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웠던 8월의 중순, 성북구 오동숲속도서관 뒤뜰에 마스크를 쓴 어르신들과 조주혜 무용작가가 모였다. 어르신 스스로 삶을 회고하고, 이야기 나눈 후 각자 10대부터 현재까지 그 시간을 함축할 한 단어를 찾고, 그 느낌을 점, 선, 그림 등으로 표현했다. 이어진 워밍업은 몸으로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도록 몸의 감각을 깨워주었다. 점과 선, 그림은 이내 어르신들의 몸짓으로 옮겨졌다. 어색하고 더딘 몸짓에, 무더위에도 쓰고 있었던 마스크 너머로 웃음이 번졌다. 어르신들은 서로의 몸짓을 보며 ‘30대는 그렇지, 40대는…’ 하며 공감의 표현을 보태었다. 수업을 참관하는 잠시였지만 지나왔던 나의 20대와 30대, 앞으로의 삶에 대해 떠올렸다. 육끼(황지원) 이야기청 총괄디렉터는 수업에 개입하지 않고 어르신과 무용작가의 활동을 기록하고 담아내는 역할을 담당했다. 무더운 여름 오동숲속도서관 뒤뜰에서의 사건은, 참여했던 어르신과 무용작가, 참여하지 않았지만 기록을 통해 접한 사람들을 통해 다시 회자될 수 있을 것이다. 흩어져 버릴 수 있는 그날의 사건을 기록하는 일, 그리고 다시금 꺼내어 이야기 나누는 일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무관심이 지배하는 세상, 이야기로 연결되는 우리
코로나19 팬데믹과 함께 마스크는 우리에게 너무나 당연한 일상이 되었고, 거리두기와 온라인 회의가 익숙해지고 사람들과의 접촉이 줄어들었다. 은둔형 외톨이를 의미하는 일본어 ‘히키코모리’는 이제 일본의 사회현상만은 아니다. 국내에서도 코로나19 이후 ‘은둔형 외톨이’가 늘어나고 있다. 무엇보다 팬데믹 이후 우리 사회의 양극화와 불평등이 심해졌음을 체감할 수 있는 기사들이 쏟아지고 있다. 사람들을 만나고 교감하는 것은 점점 더 줄어들고 과거에 사회 안에서 해결되었던 많은 것을 개인이 감당하는 상황이 되었다. 공동체 내에서 서로를 돌보는 일, 상호의존성이 줄어들고 있는 셈이다. 돌봄은 그림자 노동으로 상업화되거나 개인과 가족이 감당해야 하는 일이 되었다.
이야기청의 활동은 ‘나이 듦’에 대한 관심으로 시작되었다. 화가 김정헌 선생이 나이 듦과 관련한 문화예술 활동을 제안해 주었고, 기획자 육끼와 사회운동가 이원재가 함께 2017년 성북에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듬해 서울문화재단의 ‘서울을 바꾸는 예술’ 사업의 일환으로 <할머니들의 움직이는 방>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주목받게 되었고, 2019년 서울시 시민참여예산에 선정되면서 영등포 지역으로, 2020년에는 송파 지역까지 활동이 확장되었다.
이야기를 통해 다수의 사람이 서로 공감하고 연결하는 이야기청의 모델은 여러 가지인데요. 성북은 2018년부터 도서관이라는 플랫폼을 거점으로 하고 있고, 송파는 ‘이야기집’이라는 거점공간을 모델로 4년째 활동하고 있습니다. 영등포는 ‘이주’를 키워드로 대림(동) 관련 모임을 하면서 자체적으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삶과 나이 듦에 대한 감각, 외적으로는 세대 간의 감각을 가진 새로운 주체를 발견하는 작업입니다. – 육끼(황지원) 이야기청 총괄디렉터
  • 이야기청 청년작가와 어르신들의 만남
이야기청(聽), 삶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
과거에 ‘무속(샤머니즘)’이라는 용어와 ‘무속적(샤머니즘적)인’이라는 형용사가 근대화 과정에서 미신으로 치부되기 전에는 무속인이 마을 사람들과의 사적인 관계들을 토대로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역할을 해왔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낯선 이에게 말을 건네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관계 맺기 위한 마음을 내기란 쉽지 않다. 낯선 이에게 다가가 말을 건네면 “종교활동 하는 젊은이”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동네 골목, 공원 등에서 만나는 어르신들과 자연스럽게 인연을 만들어 가고자 했던 이야기청 예술가들도 어르신들과의 첫 만남에서 비슷한 경험을 했다.
오동숲속도서관에 처음 왔을 때, ‘뭔가 목적이 있어서 나한테 접근하는구나’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많았어요. 그건 노인만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저희가 친절하고 온화하게 다가간다고 해도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신기하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뭐 하는 사람들이야’ 하면서 오시거든요. 그럼 저희가 ‘노래해요, 춤춰요’ 하면 받아주신다고 해야 할까요? 그러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거죠.
이야기청이 선택한 방법은 매개자를 통해서 노인을 만나는 것이다. 이때의 매개자는 마을 통장님, 노인복지센터 복지사, 지역문화재단의 노인 관련 프로그램 담당자, 경로당과 주민센터 노인복지 담당자 등이다. ‘만남의 부재’와 ‘이해의 부재’에서 비롯된 괜한 오해를 줄이고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방법이다.
