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시간 보다 일찍 도착해서 주변을 둘러보는데, 이 동네에서 유일하게 대문이 열려있는 집이 약속한 장소다. 이곳은 서른 살 첫째부터 중학생 막내까지 열 명의 아이들과 ‘총각엄마’가 함께 사는 곳이다. 아이들 등교를 도와주고 돌아오는 길이라며 차에서 내리는 총각엄마를 만났다. 이야기를 나눌 주방의 커다란 식탁으로 안내받아 앉자마자 총각엄마는 접시에 가지런히 담은 롤 케이크와 차를 내어주었다. 에어컨과 선풍기를 내 쪽으로 틀어주며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초면의 어색함도 잠시, 예전에 친구네 집에 놀러 가서 친구 어머니를 만났을 때 같은 익숙한 안정감을 느꼈다. 그래서 이곳이 더욱 궁금해졌다.
식탁에 앉아있으니 자연스럽게 밥 이야기로 이어졌다. 알람도 필요 없이 매일 아침 5시 50분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11명의 아침 식사를 준비한 지 어느새 20년이 다 되어 간단다. 제일 일찍 등교하는 고등학생부터 나가야 할 시간순으로 아이들을 깨워 밥을 먹이는데 모두 한참 먹성 좋은 남자아이들이라 그런지 계란 한 판하고도 반 판을 더 부쳤는데도 아침 반찬으로 순식간에 뚝딱이다. 아이들이 모두 등교, 출근하고 난 뒤 깨끗하게 설거지 된 11개의 밥그릇을 보면 힘들지만 뿌듯하다는 총각엄마. 여느 엄마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이곳 북한이탈청소년 그룹홈의 운영자이자 북한이탈주민 지원사업을 하는 ‘(사)우리들의 성장이야기’의 김태훈 대표다. 열 명의 아이들 단속하기에도 바쁜 그는 북한과 가장 맞닿은 철원의 카페레스토랑 사장도 겸하며 큰 팔을 날개처럼 펼쳐 모두를 보듬고 있다.
오늘도 내일도, 곁을 지켜주는
처음부터 뭔가 대단한 사명감을 가지고 봉사활동을 시작한 건 아니었다. 사회복지학 전공자도 아니고, 직업적으로는 더더욱 아니었다. 다만 분명했던 것은 봉사에도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천주교 봉사활동을 하다 만난 그 아이(지금의 첫째)가 그날 혼자 자기 싫다고, 같이 있어 주면 안 되겠냐고 하는 말에 엄마에게 전화했다. 아이와 하루 자고 내일 들어가겠노라고. 그 내일이 지금까지 이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작정하거나 계획해서 지금까지 이어진 것은 아니다. 함께 자고 일어난 다음 날 “갈 거예요?”라는 아이의 말은 어쩌면 ‘총각엄마’라는 이름이 부여된 시작이 아니었을까. 책임감으로 시작된 만남은 그 이후로 서로의 삶 속으로 스며들었고 마침내 삶을 공유하며 서로를 돌보는 가족이 되었다. 그리고 그 책임감은 자연스럽게 더 넓고 깊어졌다.
그날 하룻밤을 같이 자고 난 뒤 가족이 된 첫째가 서른 살이 되었지만 ‘봉사는 봉사일 뿐이다, 지금 뭐 하는 거냐, 네가 애를 키워봤냐, 총각이 무슨 애를 키운다고 하냐. 가족은 무슨 가족이냐’. 걱정이라는 이름으로 건네진 숱한 이야기들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건 없어요. 참 아쉽죠. 아이는 여기에서 꾸준히 성장했는데 아이의 성장에 비해 사회적 인식은 그날 밤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아요. 통일, 평화, 정치적인 색깔이 강한 다른 단체들과 달리 이곳은 여느 보통 가정집이에요. 우리의 중심은 집이고, 한 가족으로 살아가죠. 특별한 프로그램이요? 무슨 프로그램이요, 남들 집에 없는 걸 하지는 않아요. 똑같아요. – 김태훈 (사)우리들의성장이야기 대표
‘우리들의 성장이야기’는 다만 식구가 많은 만큼 횟수와 양의 차이만 있을 뿐 다른 집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북한에선 생일축하를 한 번도 안 받아본 아이들이라 생일축하파티는 가족끼리 꼭 챙겨주고 있다. 11명 아이의 생일이 다 다르니 한 달에 한 번, 많으면 두 번 생일파티를 하다 보면 일 년 내내 생일축하 노래가 끊이지 않는다. 이곳에 있는 탈북청소년 대부분은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그중 두세 명은 부모님 생사조차 모른 채 살아가고 있어서 일 년에 두 번, 명절에는 돌아가신 부모님을 기리는 제사상을 차리고 합동 제사도 지내고 있다. 바다를 한 번도 못 본 아이들은 여기에서 처음 바다를 마주했다. 어느 정도 자라서 이곳에 왔지만, 여느 평범한 아이들처럼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아 그 사랑으로 지난날과 앞으로의 날들이 꽉 채워지고 단단해지기를 바라며 하루하루를 쌓아왔다.
