀서의 역할, 아시아 지역 간의 교류와 협업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예술가, 기획자 동료들과 질문을 만들고, 리서치를 하면서 예술의 영역을 확장하고, 다양한 실험을 하는 과정 중심의 작업을 좋아한다. 최근에는 기후변화, 포스트 휴머니즘, 기술 사회 등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동시대 예술이 어떻게 위치할 수 있는지에 대해 질문하며 열정과 무력감 사이를 오고가며 ‘희망’이라는 단어의 끝을 잡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고 있는 중이다.
jisunarts@yahoo.com
jisunarts@yahoo.com

이광준
생태, 지속가능성, 문화자치와 연관해서 공간, 시장, 장소의 문화적 재생과 관련해서 10년째 활동 중이다. 문화예술교육과 연관해서 사회적기업과 함께하는 문화예술교육 ‘별별솔루션’, 시민문화공간 문화예술교육, 시민문화예술교육 ‘시시콜콜’의 컨설턴트로 활동을 했고, 제주에서 생태문화예술교육 계획을 수립했다. 2019년부터 5년간 서귀포문화도시센터장을 역임했다.
tree.curator.lee@gmail.com
tree.curator.lee@gmail.com

함돈균
문학평론가, 인문학자, 미래학교 디자이너이다. 많은 대학에서 문학과 철학, 예술론 등을 강의해 왔으며, 여러 공공기관, 예술공간에서 새로운 인문·예술 교육프로그램을 디자인하고 자문해 왔다,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 인문연구소장,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 교수, 시민행성 대표, 현대자동차 헤리티지북 프로젝트 초대 편집장을 지냈다. 현재 제주 독립책방 시타북빠와 유튜브 채널 ‘함돈균의 뉴스쿨’을 운영 중이다. 『사물의 철학』 『순간의 철학』 등 10여 권의 책을 냈다.
husaing@naver.com
husaing@naver.com
- [관련기사]
- · ① 편협하고 뾰족한 삶을 향하는 정류장에서(이슈, 2025.9.16.)
- · ② 삶과 죽음, 관계를 되새기는 균열의 시간(이슈, 2025.9.22.)
기사가 좋았다면 눌러주세요!
3 Comments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코너별 기사보기
비밀번호 확인














예술이 감각을 넘어 사회적 상상력으로 확장된다는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파고드는 감각은 파장과 전율을 만들고
사회적 상상력은 어디에서 오는가③
공감이 갑니다
파고드는 감각은 파장과 전율을 만들고
사회적 상상력은 어디에서 오는가③
기대만점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