예술은 삶의 성찰과 공감인 것 같아요. 저희는 이야기를 통해서 삶의 경험을 경청하는 것, 그것을 예술작업과 연결하면서 그 과정에서 이야기하는 사람, 발화자와의 공감뿐만 아니라 그 이야기를 불특정 다수와 공감할 수 있도록 연결하는 거죠.
이야기청은 ‘이야기를 듣는다’는 의미로 ‘들을 청(聽)’을 쓴다. 경청은 이야기청의 기본적인 방법론이자 태도다. 일반적으로 맛에는 단맛·신맛·짠맛·쓴맛이 있다. 여기에 감칠맛을 더하여 다섯 가지 맛이라고 한다. 전통적인 감미료로는 꿀을 많이 사용하는데, 이것을 청(淸)이라 불렀다. 이야기는 노인들의 삶에 감미료가 되어줄 수 있을까?
생애사를 다루거나 아니면 사건을 중심으로 구성하느냐는 사실 분리되지 않는 것 같아요. 말하는 사람의 상황이나 작가의 관심에 따라서 선택하고 재구성되고 연결되는 것 아닐까요. 이야기를 잘 꺼낸다는 것은 이야기를 잘 듣는다는 건데, 이것은 상호작용이라고 생각해요. 마음을 열어야 이야기를 잘 하게 되고 또 잘 들을 수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저희는 경청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근대의 쓸모와 효용의 관점에서 보면 ‘노인’이라는 생애과정은 ‘일 능력을 상실한’ 문제의 세대이다. 하지만 관점을 달리하면, 나이 든 노인일수록 삶의 경험과 이야기가 풍부한 존재이다. 대안적 근현대사를 모색하기 위해 그간 지배적인 역사적 담론에서 다루지 않았던 민중사의 연구, 즉 민중의 입장에서 쓴 ‘밑으로부터의 역사’를 수행하는 많은 연구는 1970년대 말부터 시작했다.(『인류학자의 과거여행』) 과거의 기억들은 모든 상식처럼 이상하게 혼합된 구성물들, 일종의 지질학을 닮은 과거의 흔적들이 선택적으로 퇴적된 것(『구술사, 기억으로 쓰는 역사』)이라 할 수 있다. ‘구술’은 문헌 중심적인 역사 연구에 대한 새로운 역사 쓰기의 방식인 것이다.
  • 성북 이야기청 남정근 작가와 자화상을 그린 어르신들
  • 송파이야기집 서상욱 작가와 어르신들
나이 듦, 노인은 누구인가?
이야기청은 2023년 서울노인복지센터가 운영하는 탑골미술관 10주년 기념 전시와 워크숍을 진행하며 짧은 기간 동안 60대에서 90대까지의 어르신을 300명 넘게 만났다. 어르신들에게 ‘노인의 나이와 기준은 무엇인지, 그렇다면 당신은 노인이라고 생각하는지’를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흥미로웠다. 79세는 80세부터 83세는 85세부터 노인이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94세 어르신은 아직 노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하셨고, 대부분 ‘내 나이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을 노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육끼는 “세대는 연결되어 있고 삶은 협력적인데 지금 우리 사회는 정책적으로 세대를 너무 세분화하고 대상화하는 문제가 심각하다”라고 진단하며 그러한 인위적인 구분과 자원 분배가 노인 혐오를 더 심화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을 담아 활동하고 있다. 결국 나이 듦은 노인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야기청이 젊은 예술가들과 작업하는 이유기도 하다. 이야기청의 젊은 예술가와 노인은 자연스럽게 만남을 가진다. 만남의 시간 동안 나이 듦에 대해서 탐구하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서로의 공통감각을 만들어 내고, 서로를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감각을 확장하고, 감각을 공감하는 주체를 넓히는 것이 문화예술교육이라면, 노인의 삶을 경청하고 예술가의 감각으로 재구성하는 거야말로 중요한 예술교육의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사는 것에 대한 고민은 서로 다 맞닿아 있다고 생각하고 저희 작업을 보는 많은 사람에게 공감이 되길 바라요. 세대를 가로지르는 공감과 협력이 있어야 서로 잘 지낼 수 있지 않을까요.
지금 우리 사회에는 ‘상호의존성을 인정하고 다양한 규모의 삶을 가로질러 가족으로 한정되는 돌봄의 범주를 새로이 규정해 좀 더 확장된 친족모델을 만들어야’(『돌봄선언』) 하며, 서로가 부대낄 수 있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공공재로서의 공간이 필요하다. 그것이 일시적 공동체일지라도. 느슨한 연대를 통해서 서로를 만나고 관찰하고 이야기를 듣고, 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하다.
  • 탑골미술관 10주년 기념전시 《나의, 나이》 워크숍
주희란
주희란
프로젝트그룹 번지, 시각예술작가. 도시와 공간, 관계망 등에 관심을 가지고 기획과 활동해왔다, 현재 도시사회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1932년생 외할머니의 ‘구술 생애사’를 진행 중이다. 거주하고 있는 지역에서 도심공동화와 빈-공간, 걷기와 사유에 대한 예술프로젝트 <빈집+기담(奇談)> <LifeRe_cycle> 등을 윤영욱 작가와 공동기획하고 진행하였다.
인스타그램 @drawing_erani
영상_박영균 미술작가 infebruary14@naver.com
프로젝트 사진 제공_이야기청 @memory.talk.hou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