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여름, 주변 반경 2km 이내 편의점 하나 없을 정도로 한적한 동네에 있는 주택으로 이사를 했다. 서울을 떠나 이렇게까지 멀리 올 수 있었던 건 팬데믹 이후 일하는 방식이 유연해진 사회 전반의 분위기 덕분이었다. 도시에 비해 자연과 가까운 삶을 살게 될 거라고 막연하게 짐작한 정도였을 뿐, 이 집을 둘러싼 세계가 얼마나 다채로운 사건과 이야기를 만들어낼지 예상하지 못했다.
살피고 살피는 – 마당
집의 일부이자 외부 공간이기도 한 마당은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 노동하는 공간이다. 마당의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매일 구석구석을 열심히 살피고 돌봐줘야 하기 때문이다. 마당 한쪽에 위치한 2개의 벽돌 화단도 직접 만든 것인데, 회반죽을 섞는 일이나 실을 띄워 수평을 맞추고 벽돌을 쌓아보는 경험도 모두 처음이었다. 그렇게 완성된 화단은 텃밭으로서 마당에서 가장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는 공간이다. 이전 해를 본보기로 삼아 올해 심을 농작물의 종류와 위치에 대한 계획을 수정하고, 흙을 고르고, 씨앗과 모종을 심는다. 그 이후에는 크게 애쓰지 않아도 잘 자라주지만, 성장 속도가 매우 빠르므로 수확하고 먹는 일에 더욱 부지런해져야 한다.
마당은 변화하는 계절감을 가장 잘 관찰할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1년 중 내가 가장 설레며 기다리는 시기는 마당 맞은편에 있는 산이 격동하기 시작하는 겨울이 끝나갈 무렵이다. 이때가 되면 산 정상에서부터 눈부신 연둣빛이 서서히 퍼지면서 새로운 계절을 알리기 시작한다. ‘생명력’이라는 단어에 색이 있다면 바로 이런 색감일 거라고 생각하게 될 정도의 화려한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이전에는 기온이 온화해질 때 봄이 온다는 표현을 사용했다면, 이 경험을 계기로 ‘봄이 온다’는 것을 힘과 활력, 생동하는 형상을 표현하는 동적 상태로 정의하게 되었다. 봄의 시작을 가장 먼저 알린다는 화살나무의 새순을 나물로 무쳐 먹는 일도 이곳에서 처음 배운 봄을 맞이하는 방식 중 하나이다. 텃밭이 바쁜 시기가 지나고 겨울철이 되어도 마당에서의 활동은 계속된다. 칡넝쿨, 마른 잎, 솔방울 등 집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천연재료로 크리스마스 리스를 만들어보기도 하고, 눈이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빗자루와 넉가래를 챙겨나가 마당 안팎을 열심히 쓸어줘야 한다.

