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합’ 이 두 글자를 들으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지 묻고 싶다. TV쇼, 래퍼, 스웨그, 드랍 더 비트 등 많은 해석이 가능한 문화이다. 하지만 우리는 힙합의 겉모습에 끌려 가장 중요한 핵심 하나를 놓치곤 한다. 그것은 바로 리스펙트(respect)다. 힙합 다큐멘터리 <프리스타일: 아트 오브 라임>에서는 리스펙트에 대해 이렇게 전한다. 힙합은 인종차별에서 오는 분노를 떨쳐버리기 위해 탄생했기에 프리스타일 래퍼들이 서로의 이야기를 거친 랩으로 뱉어내는 모습이 서로를 헐뜯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공동체의 유대감을 느끼며 리스펙트하게 된다는 것이다. 분명 힙합 문화는 공감과 존중의 경험이다. 문화예술교육에서 참여자와의 관계, 상호존중, 주체적인 참여에 대한 질문은 언제나 가까운 화두다. 이런 물음에 대한 해답 중 하나가 바로 힙합 문화의 가장 중요한 가치인 리스펙트가 아닐까.
경계 위에서, 드랍 더 비트!
소규모 공연장의 분위기가 물씬 느껴지는 곳에서 꿈다락 문화예술학교가 진행되고 있다. 청주의 힙합 성지이자 어글리밤(UGLY BAAM)이 운영하는 공연장인 와이홀이다. 랩톱 컴퓨터와 여러 대의 마이크, 디제이 믹서, 음향시스템이 지금 당장 참여자들에게 무대 위로 올라와서 랩을 하라고 부르는 것 같다. 시간이 되었다. 갑자기 비트가 흐른다. 청소년 참여자에게 안부를 묻기도 전에 마이크를 잡는다. 이렇게 랩으로 모인 이들은 랩부터 한다. 멋있다. 한 명씩 무대로 나와 흐르는 비트에 랩을 시작한다. 랩이 끝나면 서로의 랩에 대해 자유롭게 얘기한다. 좋았던 점 아쉬웠던 점 모두 수평적으로 말할 수 있다.
청주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힙합 콘텐츠 그룹 어글리밤은 전혜원 대표가 자기 고향에서도 무대를 만들고 싶어 시작되었다. 그리고 점차 지역과 문화 그리고 청소년에 관심을 두게 되면서 힙합으로 만나는 문화예술교육을 진행하게 되었다.
청주가 문화적으로 더 발전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려면 청소년들에게 더 많은 예술적인 경험과 생각이 필요합니다. 여기에 우리의 역할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해요. 그게 문화예술교육을 하는 가장 큰 원동력입니다. 지역에서 자라며 문화적 결핍을 느꼈던 어글리밤 구성원들이 이제야 세상의 즐거움과 다양성을 깨달았고, 좀 더 빨리 우리 지역 청소년에게 전해 주고 싶었습니다.– 전혜원 어글리밤 대표
참여 청소년에겐 같은 지역사회 선배의 말이라 더욱 진심으로 느껴질 것이다. 지역에서 느낀 문화적 결핍이 이들을 랩으로 뭉치게 한 셈이다. 하지만 이 결핍이 다음 세대에까지 이어져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 어글리밤의 수업이 오늘도 진행되고 있다.
현재 꿈다락 문화예술학교를 통해 참여 청소년들이 하나의 크루로 만들어지는 중이다. 그래서 음악 외에도 각자 다른 역할을 하나씩 맡아 서로를 돕는다. 기획, 앨범 디자인, 홍보까지 훗날 뮤지션으로 활동할 때 필요한 내용들이다. 프로그램 밖에서도 서로를 돕는 음악공동체의 사례를 남길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30회차라는 긴 호흡의 대장정 후에는 기획앨범이 완성된다. 자기 이름이 실린 어엿한 음반 하나가 가진 힘은 크다. 추억과 배움 이상의 성취가 포함된다. 더불어 각자가 아티스트로 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선사한다. 교육 활동과 예술 활동의 경계를 허무는 지점 어딘가에서 이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는 셈이다.
속마음을 만나는 안전한 공간
힙합에 진심인 어글리밤은 아이러니하게도 힙합 때문에 걱정한다. 한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대중화된 힙합은 지나치게 반항적이고 폭력적으로 노출된 면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이 어글리밤 활동에 참여한다고 하면 보호자들이 반대하거나 걱정하기도 한다. 사실 미디어를 통해 힙합이 대중화된 게 아니라 그 프로그램과 아티스트들이 대중화된 것이다. 아무래도 안정적인(?) 활동에 관심이 많은 보호자에게는 다소 거칠고 위험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런 문화적 편견과 인식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서도 다양한 활동을 하며 좋은 사례를 남기고자 노력한다.