그룹홈 안에서는 비교적 안정적이었다가도 성인이 되어 그룹홈을 벗어나 사회로 나간 아이들이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오는 경우가 많다. 탈북민이라는 것을 감추고 살 순 없는데 북한에서 온 사람이라고 밝혀지는 순간, 그때부터 온갖 오해와 편견으로 인해 깊은 상처가 되어 대처할 힘조차 사라지고는 한다. ‘우리들의 성장이야기’는 이들 앞에 계속 놓일 이런 상황들을 적극적으로 함께 헤쳐 나가야겠다는 다짐이자 돌봄으로 축적된 또 하나의 가족이자 커뮤니티다.
이야기로 맺어가는 자연스러운 관계
총각엄마는 북녘땅이 바로 앞에 보이는 철원에서 ‘우리들의 성장이야기’를 나누어보자는 마음으로 카페 ‘오픈더문’(open the moon)을 2018년에 열었고, 현재 성인이 된 아이들과 함께 운영하고 있다. 최대한 북한과 인접한 곳에 자리를 잡았는데 덕분에 주변에는 비무장지대와 논밭뿐이다. 오다가다 들를 수 있는 곳이라기보단 마음먹고 일부러 찾아와야 하는 곳이다. 지역주민과 자연스럽게 관계를 맺고 싶어서 처음에는 탈북민이라고 굳이 말하지 않았다. 차츰 관계가 쌓이니 지금은 지역주민이 든든한 응원군이 되었고 전국 각지에서 ‘마음먹고 일부러 찾아오는’ 손님들도 점점 늘고 있다.
돈을 벌려는 목적으로 시작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이런 곳에 차렸겠죠. 우리 아이들이 온 곳에서 최대한 가깝게 있으면서 자립할 방법으로 생각해 낸 거에요. 이런저런 고민을 해보았는데 인큐베이팅으로는 해소가 안 되더라고요. 영국에서 사회적기업 모델들을 견학할 기회가 있었는데 스토리가 있는 카페와 식당을 많이 하더라고요. 우리도 여기서 이야기가 담긴 카페를 하자고 의기투합했습니다.
‘통일’과 ‘평화’는 이들에게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주제다. 분단국가였던 독일과 지구상 마지막 분단국가인 한국의 청년들이 함께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주제로 3분 8초의 초단편 영화를 제작한 뒤 함께 영화를 관람하는 <3분8초 영화제>도 시작되었다. 평화와 통일에 대한 주민 인식개선은 물론이고 영화제 프로그램 자체로도 호응이 좋다. 영화제는 대한민국의 최북단 지역인 철원에 모여 통일과 평화에 관해 이야기하는 ‘동서남북국제워크캠프’의 일환이기도 하다. 영화 감상뿐 아니라 통일, 평화 그리고 남북 관계에 대한 다양한 고민과 상상을 나누는 자리인 셈이다. 영화는 3분 8초지만 영화를 둘러싼 메시지와 여운은 상영시간과는 달리 결코 짧지 않았다. 막연하거나 또는 당위적인 통일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의 시선과 감각을 통해서 남북문제를 공감하며 잘 몰라서 두렵고 불편했던 것들을 자연스럽게 해소하는 자리가 되었다. 역시 용기 내서 이야기를 나눠봐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어 또 다른 활동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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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분8초 영화제 야외시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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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3분8초 영화제 상영작〈밥심〉
[출처] 유튜브 총각엄마TV
코로나 팬데믹은 ‘우리들의 성장이야기’가 유튜브 활동을 하는 기회가 되었다. 코로나로 인해 많은 시간을 집안에서 보내다 보니 예전처럼 활동이 어려웠고, 그래서 어떤 것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유튜브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유튜브는 탈북청소년의 일상을 알릴 수 있는 좋은 소통창구가 되었고 “우리의 일상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것이야말로 편견과 경계를 허무는 방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하는 바람이 생겼다. 서로가 서로를 돌보면서 지내는 자연스러운 영상들이 유튜브에 쌓이면서 독일, 영국, 호주 등에서 인터뷰 요청이 오고 해외에서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우리 아이들도 여느 아이들과 다를 바 없는 아이들이라는 메시지가 전달되길 바라고 시작했는데 다행히 응원, 반성의 댓글들을 보며 안심하기도 했어요. 무엇보다 내심 우려했던 악플이 없어서 다행이었어요. 코로나가 잠잠해지자 더 적극적인 만남의 자리도 만들어봐도 좋겠다 싶더라고요. 탈북청년들과 같은 또래들의 이야기를 듣고 담는 ‘청년구술생애사’ 작업을 통해서 서로를 더 깊이 알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청년구술생애사 작업은 구술자와 서술자로 나누어 활동하는데 이미 나눌 이야기를 가득 안고 오는 청년들을 보고 놀랐어요. 이야기를 잘 기록하겠다는 서술자 신청이 작년보다 더 많기도 하고요. 구술생애기록 쪽으로 활동하고 싶다는 청년도 생겼다니까요.
