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청년으로서의 사적인 경험담
아버지는 2016년 5월 4일, 어린이날을 하루 앞두고 한 빌딩 건축 현장에서 떨어졌다. 외상성 뇌출혈로 머리를 열어 두 차례 뇌수술을 받았고 중환자실에 한 달이 넘게 있다가 겨우 의식 정도는 돌아와 일반병실로 옮겨졌다. 어린이날이 한참이나 지나서야 깨어난 아버지는 어린이가 된 것만 같았다. 아버지를 돌볼 수 있는 다른 가족 구성원이 마땅찮아 나는 떠안듯 그를 돌봤다. ‘돌봄’의 정의, 범주, 방법을 다 설명할 순 없지만, 그의 아들로서 책임감으로, 나아가 의무라 여기고 할 수 있는 만큼 돌봤다. 이른바 ‘영 케어러(Young Carer)’, 그러니까 돌봄청년이 된 것이다. 그는 장애인이 되었고.
비교적 어린 나이에 자신의 성장 단계에 비해 무거운 책임을 떠안고 가족을 보살피는 돌봄청년·청소년은 돌봄 과정에서 죄책감을 자주 느끼곤 한다. 아무도 돌볼 사람이 없어 돌봄을 떠안게 되었지만 잘 돌보고 있는지, 내가 돌보는 가족이 나 때문에 욕망의 좌절을 겪고 있는 건 아닌지 따위의 죄책감과 의문이, 나와 외부로부터 부과되는 것이다. 그 부과를 스스로 당연하게 여기고 오롯이 나만 겪고 있다 느낀다면 돌봄청년·청소년 당사자는 위태로워진다. 돌보는 자의 위기는 돌봄 받는 자의 위기이기도 하다. 이렇듯 위기에 있어서 돌보는 자와 돌봄 받는 자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더 따지고 보면 돌봄을 기준으로 행위자와 수혜자를 엄격하게 나누는 것 역시 더 다양한 행위와 감정, 주고받는 관계와 흐름 등을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일 수 있다.
이런 구분은 구분대로 문제일 수 있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부당한 죄책감의 부과와 고립이다. 나 역시 이런 위기를 겪었다. 왜 이런 죄책감을 나만 겪어야 하는지 마땅한 화풀이 대상도 없어 원망이 일어났고 속으로 울분을 삼키곤 했다.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글쓰기였다. 돌봄 경험과 아버지에 대한 마음, 그리고 돌봄에 대한 내 생각과 감정들을 글로 옮겼다. 해소의 과정이긴 했으나 마저 해소되진 못했다. 이제 밖으로 꺼내봐야겠다 싶었다. ‘작업’을 시도해 본 것이다.
영등포 지역에서 유급 돌봄 노동을 하는 노인을 인터뷰해 글로 옮겼고, 병원에 있는 아버지를 인터뷰한 이야기도 함께 책으로 엮었다. 특히 아버지와의 인터뷰는 당신이 주저하며 꺼낸 말이 끝내 말이 되지 못 한 채 알 수 없는 음성들과 동문서답으로 채워졌지만 되도록 추측과 편집을 시도하지 않고 그대로 싣고자 했다. 부당한 죄책감의 부과와 고립으로 위기를 겪던 내게는 탈출과 연결의 욕망을 작업으로 풀어낸 계기가 되었다. 이 작업으로 졸작 『돌봄을 돌아봄』이라는 제목의 책을 펴냈고 이는 다른 돌봄청년을 만나는 또 다른 계기가 되었다.
이미 앞서서 국내에 ‘영 케어러’라는 존재를 알리고 관련한 문제를 공론화하는 데 이바지한 조기현 작가와 연락이 닿았다. SNS로 소통하다 직접 만나 돌보고 돌봄 받는 자(잘 돌보고 잘 돌봄 받고 싶은 자)로서, 또 작가로서 서로의 고민을 나누었고 함께 돌봄청년들의 자조 모임을 만들어 여러 활동을 해보자는 것까지 뜻을 모으게 되었다. ‘돌봄청년 커뮤니티 n인분’의 시작이다. 비영리법인 설립까지는 그로부터 2년여가 더 걸리긴 했지만, 그 시간은 각자의 돌봄 경험을 공유하고 재의미화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나아가 돌봄 이후, 그러니까 상실과 애도를 어떻게 준비할지도 고민하면서 돌봄청년 당사자뿐 아니라 여러 시민과 접촉하고 연대할 수 있는 기반을 다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내가 속한 ‘문화기획선 고잉미랑호’와 ‘돌봄청년 커뮤니티 n인분’에 문화예술(교육)은 이를 위한 아주 적절한 장이었다. 작가 개인의 작업이 다른 시민과 만나는 것 자체도 서로에게 의미가 있겠지만, 작가와 시민이 ‘돌봄’과 ‘애도’라는 주제로 만나 함께 대화하고 연습해 볼 수 있는 문화예술(교육)은 그 사회적 가치와 의미 또한 짚어볼 만하다.
