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사업이 농사와 닮았다는 우스갯소리를 하고는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봄에 나는 공고를 시작으로 여름, 가을 동안 열심히 사업을 진행하고 겨울에야 마무리한다. 사업을 마친 겨울에서 이듬해 사업이 시작되는 봄까지의 기간은 농한기와 비슷하다. 이 사이의 시간은 문화예술단체에는 혹독한 보릿고개이지만 또 다음 한해를 지낼 힘을 비축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 사이의 시간에 더욱 바빠지는 공간이 있다. 인천광역시 동구에 있는 ‘복합문화공간 창영당’(이하 창영당)이다. 창영당의 조은숙 대표는 자신을 ‘이야기꾼’으로 부른다. 학창 시절 방송반을 시작으로 기업 방송 아나운서, 동화구연 선생님을 거쳐 지금은 연극 무대에도 서고 있는 베테랑이다.
모두를 위한 이야기 가게
‘창영당’은 예전에 ‘아이스케키’를 만들던 공장의 이름이었다. 설탕, 팥소 등을 재료로 얼린 아이스케키를 창영당에서 떼어 거리나 학교 앞에서 파는 사람들이 많았다. 보랭 기능이 요즘 같지 않아 몇 시간 팔 것만 떼서 팔고 다시금 돌아와 물건을 새로 받아 가야 했던 그 시절 창영당은 많은 사람이 오가던 동네의 명소였다. 공장이라고는 하지만 공방에 가까웠고 그 당시 창영당에 팥을 대줬던 사람들이 여전히 이 동네에 살고 있을 만큼 동네와 밀접한 곳이었다. 8년 전 시 낭송 모임을 계기로 인천의 이야기가 곳곳에 남아 있는 동구, 인심 좋은 배다리 지역에 매료된 조은숙 대표가 이곳에 공간을 만들 때 한 시인이 추천해 준 이름이 창영당이다. 오래되었지만 아직도 누군가에겐 기억 한편에 자리한 예쁜 골동품 같은 이름이었다.
사람들을 찾아가서 아이스케키를 판매했던 것처럼 창영당은 앉아서 사람들을 기다리지만은 않는다. 아이스케키 대신 이야기에 필요한 소품과 재료를 수레에 가득 담아 동네를 돌아다니며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야기 하나 들려드릴까요?”라고 묻는다. 처음에는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는 조은숙 대표를 낯설어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 이야기의 재미에 빠져든 사람들은 과일이나 텃밭에서 기른 채소 등을 나눠주곤 한다. 이야기하고 이야기 삯을 받으니 이야기꾼이요, 그 이야기꾼의 가게니, ‘이야기 가게’라는 이름이 잘 어울린다.
이야기가 쌓이고 익어가는 시간
창영당 공간 안으로 들어가면 ‘별천지’라는 말이 실감 난다. 각종 인형극 무대와 인형, 미술 재료, 그림 등 다양한 이야기 재료가 널려 있다. 창영당은 조은숙 대표의 사무실이자 이야기 재료를 만드는 공방이며 노둣돌 인형극단 단원들의 스터디공간이자 동네 주민에게는 사랑방인 동시에 마을학교와 같은 공간이다. 물건들도 범상치 않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웬만한 어린아이 키만 한 무 인형이었다. 커다란 무를 뽑는 이야기를 할 때 단순히 ‘무를 뽑는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뽑아낼 커다란 무를 보여준다. 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커다란 무를 뽑히지 않게 잡는 역할을 하는 친구와 그 무를 뽑아야 하는 친구들이 실제로 이야기에 참여하여 연극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연극 놀이를 통해 참여한 친구들은 이야기를 더욱 깊이 있게 이해하게 된다.
인근 창영초등학교, 인천서흥초등학교, 창영종합사회복지관과 특히 많은 프로그램을 하는 창영당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을 넘어서 어린이, 어르신과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나눈다. “요즘 어떤 걱정이 있어요?”라는 질문에 말하지 않던 사람들도 ‘걱정인형’을 만들면 인형을 상대로 이야기를 적어가기 시작한다. 이야기를 들려줄 때 보다 훨씬 더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그래서 창영당은 항상 다양한 재료로 넘쳐난다. 마술사의 공간처럼 어떤 이야기를 할지에 따라 필요한 소품이 등장하곤 한다.
