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와 도전의 시간
2022년 복지시설 이용자 문화예술교육 기획사업 <창작 실험 프로젝트>를 계기로 ‘창조적파쏭쏭’이라는 프로젝트 그룹을 만들었다. <창작 실험 프로젝트>는 아동·노인·장애인 대상 문화예술교육 기획사업으로 예술강사, 사회복지사 등 여러 선생님의 협업을 통해 새로운 문화예술교육을 연구하고 개발한다. 그때 마침 산본장애인주간보호시설에서 수업했던 우리는 새로운 도전과 실험이 필요했다. 이곳에 참여자들은 언어소통이 매우 힘들었다. 대화가 가능하긴 하지만 상대 말을 따라 하는 정도였고 질문에 좋고 나쁨도 간단하게 표현할 뿐이었다. 수업 중 답문이 오고 가고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는 게 쉽지 않았다. 연극 수업을 어떤 방식으로 이끌어 가야 할지 많은 고민이 생겼다. 대화가 잘되지 않는다면 다른 어떤 방식의 소통이 있을까? 소통이 없이 할 수 있는 수업이 있을까? 그것이 예술교육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많은 질문이 생겼다.
연구와 새로운 도전이 필요했지만 예술강사 혼자서 하기에 한계가 있었다. 나수아, 이지혜 예술강사와 <창작 실험 프로젝트>에 함께 지원했고 운 좋게도(?) 선정되었다. 사회문화예술교육 장애인 수업의 경우 매번 새로운 환경에 놓이게 된다. 특히 참여자들 장애 경도가 다르기 때문에 그런 부분을 고려해서 수업 프로그램을 정하고 수정해야 한다. 학교문화예술교육과는 아주 다른데, 특히 교육 속도가 그렇다. 참여자들을 기다리면서 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진행해야 한다. 또 기존의 수업 방식을 사용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아서 새롭게 바꾸고 수정해야 한다. <창작 실험 프로젝트>는 그런 맥락에서 수업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 예술강사의 연구를 지원을 해주는 사업이다.
그때 수업 시연을 한 곳은 영등포장애인복지관이었다. 여러 기관을 찾아가 수업 시연을 협의하며 사업의 취지를 설명했을 때 담당자 선생님들이 큰 관심을 보였으나 일정상 함께 할 수 없는 곳도 있었다. 장애 정도가 심하지 않은 분들은 스스로 다양한 활동을 하고 복지관에서도 많은 활동을 할 수 있다. 어떤 분은 너무 바빠서 연극 수업 중간에 양해를 구하고 빠지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장애가 심하면 참여할 수 있는 교육 선택의 폭이 매우 좁거나 거의 없다. 우리가 요구한 수업 대상자는 소통이 힘든 중증 장애인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생각보다 많은 기관에서 우리 수업 참여 의사를 내비쳤다. 그래서 더 아쉬운 부분이 사업의 지속성이었다.
프로젝트팀인 창조적파쏭쏭의 활동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11월에 수업 시연을 3회 하고 12월에 사업을 마무리해야 했다. 그러면서 소통이 어려운 대상을 위한 수업 연구와 시연은 멈추게 되었다. 우리의 연구 주제는 우선 각자의 몫이 되어 평소처럼 ‘상황에 부닥치면’ 고민하는 주제가 되었다. 이것도 안타까운 ‘사이의 시간’이다. 장애가 심해 다양한 활동이 어려운 이들이 함께할 수 있는 문화예술교육(사업)이 많아지길 바란다.