고립을 넘어 서로를 지지하며
작년 10월, 11월에 걸쳐 진행한 <돌봄청년의 애도연습>은 이를 주제로 한 두 번째 문화예술(교육) 작업이었다. 이 작업은 아버지의 두 번째 낙상에 기인한다. 2021년 추석쯤 간병사가 아버지를 요양병원 침상에서 휠체어로 옮기다가 놓치는 바람에 아버지는 그대로 병실 바닥에 떨어져 고관절이 부러졌고, 요양병원에서의 두 번째 낙상으로 골절된 고관절을 제거하고 인공관절을 삽입하는 수술을 받고는 다시 중환자실로 들어가게 된다. 수술 자체는 잘 되었으나 폐렴이 문제였다. 자칫 사망할 수도 있다는 의사의 말에 새 직장에 출근한 지 이틀째 되던 나는 일을 하다 말고 눈치도 없이 잠시 멍해졌다.
다행히 회복되어 요양병원으로 돌아왔지만 “어르신들이 고관절 골절상을 입으면 3년을 못 넘기더라”라는 속설은 병원을 떠도는 대수롭지 않게 여길만한 소문일 뿐임에도 덜컥 겁을 먹게 했다. 아버지의 죽음이 코앞까지 다가온 것만 같았다. 물론 그의 죽음은 언제고 다가올, 피해 갈 수 없는 필연이다. 그러므로 겁을 먹을 만한 일도 아니지만 당시 나는 그의 죽음을 언제까지고 유보하고 싶었나 보다. 미처 준비하지 못한 상태에서 떠안은 돌봄이 여러 혼란과 고립을 안겨 줬지만, 아직 다가오지 않은 상실과 애도를 미리 준비한다면 그때보단 덜 혼란스럽지 않을까? 잘 애도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질문은 공명을 일으켰다. 돌봄청년들인 우리는 그 질문에 서로 감응하고 반응하여 <돌봄청년의 애도연습> 프로젝트를 기획하기에 이른다. 총 3개의 강좌와 2개의 워크숍으로 참가자들에게 여러 질문을 던지고 돌봄과 상실, 그리고 애도의 경험과 이야기를 나누는 장이 되었다. 죽음이 ‘나쁜 것’처럼 여겨지고 애도를 위한 장례가 가족 중심적으로 이뤄지는 한국 사회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다른 죽음, 다른 애도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편 상실은 보편적이지만 반응은 개별적이다. 애도를 위한 글쓰기, 명상 테라피, 슬픔의 파장을 느끼는 방법처럼 춤, 음악, 미술 등 애도를 표현하는 다양한 방식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다양한 애도의 방식과 더불어 떠나보낸 자로서 상실의 슬픔을 안전하게 겪어내고 때로는 잘 흘려보낼 수 있으려면 마음을 나누는 커뮤니티와 서로를 지지하는 관계를 만드는 것도 필요하다. 권순국 작가가 경험한 상실과 애도를 <초종:애시와 산책>이라는 작업으로 기획하고 공연한 사례를 들으며 자신에게 필요한 애도 환경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해 보는 시간 또한 가졌다.