조은숙 대표가 창영당을 꾸릴 때 가장 먼저 했던 일은 공간과 대화를 나누는 일이라고 한다. 조용히 빈 곳을 바라보며 생각나는 것들과 필요하다 느끼는 것을 하나하나 만들어 간 것이 지금의 창영당이다. 조은숙 대표 자신은 즉흥적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즉흥의 배경에는 일상이 있다. 수업이나 사업이 아니더라도 ‘이야기 수레’를 끌고 동네를 누비며 본인이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뿐 아니라 동네 이야기도 같이 수집한다. 그러면서 이야기를 어떻게 체험하게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는다. 연극 무대에 배우로도 서면서 표현에 대해 고민한다. 좋은 재료나 오브제가 보이면 바로 교구나 소품을 만들어 창영당 곳곳에 쌓아둔다. 이런 일상적인 활동이 쌓인 공간이 창영당이며, 누가 언제 와도 이야기에 관련된 즐거운 소품들이 바로 나올 수 있는 원동력이다. 이렇게 이야기가 익어가는 시간이 바로 우리가 비수기라고 부르는 사업이나 수업이 없는 시간이다. 공간과 동네를 돌아보며 필요한 것을 하나씩 상상하고 만들며 지금도 창영당은 더욱 알찬 것들을 준비하고 있다.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시간
창영당에는 이야기꾼들이 모인다. 바로 조은숙 대표와 함께하는 동화구연, 체험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야기를 다루는 선생님들이다. 선생님들은 일상적으로도 자주 모여 교구나 수업방식을 의논하기도 하고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한다. 수업이 없는 지금은 손이 많이 가는 교구를 만들거나 함께하는 연구, 새로운 프로젝트를 하기에 딱 좋은 시간이다. 최근에는 겨울방학을 맞이한 아이들과 이야기에 나오는 요리를 직접 해 먹거나 이야기에서 착안한 놀이를 진행해 보는 ‘이야기 캠프’를 준비 중이다.
이야기 캠프는 어떤 지원사업이 아닌 창영당 고유의 프로젝트다. 창영당은 본래 문화예술교육 지원사업에 참여하지 않고 학교나 복지관에서 의뢰한 프로그램을 맡아서 진행하거나 자율적으로 수업과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해 왔다. 그런데 최근에 문화예술 관련 지원사업을 수행하고 나서 다양한 고민이 생겼다. 창영당에 모이는 선생님들이 더욱더 다양한 활동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지원사업 참여를 검토할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지원사업을 통해 역량 강화, 컨설팅, 교구 교재 제작 등을 수행할 수 있다면 앞으로도 더 다양한 활동과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필요한 준비를 하고 있다.
문화예술 지원사업에서 많이 논의되는 것 중 하나는 지원사업이 문화예술 활동을 획일화하거나 단체의 자율성과 자립성을 해친다는 것이다. 일면 타당한 것은 단체의 활동이 비용으로 환산되기 시작하고 목표와 산출을 맞춰야 하는 지원사업의 특성상 단체들이 사업에 매몰될 수밖에 없는 것 또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창영당 같이 일상의 힘과 자신을 위한 시간을 중심에 둔 공간이 지원사업을 만난다면 그간의 활동이 더욱 확장되고 새로운 가능성을 열 수도 있을 것이다.
일상의 힘을 채우는 시간
예술활동을 농사에 비유해 지금 시기를 ‘농한기’라고 하지만 농사를 짓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조금 서운한 말일 수 있다. 한참 손이 가는 농번기만큼은 아니지만 농한기에도 할 일이 많다. 땅에 지력을 보충할 퇴비도 주어야 하고 농기계와 울타리 등 바빠서 손보지 못했던 것들을 손보는 시간이다. 농번기에는 내가 아닌 작물의 시간을 중심으로 살아간다면 농한기라 불리는 지금은 작물이 아니라 나를 위해 그리고 다음 농사를 위해 나의 시간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야기 캠프나 이야기 수레는 아이들과 동네 사람들을 위한 활동이기도 하지만 창영당을 위한 시간이기도 하다. 수업이라는 고정된 시간에 구애 없이, 사업의 목표와 상관없이 해보고 싶었던 활동을 만들어가며 참여한 사람들과 소통하고 호흡하는 시간은 수업이나 사업으로 사람들을 만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성찰과 울림을 준다. 이런 성찰과 울림은 결국 그다음의 수업과 사업을 더욱 탄탄하게 만드는 거름이 된다. 이제 자체 활동과 수업을 넘어 사업을 만나는 창영당이 하나의 좋은 사례로 지속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는다. 이야기 수레의 소리가 동네를 채우고 공간에서는 다양한 이야기가 사람들을 기다리는 풍경을 계속 만들어 가기를 바란다.
라정민(라군)
라정민(라군)
‘모씨네사회적협동조합’에서 놀 듯이 일하며 일하듯이 놀고 있다. 재미있는 일은 마다하지 않는 문화예술기획자.
ragun88@daum.net
www.mocine.net
사진제공_조은숙 창영당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