  • 종지나물

  • 애기똥풀

  • 각시붓꽃
관계 맺는 새로운 – 이름
도시에서 살 때와는 달리 내가 경험하는 집의 세계에서는 다양한 생명체와의 우연한 만남이 잦은 편이다. 그중에서도 바람을 타고 날아온 씨앗이 마당에서 피워낸 식물들을 발견하는 경험은 텃밭 채소를 잘 키워내는 일과는 다른 즐거움을 준다. 꽃을 피우기 위해 그 여정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지, 얼마큼의 거리를 날아왔을지 씨앗 하나만으로도 이전에는 생각지도 못한 질문을 떠올리게 된다. 마당에서 발견한 식물들의 이름 ‘꽃마리’ ‘현호색’ ‘애기똥풀’ ‘각시붓꽃’ ‘종지나물’을 각각 소리 내어 호명해 보며 기억하는 일은 존재에 관한 관심과 존중을 표현하는 가장 명확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땅의 공간은 물론 하늘도 마찬가지다. 이 지역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새의 종류로는 ‘딱새’ ‘박새’ ‘뻐꾸기’ ‘소쩍새’ ‘직박구리’ ‘딱따구리’ ‘물까치’가 있는데, 이제 생김새나 울음소리를 구별할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해졌다. 도시에 비해 다양한 종류의 새를 만나볼 수 있는 환경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눈으로 보는 것보다 듣는 감각을 통한 정보 수용의 비중이 높아졌다. 특정한 새의 등장이나 소리는 곧 계절이 바뀌는 신호가 된다는 점 또한 이곳에 와서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가령 ‘독수리’ ‘쇠기러기’가 보이기 시작한다면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됐음을 의미한다. 이소 중 다리를 다쳐 이탈된 새끼 딱새를 한밤중에 마당에서 발견해 돌봐주었던 일도 특별한 경험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그렇게 이름을 부를 수 있는 대상이 많아지고 다양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갈수록 나를 둘러싼 집의 세계는 조금씩 더 견고해진다.
옆집에서 온 과일과 채소
다정하고 소중한 – 이웃
옆집에 사는 나의 다정한 이웃은 각종 채소와 과일, 반찬은 물론 매년 잊지 않고 직접 담은 김장 김치를 선물해 주신다. 나이 차가 꽤 나지만 언니라고 부르는 이웃과 울타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오늘의 날씨에 대해, 새로 심은 나무에 대해, 몇 달 전부터 함께 돌봐주기 시작한 고양이들에 대해 소소한 대화를 함께 나누는 시간이 참 소중하다.
집 맞은편 산에 사는 고라니 가족은 우리가 가장 오래 봐온 이웃 중 하나로, 요즘처럼 산이 민낯을 드러내는 겨울철에 더 빈번하게 마주친다. 눈에 잘 띄지 않는 이웃인 꿩은 주로 울음소리로 인지하는 편이고, 몇 달 전부터 나타나기 시작해 비교적 최근에 이웃이 된 남매 고양이를 위해 물과 간식을 틈틈이 챙겨주고 있다. 작년에는 마당에 너무 많은 개체수의 달팽이가 번식해 무서울 정도였는데 올해는 청개구리, 참개구리가 많이 머물면서 여름밤을 가득 채워주었다. 매해 비슷한 풍경일 것 같지만 이렇게 늘 변주되는 부분이 있다 보니 지루할 틈이 없다. 이사 온 지 2년이 넘었는데도 인간 이외의 이웃을 이렇게나 가까이 다양하게 대면할 수 있는 환경이 여전히 신기하기만 하다.
오감을 통한 경험은 원초적이고 강렬하다. 그 때문에 나의 일상은 자연스럽게 도시에서의 삶과는 다른 속도와 루틴, 몸의 움직임을 갖게 되었다. ‘처음’이거나 ‘새로운’ 경험을 수없이 건네준 집의 세계 덕분에 나눌 수 있는 이야깃거리도 풍부해졌다. 게다가 최근 몇 년간 내가 몰두하여 시도해 온 감각 간의 번역에 대한 주제와도 긴밀하게 맞닿아 있을 만큼 이곳 파주에서의 생활은 내 삶의 상당한 부분을 변화시킨 중대한 사건이 되었다.
다양한 촉감을 가진 대상들 (왼쪽부터) 백일홍 씨앗, 청개구리, 해바라기씨
조예진
조예진
그래픽 디자이너, 기획자, 교육자, 연구자로 활동한다. 2009년부터 지도를 매개로 지역과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담는 프로젝트 그룹 ‘아마추어 서울(Amateur Seoul)’ 활동을 지속해오고 있으며 최근 주요 활동으로는 배리어프리에 대한 고민이 담긴 전시 《촉감 수집가의 작은 상점》(2023), 《만지는 선, 들리는 모양》(2022)이 있다.
hello.yejincho@gmail.com
인스타그램 @bonbonjour
사진제공_조예진 그래픽 디자이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