새로운 시도를 하고 싶은 선생님이 저희를 찾을 때도 있지만, 대부분 힙합은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편견을 줄이는 선례를 남기고 싶어요. 부모님 대상으로 힙합을 약간 교양처럼 풀어내서 특강을 하기도 했어요. 당신의 자녀가 좋아하는 힙합이 이렇게 멋있는 거라고 말씀드리고 싶었죠. 사실 그 자리에 오신 것도 어떻게 보면 자녀를 조금 더 이해하려는 과정이었을 겁니다.– 전혜원 대표
문화예술교육의 가치는 삶과 예술을 이어주는 데 있지 않을까. 이런 예술적 경험은 프로그램의 주체적 참여를 유도한다. 더불어 삶에서도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긍정적 시선을 선사한다. 한편으로 랩은 치유적인 힘을 발휘한다. ‘속병’이라는 말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다. 속병은 자기 마음을 말할 수 없음에서 온다. 초긍정을 강요하는 현대사회에서 자신의 거칠고 어두운 속마음을 안전하게 말할 수 있는 공간은 찾기 힘들다. 하지만 그런 공간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여기에 어글리밤의 문화예술교육의 특별함이 있다. 속마음과 음악적 취향을 보여도 안전한 공간, 그런 공간에서 주체적 참여가 일어날 수 있다.
마이크 앞에서 자유롭고 평등하게
어글리밤이 관계 맺는 방식은 독특하다. 힙합의 뿌리와 가치에 대한 공통된 합의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마이크 앞에 모두 평등한 것이다. 그러하기에 일종의 반항과 자유로움도 문화예술교육에 녹아든다. 물론 그렇게 진행될 수 있는 안전한 공간과 수업내용 그리고 충분한 회차를 전제로 기획되고 있다. 기말고사 기간임에도 수업에 왔다는 한 참여자에게 힙합의 매력을 물었더니 거침없이 말한다.
힙합의 매력? 약간 자유도라고 해야 하나? 다른 장르에서 느낄 수 없는 멜로디 라인이 너무 좋아요. 원래 부모님이 많이 반대하셨는데 저번에 혜원 쌤을 만나고 나서 약간 신뢰감이 쌓였나 봐요. 시험 기간에 공부 안 할까 봐 염려하시길래 근처 카페에서 공부하다가 여기 왔어요.– 참여자 이서윤(중학교 3학년)
문화예술교육은 보이지 않는 마음의 울림에 공감하는 활동이다.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할 순 없지만 공감은 가능하다. 그것이 상호존중이며 힙합에서 말하는 리스펙트이다. 이곳에서 그 방법은 랩이다. 그런 외침과 공감의 경험이 세상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인생을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시작점을 제공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흔히 누군가를 험담할 때, ‘디스(dis)’라는 단어를 쓴다. 디스는 디스리스펙트(disrespect, 무례)의 줄임말이며, 리스펙트(respect)의 반대말이다. 디스는 비교적 쉽다. 얼핏 보이는 것만 얘기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보니 디스의 주제는 말투, 차림, 생김, 주변 환경에 대한 것들이다. 자세히 보지 않아도 이해 없이도 때로는 편견만으로 얘기할 수 있다. 하지만 리스펙트는 어떠한가. 오래 보고, 경청해야 한다. 다가가서 만나고 더불어 공명해야 한다. 그렇게 마음의 울림이 생길 때 가능한 일이다. 우리네 일상은 너무 바쁘다는 핑계로 경청하고, 끈기 있게 관찰하는 걸 주저한다. 경청 없는 리스펙트는 불가능한 것이다. 리스펙트는 보이지 않는 진심에 대한 것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힙합의 가치인 리스펙트가 새롭게 다가오는 지금이다.
문화예술이 선사하는 좋은 선물 중 하나는 ‘일상탈출의 긍정적 경험’이다. 문화예술교육은 다른 시선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 훌륭한 도구이다. 매일 똑같은 일상의 현상도 예술적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그 의미와 해석이 변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네 인생에 환기와 여유를 선사한다. 현대사회에 속병은 너무 흔한 질병이 되어버렸고, 답답함과 무기력이 우리의 어깨에 무게를 더한다. 이런 갑갑한 우리에게 어설퍼도 프리스타일랩이 필요하지 않을까. 라임이 맞는다면 더 좋겠지만 그게 아니어도 내 얘기를 정리하고 뱉어보는 게 중요하다. 어글리밤이 강조하듯 조금 거칠고 반항적이더라도 자유롭게 사는 방법을 탐구하는 하루를 살아보려 다짐한다. “DROP THE BEAT!”
김준수(몬구)
김준수(몬구)
뮤지션이자 문화예술교육가. 2003년부터 음악과 생각이 있는 곳에서 함께 흐르고 있다. 2022년에 <장르는 여름밤>이라는 음악앨범과 동명의 에세이를 발표했다.
인스타그램 @mon9star
사진·영상_박영균 미술작가 infebruary14@naver.com
프로그램 사진 제공_어글리밤 @uglybaam