불타오른 보릿고개의 시간
2023년 2월이었다. 2017년부터 해 왔던 사회문화예술교육 예술강사 면접 최종 불합격 확인을 했던 곳은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객석이었다. 그러고 나서 바로 어두워지고 공연이 시작되었다. 그때 내가 본 공연이 무엇인지 지금도 기억나지 않는다. 제목도 모르겠다. 재작년만 해도 면접 때 ‘떨어지면 다른 수업 하고 새로운 일을 찾으면 되잖아’라고 쿨하게 생각했던 사람은 온데간데없었다. 공연장에 함께 온 지인이 옆에서 물었다. “선배 공연 어땠어?” “어 불합격이래”
예술강사들이 흔히 하는 이야기 중 ‘보릿고개’란 말이 있다. 작년 이맘때, 창조적파쏭쏭을 함께한 선생님들도 모두 보릿고개를 맞이했다. 조용히 겨울을 맞이하고 모처럼 여유 있는 시간을 가졌다. 하지만 겉으로만 여유가 있었고 속에선 난로 속 불꽃처럼 조용한 무언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래! 이대로 물러설 수 없어!’ 문화예술교육 공모사업에 지원했다. 내가 쓸 수 있는 공모사업에 모두 관심을 가졌고 열심히 지원서를 쓰고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당시에 내가 쓴 공모사업은 4개였다. 그중 2개가 선정되었다. 창조적파쏭쏭은 그렇게 ‘아츠컴퍼니 무아’(무아는 본래 내가 속해 있던 문화예술단체다)로 노선을 갈아타게 되었고 새로운 사업으로 새 활동을 이어 나갔다. 결과적으로 사회예술강사 불합격이라는 ‘쓴 잔’은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가수 정인의 노래 <오르막길>이 떠오른다.
연극 문화예술교육에는 다양한 방식의 수업들이 있다. 연수에서 경험하고 관심이 생기고 공부하면서 실제 수업에 활용하기도 했다. 한창 과정드라마에 빠져 관련 수업을 찾아보고 실제로 만들기 위해서 끙끙댔던 적도 있다. 그러다 최근에는 연극 자체의 매력, 연극 만들기 자체가 가진 매력에 좀 더 주목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사는 지역에서 새로운 프로그램을 실행했다. 제목은 <달밤에 삼대네 뮤지컬>. 우리 지역 특성상 조부모가 손자 손녀를 돌보는 경우가 많다. 1기 신도시에서 자란 세대가 결혼 후 자녀가 생기고 육아의 도움을 받고자 부모가 있는 곳에 돌아온다. 어릴 때 할머니 할아버지와 잘 지내던 친구들은 초등학교 고학년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어른들과 서먹해지는 경우가 생긴다. <달밤에 삼달네 뮤지컬>은 가족이 함께 그들의 이야기와 좋아하는 노래, 새로운 동작 등을 연습하고 무대에서 발표하는 프로그램이다. 공연의 시작과 끝을 함께 경험하며 자연스럽게 공감대가 생기고 소통의 장이 열리도록 하는 것이 핵심 기획 의도였다.
예술교육이지만 연극 공연을 만드는 느낌이 들었고 회차를 거듭하면서 참여자들의 새로운 모습, 깜짝 달라진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매회 수업이 즐거웠다. 마지막 공연 발표가 끝나고는 실제 공연이 끝난 것처럼 아쉬웠다. “우리 다음 주에는 안 만나요?” 어린이 참여자의 말에 모두 공감했고 며칠 후 모두 모여서 저녁을 먹기도 했다. 우리의 의도는 참여자에게 연극의 참맛을 경험하게 해주는 것이지만 참여한 예술강사 또한 연극의 참맛을 다시 느끼고 확인할 수 있었다. 또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가끔은 이렇게 기본에 충실한 것이 새로운 해답일 때가 있는 것 같다.
헤어짐과 만남의 시간
2022년 12월이었다. 창조적파쏭쏭 멤버들이 함께 활동했던 산본장애인주간보호시설 담당 선생님에게 전화가 왔다. “선생님, 우리 기관 선정되지 못했어요. 어떡하죠?” 그렇게 1년간 동고동락했던 기관과 예술강사는 사이 좋게 함께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그리고 2023년 봄, ‘예술누림’이란 복지기관 지원사업을 보게 되었다. 예술강사가 제시한 프로그램으로 복지기관과 매칭되는 사업이었다. 혼자보단 팀으로 수업을 진행하는 장점이 더 커서 이지혜 선생님에게 도움을 청하고 장애인 대상 <인스타 극장>, 노인 대상 <내 인생 내가 만든 악극: AI 함께 하는 문화예술> 두 프로그램을 제안했다. 아쉽게도 큰 호응은 없던 중 산본장애인주간보호시설에서 함께하자는 연락이 왔다. 그렇게 우린 2023년 다시 만나게 되었다.
