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에 씨앗을 심어본 일이 있는가.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나는, 지난봄 난생처음 농사에 도전했다. 땅을 고르고 이랑과 고랑을 만든 뒤 일정한 간격을 두고 구덩이를 팠다. 씨앗을 심고 나니 봄볕에 땅이 마르면 움트는 게 더디겠다 싶었다. 흙을 흠뻑 적셔줄 요량으로 물 한 동이를 길어왔다. 그 모습을 보던 선배 농군이 파안대소하며 말했다. “씨앗을 땅에 직접 심을 때는 물 주는 거 아니야.” 씨앗을 심고 물을 주지 말라니. 무슨 말인가 싶어 어리둥절한 내게, 그가 땅의 비밀을 알려주었다. 움이 튼 씨앗은 땅이 머금은 물을 빨아 먹기 위해 뿌리를 뻗는데, 이때 땅을 물에 흠뻑 적시면 뿌리를 많이 뻗지 않는다. 마른 땅일수록 물을 찾아 더욱 깊고 튼튼하게 뿌리내린다. 얕게 뿌리내린 작물은 가뭄에 취약하지만 깊게 뿌리내린 작물은 땅이 가물어도 튼튼하게 버틴다. 물보다는 건강한 거름을 주어 땅의 힘을 살리는 게 더욱 중요하다고 했다.
문화예술교육 지원사업이 머리를 스쳤다. 경력이 10년 넘는 베테랑 단체들도 지원금이 없으면 살아남기 힘든 구조가 된 이유가 바로 여기 있었다. 행정은 물을 주는 데만 집중해 왔고, 현장은 흠뻑 적신 땅에서 얕고 연약하게 뿌리내렸다. 예산이 점점 줄어들며 땅이 가물어 가는 지금, 뿌리를 멀리 뻗는 법을 익히고 땅을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데 집중해야 한다. <노는예술>은 문화예술교육 현장이 더욱 깊고 튼튼하게 뿌리내리는 방법을 고민하는 사업이다.
노는 예산을 발견하다
‘노는 예산’과 ‘노는 기획’을 연결한다. <노는예술>이 내건 슬로건이다. 기획해 놓은 문화예술교육 콘텐츠가 있지만 실행할 예산이 없는 단체와 문화예술교육 예산을 가지고 있지만 기획이 어려운 기관이나 기업을 연결하는 사업이다. 사업 소개를 들은 문화예술교육 관계자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예산이 부족하다는 사람들뿐인데, 노는 예산이 정말 있어?”
처음 ‘노는 예산’의 존재를 알게 된 건 교육실습생 시절이었다. 국어과 교생이었던 나는 일찍이 임용고시 준비를 접고 문화예술교육 현장을 얼쩡거리고 있었다. 그런 내게 연극동아리 담당 선생님이 도움을 청해왔다. 동아리 예산으로 500만 원이 내려왔는데 아이들이 필요하다는 연극 소품만 사줄 뿐, 100만 원 쓰는 것도 벅차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떠오른 적임자가 있었으니, 수년간 예술교육 활동을 하며 사례발표까지 다니는 베테랑이지만 별안간 공모에 떨어져 백수가 된 선배였다. 담당 선생님에게 선배를 소개했고, 연극동아리 학생들도, 선생님도, 예술강사 선배도 모두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해 여름방학을 보냈다.
그 후 몇 년간 이리저리 구르다 우주의 기운에 이끌려 문화재단에 들어왔다. 사무실에 앉아 전화를 받으며 ‘노는 예산’이 꽤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해가 있을까 봐 덧붙이자면, 여기서 말하는 노는 예산은 쓸 수 없을 만큼 넘쳐흐르게 많아서 남는 예산이 아니다. 문화예술교육이 무엇인지, 기획은 어떻게 하는 건지, 어떤 예술강사와 협업해야 하는지 알지 못해서 쓰일 방도를 찾지 못한 예산이다. 전화는 보통 예산이 세워지는 연초에 많이 온다. 주로 연락이 오는 곳은 학교나 도서관, 복지관 같은 곳이다. 군부대에서 전화가 쏟아진 적도 있다. 군 장병 문화예술교육 예산이 내려왔는데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똑같은 대사의 전화가 수십 통 걸려 왔다. 하지만 그때마다 우리의 대답은 하릴없이 미적지근했다. “특정 단체나 강사를 소개해 드리는 건 형평성에 맞지 않아서요. 홈페이지에 지역별로 활동하는 단체의 정보를 모아놓은 <예술교육지도>가 있어요. 그걸 한 번 보시고 연락하고 싶은 단체가 있으시면 연결해 드릴게요.” 이런 답을 들은 뒤에 다시 전화하는 사람은 없었다. <예술교육지도>에는 각 단체가 어떤 교육활동을 어떻게 하는지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없었다. 특히나 문화예술교육을 잘 모르는 이들에게는 더욱 눈에 들어오지 않는 정보였다.