청년구술생애사 작업은 반응이 좋아서 올해 접수자가 지난해의 4배를 넘었다. 여기에는 물론 북한이탈청년의 이야기도 담는다. 다른 사람의 인생이야기에서 그 사람을 이해하게 되고 자신의 인생이야기를 잘 엮어 냄으로써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고 비로소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다.
‘아무렇지 않은’ 성장과 돌봄
탈북청소년들과 ‘함께’ 무엇인가를 한다는 게 ‘우리들의 성장이야기’와 ‘김태훈’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냐고 돌봄의 맥락에서 설명해달라고 했다.
의미를 꼭 찾아야 하나요? 의미 없어요. 그 하룻밤으로 인해 여기까지 오게 되었지만 오로지 잘 챙겨주고 싶었어요. 여전히 주변에서 ‘행여나 커서 너를 찾아올 거라는 건 상상하지 말아라’ ‘상처도 받을 거다’라고 말해요. 아직은 와닿지 않지만 어쨌든 저는 이 아이들과 이렇게 사는 게 좋아요. 이 아이들을 둘러싼 환경이 아직도 많이 힘들지만 제 품에서만 잘 사는 게 아니라 사회에서 어떤 모습으로 비치고 자기 삶을 살아갈지 지원하고 격려하는 게 저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인식개선을 위한 활동을 계속 해 나가다 보면 아이들의 삶을 통해서 이 사회는 깨닫고 변화할 거라고 믿어요.
유난스러운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어쩌면 자연스럽고 아무렇지 않은, 그 아무렇지 않음에서부터 시작된 관계가 좋았다. 총각엄마가 그날 밤 그 아이의 부탁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인 것처럼 이 ‘아무렇지 않음’이야말로 돌봄의 본질이 아닐까.
처음 성북구 무허가 건물에서 시작해 허름한 상가건물 옥탑방으로 이사했다가 다시 지금 집에서 10년, ‘우리들의 성장이야기’는 이제 무상 임대 계약 기간이 끝나 또 다른 집으로 이사를 준비 중이다. 한동안 사용 안 한 빈집이라 공사부터 시작해야 하지만 새로운 도움으로 앞으로 5년은 그곳에서 살 수 있다고 한다. 홈페이지에는 ‘집 마련 후원모금 현황’이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까지 빼곡하게 적혀있다. 우리들의 성장이야기가 지금까지 그러했듯이 탈북청소년들을 둘러싼 결코 특별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돌봄의 문화가 이 집 밖에서도 사회적 돌봄으로 연결되고 흘러가서 우리 모두의 일상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 황지원(육끼)
- 문화기획자, 마을활동가. 이야기청 디렉터. 여기저기서 많은 도움 받은 만큼 언젠가 나도 한번쯤은 든든한 어깨를 내어주고 싶어서 (소극적으로) 어깨를 넓히는 중이다.
인스타그램 @memory.talk.house - 사진제공_(사)우리들의성장이야기 페이스북 @openthemoon
www.youthfamily.modoo.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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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렇지 않고 특별할 것 없는 보통의 가족
새로운 고향과 보금자리를 만드는 ‘우리들의 성장이야기’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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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만점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