산본주간보호시설에는 자체 프로그램이 대부분이고 외부 강사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이 거의 없었다. 2022년도에도 외부강사 프로그램은 우리 연극 수업이 유일했고, 다음 해 6월에 우리와 다시 만나기까지 외부 정규수업은 없었다. 그래서 연극 수업에 대한 아쉬움이 더 컸을 것이다. 오랜만에 산본장애인주간보호시설 방문했다. 매번 그랬듯 자연스럽게 형준 씨가 출입문을 열어주고 슬리퍼를 챙겨주었다. 근 7개월 만인데 마치 지난 주에 왔던 느낌이었다.
2022년도는 온전히 연극 수업이었다면 2023년도에는 연극과 영상 두 분야를 활용한 융복합 문화예술교육 수업 <인스타 극장>으로 영상 촬영을 많이 계획했다. 참여자의 관심을 끌어보고자 표정을 인식해서 여러 가지 특수 효과를 낼 수 있는 앱(스노우, 인스타)을 활용해 재미있는 영상을 만들었다. 춤을 추면 신체 실루엣을 따라 네온사인 효과가 생기도 하고 사람의 움직임을 졸라맨(선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인간 형태)으로 다시 표현해 주는 효과도 있다. 또 특수 분장을 한 것처럼 조선시대 왕이 되거나 장군이 될 수 있다. 수박씨가 입에서 튀어나오는 영상을 만들 수도 있다. 이를 활용해 왕과 장군의 대담, 입을 벌리면 수박씨가 나오는 신하 등 간단한 이야기를 즉흥으로 만들었다. 강사가 즉흥으로 대사를 하면 참여자들이 움직임과 연기를 했다. 그후에도 <모두 다 꽃이야:뮤직비디오> <영화 포스터 따라하기> <산본 마술쇼> <산본 먹방> <산본 좀비 영화> <토끼와 거북이> 등 참여자와 예술강사, 기관 선생님과 함께한 다양한 도전의 시간은 즐겁기도 하고 또 조금 어렵기도 했다. 그렇게 끝이 묘연했던 사이의 시간은 다시 만난 산본주간보호시설에서 새로운 경험의 시간으로 채워졌다.
  • <산본 좀비 영화>
사이의 시간
예술강사의 ‘사이의 시간’은 제도적인 이유로 생긴다. 당장 정답을 찾기 어렵다는 것을 알지만, ‘사이의 시간’이 선택적이거나 지금보다 훨씬 짧으면 좋겠다. 올해도 어김없이 맞이하는 ‘사이의 시간’에 나는 그동안 바빠서 다니지 못했던 전국의 산을 다닐 예정이다. 함께 가고 싶은 사람들과도 가고 혼자서도 자주 갈 것이다. 건강을 지키고 사색하는 시간이다. 내가 가진 것을 비우고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겠다. 청소하고 주변을 정리하면 그래도 좀 기분이 좋아질 것 같다. 그렇게 기분 좋은 ‘사이의 시간’을 만들도록 노력하겠다. 생각만큼 풍요롭지 않겠지만 나뿐 아니라 모든 예술강사도 어떻게든 잘 버틸(?)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 우리가 원하는 풍요로운 ‘사이의 시간’을 즐길 수 있길 바란다.
한형민
한형민
탐험가를 꿈꾸지만 소심해서 우선은 동네 산과 주변 산을 열심히 오르고 있다. 본업은 연극배우지만 이리 흐르고 저리 흐르다 지금은 예술교육 일을 더 많이 하고 있다. 무언가 상상하고 창조하는 것은 같기에 당분간 계속할 생각이다.
macseo717@daum.net
인스타그램 @santa_ajemaria
사진제공_한형민 문화예술교육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