노는 기획과 연결하다
지난해 경기센터 일반공모의 경쟁률은 10:1이었다. 구체적인 프로그램 운영 계획안까지 써놓고도 예산이 없어 실행하지 못하는 단체가 90%라는 말이다. 현장에서 공모사업 기획서를 쓰던 시절에는 그저 이 바닥 생리가 그렇겠거니 생각하고 체념했는데, 사무실에서 노는 예산을 가진 이들의 전화를 받고부터는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이 떠나질 않았다. 어떻게든 양쪽을 연결하고 싶었다. 그래서 ‘노는 기획’을 모집했다. “공모사업으로 10여 년 역량을 길러온 여러분, 이제 공모를 졸업합시다. 물 조리개로 부어주는 물을 기다리지 말고 같이 새로운 물길을 터봅시다.”
3년 이상의 문화예술교육 활동 경력을 가진 단체를 모았다. 이미 수년 동안 공모 지원을 통해 교육 활동을 기획하고, 실험해 보고, 단단해진 단체들이 새로이 물길을 터주어야 싹을 막 틔운 단체들도 설 자리가 생길 거라는 생각이었다. 노는 기획으로 선정된 10개 단체와 함께, 30초짜리 홍보영상을 찍고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노션(Notion) 페이지와 카드뉴스를 만들었다. 문화예술교육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도 그들의 활동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눈높이 홍보자료를 만든 셈이다. 영화나 연극 분야에서 활용하는 피칭(기획 단계의 프로젝트를 투자자들 앞에서 설명하는 일종의 투자설명회)의 방식도 빌려왔다. 도서관, 복지관, 주민자치센터, 청소년 수련관, 문화재단, 학교, 군부대 등, 공문을 보낼 수 있는 모든 곳에 공문을 보냈다. 우편으로 리플릿도 보냈다. 80여 명의 수요처 관계자가 ‘노는예술 피칭데이’를 찾아왔다.
단체들이 앞에 나와 그들의 활동을 짧게 소개했고, 수요처 담당자들이 각 단체의 테이블로 가서 상담하는 시간을 가졌다. “저희는 도서관인데 주로 어린이들이 많이 이용해요. 아이들과 함께 책을 활용해서 할 수 있는 연극 프로그램을 하고 싶어요. 예산 규모는…” 단체와 상담하기 위해 길게 줄지어 서는 풍경도 펼쳐졌다. 문화재단이 아직 설립되지 않은 한 시청의 문화예술과 주무관은 이날 세 3개 단체의 명함을 받아 갔다. 1년 뒤 그는 말했다.
이전까지는 문화예술교육을 민간 위탁으로 운영했는데, 예산과목이 변경되고 갑자기 직접 사업으로 운영하게 되었어요. 예술은 아예 모르는 문외한이라 난감해하던 찰나에 <노는예술 피칭데이> 공문을 받았어요. 한 해 농사지을 씨앗을 그곳에서 다 얻어왔어요. 직접 기획했다면 담당자가 할 일이 너무 많았을 텐데 전문가들을 한자리에서 소개받을 수 있어 참 좋았습니다. – ○○시청 문화예술과 주무관
노는 예술, 더하기
위의 기관처럼 부잣집 ‘노는 예산’도 있었지만, 없는 살림에 뭐라도 좀 더 새롭게 해보고 싶어 하는 열정적인 담당자들도 있었다. 그런 기관을 위해 <노는예술, 더하기> 공모를 함께 진행했다. 수요처가 가진 예산에 지원금을 1:1로 제공하는 공모사업이다. 만약 수요처가 5백만 원의 예산이 있다면 재단에서 제공하는 5백만 원을 더해 천만 원으로 사업을 운영할 수 있다. 총 5천만 원의 예산으로 13개 기관을 지원했다. 더하기 공모에 선정된 기관들이 가져온 예산을 모두 합하면 약 8천만 원. 5천만 원의 마중물로 8천만 원의 새로운 예산을 찾아낸 셈이다.
뜻밖의 효과도 있었다. 이전의 공모사업으로는 활발한 참여가 없었던 경기 동·북부 지역에서 큰 반응이 있었다. 더하기 공모로 함께한 13개 기관 중 7개 기관이 동·북부 지역이었다. 이천, 여주, 광주 등 경기 동부와 파주, 남양주 등 경기 북부는 농촌이 많고 지역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도 적다. 공모사업은 단체가 직접 교육 장소를 섭외해야 하기에, 단체가 가깝고 교통이 편리한 지역을 선택하기 쉽다. 농촌보다는 도시에 예술가가 많이 거주하고, 자연스럽게 농촌은 문화예술교육의 혜택에서 소외되고 있던 것이다. <노는예술, 더하기> 사업에 참여한 여주세종문화관광재단의 한혜원 차장과, 사업을 함께 운영한 카메라루시다 이미경 대표 역시 같은 어려움이 있었다.