3개의 강좌가 끝나고 2부에서는 <돌봄과 애도의 글쓰기> <당신을 위한 애도인형>이라는 2개의 참여형 워크숍을 진행했다. <돌봄과 애도의 글쓰기>는 청년들이 돌봄과 애도의 주체로서 그 마음과 생각을 글쓰기로 풀어보는 워크숍으로 심리상담사이자 작가인 인현진 선생님이 진행했다. 애도 작업에는 두 가지 관점이 필요하다는 내용이 기억에 남는다. 하나는 개인이 삶에서 겪는 상실을 다루는 작업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 관점에서 어떤 애도 문화를 만들 수 있을지 모색하는 일이라는 것. 참여자 중에는 이미 상실을 경험한 사람들도 있었고 경험하진 않았지만 돌봄과 애도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워크숍을 통해 그들은 자신의 마음을 돌보는 시간인 동시에 건강한 애도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당신을 위한 애도인형>은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린 후 당신의 마음은 괜찮은지, 떠나간 존재에 여전히 마음이 닿아있어 지금의 당신이 너무 괴롭진 않은지 질문하며 시작했다. 이어서 상실의 슬픔과 애도하는 마음을 글로 적어 인형의 상처 속에 넣고 꿰매고는 그 위에 색과 모양을 입혀 구체적인 형상을 부여했다. 참여자들은 자기가 만든 애도인형을 테이블 위에 놓고 애도하려는 존재에 대하여 그리고 남아있는 자신의 마음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눴다. 함께 인형 위에 손을 얹고 토닥이며 위로의 말을 건네었다. 이 과정을 통해 애도는 상실된 존재와 그의 기억을 잘라버리거나 떼어내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수용하는 것임을 알아차린다. 부재를 받아들이고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애도의 시작임을 또한 깨닫는다.
상실을 준비하는 모두를 위하여
<돌봄청년의 애도연습> 1부 강좌가 시작되기 일주일 전쯤 전혀 예상치 못한 사고가 일어났다.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에서 이른바 ‘10·29 참사’가 일어났다. 159명이 죽고 200여 명이 부상한 사고였다. 그 어느 때보다 ‘애도’가 반복적으로 언급되고 가득 채워질 때, <돌봄청년의 애도연습>은 최초 기획 의도와는 다른 무게와 질감을 갖게 되었다. ‘애도’는 돌봄청년만 연습하고 준비할 것이 아니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고민에서, 그러니까 언젠가 찾아올 아버지의 죽음과 그 상실을 어떻게 감당하고 준비할 수 있을지, 잘 애도하고 싶은 마음에서 기획한 <돌봄청년의 애도연습>은 모두의 <돌봄과 애도연습>이 되어야 했다.
처음과는 다른 무게와 질감을 갖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기대나 전이해(前理解)가 아주 다르지도 않기에 사회적 애도에 대한 이해나 관련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어떤 사명감이나 책임감까지는 갖지 않기로 했다. 다만 함께 애도에 동참하며 이해하고 동의했던 지점은 살아남은 자로서 떠나보낸 자로서 진정한 애도는 ‘슬픔’이라는 감정만으로, 장례식/추모식/국가 애도기간 등 어떤 ‘세레모니’로만 한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애도의 본질은 결국 죽은 자의 삶을 통해 산 자로서 자신과 사회에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에 있다. 죽은 자의 삶을 통해 자신의 삶, 나아가 사회를 재해석하고 이해하려는 노력 자체가 애도라는 것에 우리는 동의했다. 그리고 각자의 자리에서 슬픔에 동참하며 할 수 있는 애도를 표했다.
돌봄-상실-애도가 인과로서 순차적(시간)으로 찾아오는 것일지 몰라도, 그것들은 결국 남은 자인 ‘나’(장소)에게서 만난다. 누군가를 돌보는 나, 누군가를 상실한 나, 누군가를 애도하는 나들이 모여 참여한 <돌봄과 애도연습>은 어쩌면 돌보고 상실하고 애도하는 나 스스로를 구원하는 자기 구원의 작업 아니었을까. 부재를 받아들이고 나를 사랑하는 것, 안전하지 않은 사회에 문제를 제기하고 책임을 묻는 것 모두 우리의 애도인 것이다.