예산도 있고, 재미난 프로그램도 해보고 싶은데 여주에서는 예술강사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여기저기 섭외 전화를 해봐도 너무 멀다며 거절당하기 일쑤였죠. – 한혜원 여주세종문화관광재단 차장
안양에 쭉 살면서 안양 밖의 지역으로 나가볼 생각을 못 했어요. 다른 지역에 어떤 기관이 있는지도 잘 모르고, 어떻게 닿을 수 있는지도 몰랐으니까요. 그런데 차로 1시간 안에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이렇게 좋은 기관과 주민이 있다는걸 <노는예술>을 통해 알게 되었고, 옆 지역 주민과도 함께 수업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 이미경 카메라루시다 대표
노는 예술, 생명력을 가지려면
<노는예술>은 올해로 3년 차를 맞는다. 가만히 누워있어도 사랑받던 갓난아기 시절은 이제 지났다. 이제는 걸음마를 떼고 직접 뚜벅뚜벅 걸어 나설 때다. 사업 초기, 포맷 자체만으로 큰 화제를 모았지만, 반짝하는 화제성은 금방 시들기 마련이라는 걸 안다. 지난 두 해 ‘피칭데이’라는 잔칫상을 차려놓고 가만히 앉아 손님을 기다렸다면, 이제는 떡을 싸 들고 동네방네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만나려 한다. ‘노는예술 코디네이터’와 ‘노는예술 매칭데이’를 운영할 계획이다.
‘노는예술 코디네이터’는 지역의 마당발을 섭외해, 여기저기 숨어있는 예산을 샅샅이 찾아낸다. 얼굴에 철판 깔고 여러 기관을 찾아가서, 여기 교육사업 하시냐, 어떻게 하시냐, 새로운 프로그램이나 새로운 강사 안 필요하시냐, 적극적으로 예산을 캐낸다. 그렇게 캐낸 예산의 주인들을 ‘노는예술 매칭데이’로 불러낸다. 10개의 단체가 짧은 5분의 피칭으로 자신을 알렸던 피칭데이와는 달리, 단체들이 기획한 교육프로그램을 30분 내외의 짧은 활동으로 재구성하여 운영한다. 수요처 담당자들은 교육 참여자가 되어 직접 프로그램을 경험해 본다. 호텔에서 1년에 한 번 창대하게 열었던 피칭데이와 다르게 매칭데이는 좀 더 자주,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조금 작게, 하지만 더 깊게 열어보려 한다. 그렇게 우리도 잘 뿌리내리고 나면, 바라건대 <노는예술>이 경기도를 넘어 멀리멀리 퍼지면 좋겠다. <노는예술 세종> <노는예술 부산>처럼 곳곳에서 다양한 형태의 <노는예술>이 등장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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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단 노는예술 피칭데이 현장스케치(2023)
[출처] 경기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유튜브 채널
마치며
여기까지 적으니 천년만년 <노는예술> 담당자로 남아야 할 것 같은데, 사실 나는 당분간 바쁘고 바쁜 이 바닥을 떠나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아픈 몸을 치료한 후 돌아올 예정이다. TMI일 수도 있는 이야기를 굳이 적는 이유는, 이 글을 읽는 여러분 중 상당수가 기획서 쓴다고 잠 안 자고, e나라도움이랑 씨름하느라 스트레스받고, 문화예술교육으로 세상을 구할 것처럼 매진하면서 정작 자신은 돌보지 않았던 나처럼 살고 있을 것 같아서다. 지속 가능한 문화예술교육 생태계의 선결 조건은 노는 예산의 확보도 아니고, 노는 기획의 발굴도 아니다. 바로 문화예술교육을 만드는 여러분들 몸과 마음의 건강이다. 제아무리 비옥한 토양일지라도 건강하지 않은 씨알을 뿌리내리게 할 수는 없을 터. 부디 건강한 씨알로 오래오래 깊고 단단하게 뿌리내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마친다.
- [관련링크]
- · 경기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노는예술
- 김진아
- 경기문화재단 예술교육팀에서 <노는예술>을 기획했다. 예술교육 현장에서 활동하다 먹고사니즘에 치여 기관으로 굴러들어왔다. 현장과 행정 사이 어딘가에서 여전히 헤매는 주변인. 북한강 끝자락의 작은 마을공동체 ‘없이있는마을’에서 함께 텃밭을 가꾸고 아이들을 돌보며 생명답게 사는 삶을 배워가고 있다. 현재 실학박물관 기획운영팀에서 근무하고 있다.
kjih6335@ggcf.or.kr - 사진제공_경기문화재단 예술교육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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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서 움튼 씨앗이 깊이 뿌리내리려면
이 지속 가능한 변화를 찾는 여정
공감이 갑니다
땅에서 움튼 씨앗이 깊이 뿌리내리려면
이 지속 가능한 변화를 찾는 여정
기대만점이네요
노는예산을 활용해서 다양한 곳들과의 연계를 할 수 있어서 좋은거 같아요~
예산이 있어도 쓰지를 못하는 곳과 일할 곳이 없는 예술인들을 연결해준다고 하니 취지도 너무 좋고, 많은 분들에게 다양한 예술을 펴칠수 있어서,
앞으로도 다양한 매칭을 통해서 많은 분들이 예술을 쉽고 재미있게 접했으면 좋겠습니다.
씨앗과 땅을 연결해주는 좋은 기획을 통해 경기도 그리고 전국 마을 곳곳에 지속가능한 문화예술교육이 일어나길 바랍니다! 잘 읽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