돌봄과 애도를 둘러싼 질문들
다시 돌봄 이야기로 돌아와서, 어쩌면 조금은 거창할 수도 있는 이야기도 해보자면 인류가 코로나19 팬데믹과 기후 위기를 겪으면서 함께 따라붙던 것은 ‘돌봄의 위기’였다. 물론, 이미 ‘돌봄의 위기’는 있어 왔던 것이 자명하고 다른 위기들과의 개연성이야 하나하나 짚어내지 않더라도 지난 3년간 모두가 그 연결고리들을 체감했겠다. 당장 요양병원에서 아버지를 돌보는 간병사도 팬데믹 동안 외출/외박을 거의 하지 못한 채 병원에 갇혀 지냈다. 아버지를 비롯한 입원 환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나 또한 아버지를 언제고 보러 갈 수 없었다. 다른 돌봄청년들은 어떠한가. 그들은 관계와 커리어가 단절되거나 모시고 병원에라도 갈라치면 방역 수칙을 지키느라 준비할 게 한둘이 아니었다. 간병과 돌봄에 내몰린 사람들의 이야기는 이렇듯 팬데믹과 기후 위기 등 다중재난의 시대에 더 처절하게 다가온다. 돌봄은 결국 비인간 존재를 비롯한 타인을 향한 사랑이고 상상력이라는데, 왜 ‘돌봄’을 삶의 고통으로밖에 경험할 수 없을까?
물론 구조적이고 제도적인 변화가 필요하고 시민으로서 그 변화를 촉구하면서 동시에 변화의 주체로도 나서야 하지만, 기획자이자 작가로서 시도해 보았던 <돌봄과 애도연습>에 이어 앞으로도 시민들과 만나 ‘돌봄’을 둘러싼 감각의 변화와 다양한 돌봄의 모습을 이야기하는 문화예술(교육)의 장을 만들려 한다. 한 인간으로서 반려견과의 안전한 돌봄과 애도가 어떻게 하면 가능할지, 사랑하는 연인과의 안전한 돌봄과 헤어짐은 어떻게 연습할 수 있을지, 돌보는 남성으로서 독박 돌봄 아닌 안전하고 조화로운 돌봄은 어떤 모습일지, 돌봄청년으로서 돌봄을 기피·회피하지 않고 혹은 제공만 하지 않고 잘 돌보면서도 잘 돌봄 받을 수 있는 역량과 감각은 무엇일지, 소중한 존재를 떠나보내고 남은 자로서 어떻게 잘 애도할 수 있는지를 질문하며 알아가고 싶다.
오는 10월과 11월, 딱 1년 만에 <돌봄과 애도연습> 시즌 2로 <돌봄과 애도를 위한 문화안전망>이라는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 연극, 전시, 포럼 형식으로 돌봄 극장, 애도 뮤지엄, 돌봄과 애도의 도시 등 총 3개 마당으로 꾸렸다. 돌봄, 애도와 관련해 경합과 각축을 거듭하는 질문을 던지고 순간과 장면을 감각하며 ‘문화안전망’이라는 관점으로 우리의 사회와 일상을 전망하려 한다. ‘돌봄’이 삶의 고통만이 아닌 -‘고통’ 그 자체에도 의미가 있겠지만- 다양한 감각과 지혜로운 역량, 매력적인 관계의 이야기로 경험되기를 바라면서.
- 동그랑(형민)
- ‘시인’이 되고 싶어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하고 가까스로 졸업했지만 ‘시인-되기’는 여전히 요원하고 문단에 등단한 적 역시 없다. 졸업 후 개신교 선교단체 간사로 3년 간 일하다 2016년, 형틀목수로 일하던 아버지가 산업재해를 당해 상시 간병과 돌봄이 필요한 장애인이 되자 하던 일을 관두고 간헐적으로 그를 돌보며 지금까지 반상근 활동가, 문화기획자, 프리랜서 작가 등 n잡러로 일하고 있다. 현재는 ‘자립하는 소농학교’ ‘돌봄청년 커뮤니티 n인분’ ‘문화기획선 고잉미랑호’에 소속되어 역시 다양한 역할로 활동 중이다. 필명 ‘동그랑’은 강화도에 딸린, 동검도에 딸린, 무인도 동그랑섬에서 따왔다. 말하자면 섬 안의 섬 안의 섬.
ddonggeurang@gmail.com
인스타그램 @a_well_round - 사진제공_동그랑(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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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수용하는 애도 연습을 해야할것 같네요
잘 읽고 갑니다
불안과 고립을 넘어 안전하고 조화롭게
〈돌봄과 애도연습〉으로 맺어가는 돌봄의 안전망
공감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